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8월 8일 ~ 1968년 7월 14일[1] (향년 58세)
1. 개요
일제강점기 및 대한민국의 변호사. 본관은 풍양(豊壤)[2]. 서울특별시장을 지낸 경제학자 조순의 작은아버지이다.2. 생애
1909년 8월 8일 강원도 강릉군 하구정면(현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서 태어났다.[3]배재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경성고등상업학교 어학부에서 주최한 제3회 전조선중등학교 영어변론대회에서 3등에 입상하였으며, 1927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우등졸업하였다.[4] 1928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 A반[5]에 입학하여 1933년 3월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하였으며, 대학 시절부터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는 호걸풍 쾌남으로 평가받았다.
경성제국대학 졸업 후 조선총독부 철도국 서기로 근무하다가 1937년 11월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1938년 3월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사법관시보로 임용되어, 1940년 5월 평양지방법원 판사로 부임해 1943년 3월까지 근무한 후 사직하고 경기도 경성부에서 변호사로 개업했다.
1945년 8월 해방 후 홍순엽[6]과 손잡고 1946년 2월 좌익 법률가 단체인 조선법학자동맹(법맹)을 조직해 위원장을 맡은 바 있다. 동년 3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임시헌법기초위원, 4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을 맡았다. 조선정판사 사건의 변호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서울변호사회 부회장, 서울제일변호사회 회장, 대한변호사협회 상무위원장, 국제법률가협회 회장, 한국법학원 이사, 대한중석과 삼성물산 법률고문 등을 지내다가 1968년 7월 14일 저녁 6시 50분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108-1번지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7]
일본 제국 고등관인 판검사 경력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사법 부문에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