이 부분의 본문은 중앙고등학교입니다.
1. 개교기 (기호학교 ~ 중앙학교)
開校期, 1908년 ~ 1916년1908년 6월 1일, 애국계몽을 위한 교육단체인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서 기호학교(畿湖學校)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6월 20일 교원 양성을 목표로 하는 사범교육과정의 특별과와 20세 이상 한문에 능통한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중등교육과정의 본과로 구분되어 기호학교가 개교하였다.[1] 1908년 입학한 95명의 학생들은 9월에 모집한 후학기(後學期) 학생들을 포함하여 200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 교육과정은 지리·역사·산수·법학·경제·음악·체조 등으로 하였으며 특별과는 1년 6개월로, 본과는 3년으로 수업연한을 정하였다. 이 기호학교의 자리는 오늘날의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써 소격동의 대한제국 육군위생원 건물이었으나 1908년 12월 5일 후학기 학생들로 인원이 초과되자 오늘날 정독도서관의 바로 앞인 화동(花洞) 교사로 이전하게 되었다.[2]
기호흥학회는 기호학교를 통해서 기호지방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학교들과 밀접한 교류를 통해 교육을 통한 애국계몽과 근대화를 추진하였고, 특히 충청도의 다수 향교, 학교들과 교류가 이뤄졌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로 망국이 되면서 기호흥학회 역시 다른 애국계몽운동 단체들과 함께 조선총독부로부터 해산 처분을 당하였다. 이러한 총독부의 결정 이후 기호흥학회는 1910년 9월 11일에 의욕적으로 유길준과 그가 이끌던 흥사단이 창립한 융희학교(隆熙學校)를 흡수·통합하였고 이는 지금의 중앙중·고등학교의 시초가 되었다.
이어 1910년 11월 22일, 기호흥학회가 전국 각지의 지방 학회와 통합하여 새로이 중앙학회(中央學會)를 창립하였으며 교명 역시 사립중앙학교(私立中央學校)로 바꾸게 되었다. '중앙'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다른 지역의 수많은 '중앙'고등학교들과 달리 서울에 있는 중앙고등학교에 지역 이름이 붙지 않는 이유이며, 이름에 걸맞게 학생 역시 전국 13도에서 골고루 지원받았다. 더불어 중앙고등학교 야구부도 이 때 창단되어 100년이 넘도록 재창단 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육당 최남선이 작사한 교가도 1914년 7월 24일 만들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총독부는 끊임없이 민족 교육을 방해하고, 계몽운동을 막기 위해 '사립학교 인가제' 등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다. 특히 1911년에는 조선교육령의 공포를 통해 적극적으로 민족사학의 육성을 방해하고자 하였다. 중앙학교 역시 '사립학교규칙' 등의 적용으로 운영이 크게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중앙학회의 회장이었던 김윤식[3]은 학교를 안정적으로 인수하여 경영할 사람을 찾아다녔고, 그 끝에 만난 사람이 바로 김성수였다.
김성수는 원래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얻어 백산학교(白山學校)라는 다른 학교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당시 민족 사학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던 총독부의 강경한 거부로 결국 실패하였다. 그런 김성수에게 김윤식이 제안한 '중앙학교 인수'는 상당히 솔깃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김성수는 전라북도 부안군의 재력가인 양부(養父) 원파 김기중 선생에게 중앙학교의 인수를 위한 자금 지원을 요청하였다.
중앙고등학교 계동 교사 (1917년 경) |
생부(生父)인 김경중과 거의 대부분의 가족들은 크게 반발하였으나, 김기중만이 그의 편을 들어주며 인수를 돕고자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15년 4월 27일,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의 김성수가 김기중·김경중 두 아버지의 지원을 받아 중앙학교를 인수하게 되었다. 이 인수를 통해서 많은 것들이 변하게 되었다. 고향의 많은 땅을 팔고 김기중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으며 김성수는 지금의 중앙학교 자리인 계동 1번지 땅 4,000여 평을 사서 학교를 건설하게 되었다.
사실 김성수의 계동으로의 이전은 '고등보통학교령'이라는 일제의 교육방침에 대응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이 법령에 따라서 모든 고등보통학교는 총독부의 인가를 받고, '4개년'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 골자였는데 이는 턱없이 작은 화동 교사에는 4개 학년의 학생들을 수용하기에 벅찬 규정이었다. 그래서 김성수는 하루 빨리 넓은 부지로 새롭게 건물을 지어 학교를 이전하고자 한 것이다.[4]
1916년 6월 20일에는 대한민국 최초로 고등학교에 보트를 도입하였고, 대한민국 최초의 고등학교 조정부를 설치하였다.
2. 발전기 (중앙학교 ~ 사립중앙고등보통학교)
發展期, 1917년 ~ 1937년
사립중앙학교 졸업사진의 김성수, 최두선, 송진우, 현상윤 (왼쪽부터) [5] |
김성수는 새로운 시설과 탄탄한 교사진에 걸맞은 학교의 교지[7]를 창안·제정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웅원·용견·성신이다. 이후 김성수는 교장 취임으로부터 1년 만에 자신의 직위를 내려놓고 송진우를 교장으로, 최두선을 학감으로 하며 평교사로 돌아갔다. 당시의 교장들은 거의 대부분이 계동 인근에 거주하였는데 송진우 교장은 오늘날의 마을버스 종로 01의 '빨래터' 정류장 바로 옆[8] 옆에 살았고, 김성수 교장은 학교에서 매우 가까운 오늘날의 대동세무고 바로 옆에 살았다. 이는 이들이 중앙학교에 매우 성실히 교육활동을 하고자 하였던 것을 알려주고 있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며 민족자결주의가 등장하였고 일본에서는 도쿄의 유학생들을 주축으로 독립운동을 위한 거사 계획이 이루어진다. 거사의 과정에서 유학생들 중 한 사람인 송계백이 2.8 독립 선언서의 초안을 가지고 현상윤 선생에게 찾아온다. 이를 본 현상윤은 송진우와 자신의 친구인 최남선에게 보여줬고, 이어 보성고보 교장인 최린, 천도교 지도자였던 손병희 등에게도 그 소식을 알린다. 마침내 중앙학교의 숙직실에서 긴급한 논의가 이뤄졌고, 이들의 계획은 3.1 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9] 이러한 긴급한 논의가 이뤄졌던 자리가 바로 학교 강당 뒤 3.1 기념관이다.[10]
중앙고등학교 구 본관 (1930년 경) |
3.1 운동 참여로 위상이 오른 중앙학교는 총독부의 숱한 감시 아래에서 온전하지는 못하였으나, 끈질긴 노력 끝에 1921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로부터 ' 고등보통학교' 인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사립중앙고등보통학교로 개칭하고, 진정한 '중등교육기관'으로써 거듭나게 되었다.
1921년 10월 30일에는 서관을, 1923년에는 동관을 1층씩 증축하여 지금의 본관-동관-서관 체제를 확립하였다.
1922년 10월 5일, 중앙고보 교사이던 '조철호' 선생이 중앙고보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보이스카우트인 '조선소년군 경성 제1호대'를 창설하였다. 조선소년군은 이후 1924년 '소년척후단 조선총연맹' 이 결성되며 전국조직으로 확대되었다.
1926년에는 순종황제의 장례식이 있었다. 가뜩이나 3.1 운동의 종결 이후 억압받던 민중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울분을 표출할 수 있는 때였다. 그리고 마침내 순종황제의 인산일(영결식)에 중앙고보 학생인 이선호, 권오설 군 등이 주도하여 격문을 뿌리고 거대한 시위를 촉발하게 되는데, 이 시위가 바로 6.10 만세 운동이다. 이렇게 많은 중앙고보는 3.1 운동과 6.10 만세 운동이라는 거대한 두 독립운동에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한 거의 유일한 학교이다. 이를 기념하여 원파기념관 앞에 6.10 만세운동 기념비가 건립되었으며, 3.1 기념관과 함께 중앙고등학교의 역사성을 드높이고 있다.
1927년 3월 20일, 중앙고등보통학교의 교지(校誌)인 <계우(桂友)>가 창간되었다. 이 교지는 권덕규 선생을 필두로 하여 중앙고등보통학교 동창회에서 발행한 교우지(校友誌)로써, 오늘날에는 학교의 동아리인 문예교지부에 의하여 속간되고 있다.
1929년 2월 19일, 김기중, 김경중, 김성수, 김연수[11], 김재수[12], 박용희, 장현식을 설립자로 하는 재단법인 중앙학원이 설립되었다. 중앙학회로부터 인수된 지 약 14년 만에 공식적인 법인 산하의 학교가 되는 순간이었다.
1934년 12월 13일, 이렇게 순탄할 것만 같던 중앙고보에 거대한 화재가 발생하였다. 바로 중앙고보의 상징과도 같던 본관이 원인불명의 화재로 완전히 전소한 것이다. 그러나 중앙고보 학생들은 끝없는 학업을 정진하며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후 1930년대는 중앙고보의 투쟁기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엄청난 수의 항쟁을 벌인다. 그 중 대표적인 것에는 1935년 3월 25일에 있던 독서회 항쟁과 1944년 1월 20일부터 전개된 학병거부 운동 등이 있다. 당대의 수많은 중앙고보의 사건들을 다룬 신문기사들
3. 웅비기 (중앙중학교 ~ 중앙고등학교)
雄飛期, 1938년 ~ 1998년1937년 9월 27일, 새롭게 구 운동장에 마련된 본관이 낙성되었다. 새로운 본관은 오늘날까지 무려 80년이나 이어지고 있으며, 운동장은 동관과 서관의 뒤쪽, 즉 계산(桂山) 쪽으로 다시 만들어졌고 이 때 지금과 같은 학교 시설의 전체적인 틀이 완성되었다.[13]
한편으로 일제는 전시총동원 체제로 돌입하였고, 이에 따라 점차 더 강력히 사학을 압박하던 총독부는 중학교로 중등교육기관을 단일화시켜버린다. 그래서 1938년 4월 1일, 5년제의 중앙중학교로 재탄생하게 된다. 1939년에는 무궁화가 새겨진 모표·교표를 강제로 폐지하였고, 교가 역시 민족의 상징인 무궁화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금지당한다.( 지식백과 자료) 이는 위기에 몰린 일제가 민족말살통치를 시행하면서 빚어진 참극이다. 1940년, 폐지당한 무궁화 모표를 대신하여 월계관 모표가 제정되었고, 1941년 11월 11일에는 강당과 수위실을 신축하였다. 5년의 기간 동안 중앙중의 대다수의 인물들은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에 뛰어들거나 사회에서 자리 잡으며 중앙중학교의 위상을 드높였다.
마침내 1945년 8.15 광복이 이뤄졌고, 직후에 중앙학교의 상징이던 무궁화 모표가 회복되었다. 그리고 1946년, '조선임시과도정부교육령'에 의하여 6년제 중학교로 전환되었다. 1950년 6.25 전쟁 직전 '대한교육법'에 의해서 4월에는 중학교가, 5월에는 고등학교가 분리되며 오늘날의 중앙중·고등학교의 편제가 완성되었다.
1956년에는 오늘날까지 속간되는 <계원순보(桂苑旬報)>가 창간되었다. 계원순보는 이후 1980~2000년대에 잠시 발간이 중단되었다가 2010년대부터는 다시 속간되어 문예교지부에서 분리된 중앙신문반에 의하여 <계원(桂苑)>이라는 이름으로 발행되고 있다.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튼튼하게 살아남은 중앙고등학교는 이후 수준 높은 학업실력을 보이며 크게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일제에 맞선 투쟁정신이 죽은 것은 아니었는데, 1960년 4.19 혁명에는 중앙중학교와 중앙고등학교 학생 3천여 명이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힘이 보태져서 제2공화국 출범 이후로도 윤보선 대통령이 직접 인촌기념연극제를 보러 방문하는 등 더욱 국내외에 잘 알려지게 되었다.
제3공화국 시기에 중앙고등학교는 후기고 중에서 상당히 높은 경쟁률을 자랑하며 전국적으로 이름이 잘 알려진 고등학교가 되었고, 고교 평준화 이후로도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인 박지만이 재학하며 세간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1966년 6월 1일에는 구 본관의 자리에 신관과 중앙정원이 준공되었고, 본관 앞에 서거한 인촌 김성수의 동상을 설치하였다. 이 때 신관은 지금의 이름이 아니라 과학관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졌고 나중에 신관으로 바뀌었다. 이어서 1968년 6월 1일, 구 본관의 화재로 인하여 소실된 원파 김기중 선생의 동상을 중앙정원에 재건하고, 김성수의 좌상을 안치한 인촌기념도서관을 건립하였다. 또한 2010년대에 속간된 영자신문 <ChoongAng Herald>가 창간되었다. 1973년 6월 1일에는 3.1 기념관을 낙성하고 3.1 운동 책원비를 인촌 동상의 오른쪽에 건립하였다. 그리고 10월 1일에 지금은 없어진 운동장 동쪽 스탠드를 완공하였다.
1974년 3월 2일부터는 12학급으로 인가되어 새로운 평준화 세대 교육이 시작되었다. 1977년 6월 1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후원으로 어학관(현재의 예능관)이, 10월 15일에는 중앙고등학교 야구부와 축구부의 합숙소가 설치되었다.
1981년 9월 25일 문화공보부 산하 문화재관리국에서 학교의 본관, 서관, 동관을 각각 사적 제281·282·283호로 지정하였다. 1983년 6월 10일에는 6·10 만세운동 기념비가 제막되었고, 1986년 6월 7일에는 교우의 날이 제정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1992년 2월 27일에는 원파 김기중 선생을 기리기 위한 원파 기념관과 원파 좌우명비가 건립되었으며 1998년 6월 1일에는 무려 개교 9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4. 도약기 (중앙고등학교 ~ 현재)
跳躍期, 1999년 ~오늘날의 중앙고등학교 본관 |
수많은 시간이 흐르고 지나도, 중앙고등학교는 여전히 새로워지며 미래를 대비해나가고 있다. 2000년에는 중앙고등학교 공식 홈페이지를 개설하였고, 2008년에는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일민 체육관과 일민 정보과학관이 완공되고 인문학 박물관이 원파기념관 안에 자리를 잡았으며, '교가비', '이상화시비', '서정주시비', '채만식 문학비'가 설치되었다. 마침내 2009년에는 자율형 사립고등학교로 지정되어 비록 서울광역형 자사고일지라도, '전국 각지의 인재들의 학교'를 표방하였던 초기의 목적에 가장 근접해가고 있다. 2012년 자사고 지정으로 들어오게 된 非종로 지역 학생들을 위한 생활관(기숙사)이 낙성되었다.
[1]
2007년까지는
6월 1일이 기호학교 설립안 가결일이기 때문에 '
개교기념일'로 정하였으나,
2008년 개교 100주년 기념식 때부터
6월 20일로 복원하기로 결정하여
6월 20일로 바뀌게 되었다.
[2]
이 화동 교사는 김성수 계열 법인들(
동아일보,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등)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곳으로 기호학교와 중앙학교가 사용하다가 김성수의 중앙학교 인수 직후 학교가 계동으로 이전되면서 자리가 비었다. 그래서
1920년에 창간된
동아일보가 이곳을 사옥으로 썼다.
위치는 이곳. 로드뷰에서 앞면이 안 보이는 작은 비석이 기념 표석이다. 그런데 잘 보면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 시행 이전 중앙고의 가장 큰 라이벌이었던
경기고등학교 구 교사의 바로 앞이다! 물론 중앙고가 한참 전에 이전하여서 크게 상관은 없지만 참 오묘하다.
[3]
역시
인촌 김성수와 마찬가지로 친일 행위가 있었으나 이 사람은
3·1 운동에
이용직과 함께 참여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 목록 등지에서는 제외되었다.
[4]
실제로 김성수를 도왔고, 후에
동아일보 사장과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을 맡기도 했던
송진우는 학생들의 등교에 불편하고 학교 발전에 지장이 있다며 불평을 하긴 했으나 김성수는 '나중에 이 앞에 집들이 들어서면 괜찮다'며 강행하였다.
송진우가 옳았다.
[5]
이 당시 김성수는 교주(校主)로써 오늘날의 이사장 역할을, 최두선과 송진우는 각각 학감과 교원을 하다가 둘 다 교장을 역임하며, 현상윤은 중앙고보 승격 직후 교장이 되었다. 네 사람 모두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대단한 사진이다. 참고로 당시는 중앙학교가 20세 이상의 성인을 받았기 때문에 김성수 등이 입학 후 졸업할 수 있었다.
[6]
중앙학교의 교사이자 국어학자로, 조선어연구회의 창립을
주시경과 함께 주도하였고,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과 <조선어큰사전> 등의 편찬에 참가하였다.
[7]
다른 학교의 교훈으로 봐도 무방하다.
[8]
원서동 빌라의 주차장 기둥에 까맣게 붙어있는 표지판만이 남아있다.
[9]
이 때 천도교 측에서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이들이 운영하여
3.1 운동에 참여하게 된 학교가 바로
보성고등학교와
보성전문학교이다. 어쩌면
고려대학교가 되는
보성전문학교와의 연결점은 이 때부터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
[10]
원래 강당 쪽이었으나 강당 건설 과정에서 소멸되었다가 강당의 뒤쪽으로 후대에 이전(移傳) 복원하게 되었다.
[11]
김성수의 동생
[12]
김기중의 친아들
[13]
이 당시의 틀을 바탕으로 이후에 지어진 건물들은 이 세 건물과 운동장을 제외한 학교 부지의 모양에 맞게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