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9 17:56:48

젤코 차이코브스키

파일:Željko Čajkovski.jpg
이름 젤코 차이코브스키
(Željko Čajkovski)
생년월일 1925년 5월 5일
사망년월일 2016년 11월 11일 (향년 91세)
국적 파일:크로아티아 국기.svg 크로아티아 | 파일:독일 국기.svg 독일
출신지 유고슬라비아 왕국 자그레브
포지션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신체조건 170cm | 74kg
소속팀 HAŠK (1942-1945)
GNK 디나모 자그레브 (1945-1956)
SV 베르더 브레멘 (1956-1958)
1. FC 뉘른베르크 (1958-1959)
1. FC 리히텐펠스 (1959-1960)
SpVgg 란스후트 (1960-1963)
국가대표 19경기 12골 (1947-1951)
감독 SpVgg 그로이터 퓌르트 (1964-1965)
보루시아 노인키르헨 (1966-1968)
VfR 하일브론 (1974)
SC 바커 04 베를린 (1975)
잘츠부르크 AK 1914 (1977)
가족관계 즐라트코 차이코브스키



1. 개요2. 생애
2.1. 선수 생활2.2. 감독
3. 스타일 & 평가
3.1. 선수3.2. 감독
4. 뒷이야기5. 수상
5.1. 선수
5.1.1. 클럽5.1.2. 국가대표
5.2. 감독
5.2.1. 클럽

[clearfix]

1. 개요

유고슬라비아(現 크로아티아)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차이코브스키는 1938년부터 HAŠK의 유스팀에 소속되었고 곧 그의 2살 터울 형 즐라트코와 유스팀에서 자리를 잡았다. 차이코브스키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출혈성 궤양으로 전선 배치는 피했지만 빨치산에 강제징집당하기는 했다.

전쟁이 끝난 후 HAŠK가 해체되자 젤코는 각각 새로 창단된 GNK 디나모 자그레브에, 즐라트코는 FK 파르티잔으로 팀을 옮겼다. 차이코브스키는 디나모 자그레브에서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우승 2회, 리그에서 184경기 출전해 68골을 넣었다.

차이코브스키는 1956년, 해외 이적의 기회를 얻어 독일에 진출했다. 차이코브스키의 새 팀은 SV 베르더 브레멘. 그는 베르더 브레멘의 2년간 33경기에서 12골을 넣었고 이 시기에 쾰른 스포츠 아카데미에서 코치 자격증도 얻었다.

1958년, 차이코브스키는 1. FC 뉘른베르크에 잠시 있었지만 단 한 경기도 출전 명단에 올라가지 않았고 이후에는 주로 아마추어 리그에서 활동했다.

2.1.2. 국가대표

차이코브스키는 1947년,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에 발탁되어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참가했다. 유고슬라비아는 올림픽 결승전에서 그레 트리오를 앞세운 스웨덴에 1:3으로 패해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1949년, 유고슬라비아는 1950년 월드컵 진출을 위해 지역 예선에 참가했다. 유고슬라비아는 이스라엘을 2차전 합계 11:2로 크게 이기고 프랑스와 최종 라운드에서 격돌했다. 홈 앤드 어웨이로 펼쳐진 2게임에서 모두 1:1의 결과가 나오자 유고슬라비아와 프랑스는 1949년 12월 11일, 중립 지역인 이탈리아 피렌체 스타디오 코무날레에서 최종전을 치르게 되었다. 정규 시간 90분의 결과는 2:2, 양팀은 연장전에 들어갔고 여기서 진출권을 가져온 사람이 바로 차이코브스키였다. 차이코브스키는 연장 후반 9분에 결승골을 터뜨려[2] 유고슬라비아에 20년 만의 월드컵 진출권을 안겨줬다.

1950년 월드컵에서 차이코브스키는 유고슬라비아의 두 번째 경기였던 스위스전부터 출전했고 그는 스위스의 골문을 2번 흔들었다. 결과는 4:1. 그러나 유고슬라비이는 마지막 경기에서 브라질에 0:2로 패하며 1950년 월드컵에서 퇴장하게 되었다.

2.2. 감독

차이코브스키는 1964년, SpVgg 그로이터 퓌르트에서 처음 감독직을 맡았고 1966년까지 그로이터 퓌르트에 있었다. 차이코브스키는 보루시아 노인키르헨으로 자리를 옮겨 1967년 레기오날리가 쥐트베스트[3] 우승으로 노인키르헨을 분데스리가에 진출시켰다. 그리고 그는 이무렵 서독 여권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노인키르헨은 승격 시즌에 바로 강등당했고 차이코브스키와 노인키르헨의 인연은 여기까지였다.[4]

이후에도 차이코브스키는 세 팀을 더 맡았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3. 스타일 & 평가

3.1. 선수

차이코브스키는 스피드가 빨랐고 뛰어난 기술을 가진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였다. 그는 패스와 슈팅에도 능해 많은 공격 포인트를 올렸다.

3.2. 감독

젤코는 형 즐라트코에 비하면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래서 오토 프레이는 차이코브스키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지금 차이코브스키를 평해보면 충분히 터프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는 매우 예의 바르고 친절한 사람이었고 농담을 하며 우리의 등을 두드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필요한 강인함이 부족했습니다.
오토 프레이

4. 뒷이야기

  • 차이코브스키는 젊었을 때 테니스 선수로도 활약했는데 1947년엔 크로아티아 선수권 대회 준결승까지 올라갔다.

5. 수상

5.1. 선수

5.1.1. 클럽

  •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우승 2회: 1947-48, 1953-54( GNK 디나모 자그레브)
  • 유고슬라비아컵 우승 1회: 1951(GNK 디나모 자그레브)
  •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준우승 1회: 1946-47, 1951(GNK 디나모 자그레브)
  • 유고슬라비아컵 준우승 1회: 1950(GNK 디나모 자그레브)

5.1.2. 국가대표

5.2. 감독

5.2.1. 클럽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2] 이 골은 슈팅이 거의 불가능한 각도에서 나온 기적에 가까운 골이었고 아마 차이코브스키에게 같은 상황을 100번 만들어줘도 다시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평이 나왔다. [3] 당시에는 레기오날리가가 지금의 차상위 리그의 역할을 했다. [4] 당시 노인키르헨은 34경기에서 93골을 실점해서 수비에 문제점을 많이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