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20:58:07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

1. 개요2. 상세

1. 개요

1989년부터 1997년까지 일어났던 라이베리아의 첫 번째 내전.

2. 상세

“총을 든 소년들은 마약에 취해 풀린 눈으로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거리를 쏘다니다 보이는 것마다 약탈하고 소녀들을 강간하여 임신시켰다.”
"수만 명이 한꺼번에 음식과 숨을 곳을 찾아 몰려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총알과 폭탄 아니면 강간과 콜레라뿐이다"
영국 BBC 방송이 보도한 국경 없는 의사회(MSF)의 한 의사가 보내 온 일기 중에서
1944년부터 1971년까지 윌리엄 터브먼이 집권하면서 라이베리아는 안정기를 맞게 되었다. 1944년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터브먼은 미국계 라이베리아인들과 라이베리아 현지 원주민들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통치를 모색했고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내주는 등 원주민들의 불만을 어느 정도나마 해소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다졌고, 미국과는 혈맹관계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외국자본을 끌여들였다. 또한 아프리카 독립에 발 맞추어서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유대를 다지는 외교정책도 펼쳤다. 그 일환으로 한국 전쟁 시기에는 대한민국에게 물자 지원을 한 국가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 결과 1950년대에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할 정도로 고도성장을 누리게 되었고 한때 1인당 국민소득이 한국 대비 2배에 다다른 적도 있었다. 하지만 27년에 걸쳐서 집권했다는 부분에서 어렴풋이 알 수 있듯이 그는 1955년 암살미수사건이 터진 이후로는 야당의 발을 묶고 독재적인 정치를 폈으며 경제성장이 되고 있음에도 교육에 대한 투자는 저조하여 라이베리아의 문맹률은 여전히 높은 수준에 머물게 된다. 이 때문에 근본적인 빈부격차는 해소되지 않아 경제적 부분에서도 명과 암이 뚜렷이 엇갈린다. 하지만 이후의 참상에 비하면 그나마 경제적으로 풍족했고 평화로웠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라이베리아 장노년층들은 현재와 비교해 이때를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여튼 1970년대 중반부터 고무 철광석 가격이 떨어지는 바람에 경제성장도 한계를 맞으며 라이베리아는 현지인들과 이주민간의 갈등이 심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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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를 일으키며 라이베리아 내전의 막을 연 새뮤얼 케니언 도(Samuel Kanyon Doe, 1951년 5월 6일 ~ 1990년 9월 9일)

결국에는 1980년 하사관들의 쿠데타가 벌어져 토착 원주민계인 크란족 출신의 새뮤얼 케니언 도가 대통령으로 집권한 뒤 미국 출신의 흑인들과 덤으로 기타 부족들까지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쿠데타군은 아메리코 라이베리안의 윌리엄 톨버트 대통령 및 톨버트 밑에서 일하던 고관을 살해하여 아메리코 라이베리안 정권을 무너뜨렸고 도 장군은 정권을 획득한 후 독재정치를 실시하여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처형했다. 1985년 10월 15일에 치러진 선거에서 도는 대규모 부정 선거를 저질러서 불법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이에 1985년 11월 12일에는 기오족 출신으로 1980년 도의 쿠데타에 가담했던 토머스 키옹파 장군이 이끄는 기오족과 마노족의 병사들이 도 정권에 반발하여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실패하여 키옹파 및 사무엘 도 정권에 반기를 든 기오족과 마노족의 일원들은 11월 15일 처형되었다. 그 후 도는 자신의 출신부족인 크란족만으로 구성된 라이베리아군(AFL)을 기오족과 마노족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파병하여 보복으로 기오족과 마노족을 학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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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베리아 내전 당시의 군벌 찰스 테일러 혁명연합전선(RUF)’의 지도자이자 시에라리온 내전의 전범 포다이 산코

당연히 이에 반발한 미국계 흑인들인 '아메리코 라이베리안'들은 크란족 정권의 박해를 받던 기오족, 마노족까지 총규합하여 찰스 테일러를 중심으로 1989년부터 라이베리아 민족애국전선(NPFL)을 조직하고 저항했다. 이미 1987년에 아메리코 라이베리안의 테일러가 새뮤얼 도의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리비아에서 라이베리아 국민애국전선(National Patriotic Front of Liberia)을 결성하여 게릴라전의 군사훈련을 받았다.

리비아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테일러는 크란족의 도 정권에 고생하던 기오족과 마노족과 손을 잡고 1989년 12월 24일에 NPFL은 코트디부아르 측에서 국경을 넘어 라이베리아 님바주 부토오 마을로 침입하여 체류중이던 크란족 주체의 라이베리아군을 기습해 250명 전원을 죽이면서 내전이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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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 존슨 (Prince Johnson 1952년 7월 6일~ )

1990년에 접어들며 내전은 라이베리아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1990년 1월 4일 새뮤얼 도 정권에 비판적이였다고 알려진 로버트 필립스가 몬로비아에서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그 후 님바주 일대에서 라이베리아군에 의해 기오족과 마노족 주민 500명이 처형당하자 보복으로 NPFL도 부토오 마을에서 200명을 학살했다. 2월에 친미파이던 프린스 존슨[1]이 동료인 기오족과 함께 리비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찰스 테일러의 방법에 반발하여 NPFL에서 이탈하여 라이베리아 독립국민애국전선(INPEL)을 결성하자 찰스 테일러는 존슨을 반역죄로 체포하여 처형한다고 선언했다.

이윽고 수도인 몬로비아를 제외하곤 도 정권과 라이베리아군만으로는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미국 국무차관보 아프리카 담당도 새뮤얼 도 정권은 무너질 수 밖에 없다고 발언했다. 도 정권 내부에서도 해리 모니바 부통령이 도에게 사임을 요구하는 등, 도 정권은 이제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5월에 미국 해병대가 라이베리아 주재 미국대사관의 미국인 구출을 위해 라이베리아에 도착했다. 6월 14일에 몬로비아의 기독교회 관계자가 미국에 내전종결을 위한 미군개입 데모를 몬로비아 주재 미국대사관 앞에서 벌였다. 사무엘 도는 자신의 라이베리아군 간부와 함께 미군의 호휘하에 고향인 그랜드 게데주까지 안전하게 복귀한다면 금방이라도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국에 망명원조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미국은 도 정권의 뒤를 봐주고 있었지만 라이베리아 내전의 근본 원인이 사무엘 도의 독재 정치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INPEL의 존슨이 친미적인 성향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자 존슨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사실상 포기해버린 도는 대통령 관저에서 농성했지만 답이 없다는 것을 판단했는지 당시 나이지리아 국가원수이던 이브라힘 바방기다 장군에게 서아프리카 각국경제공동체 감시단(ECOMOG)의 중재로 INPEL과의 동맹협의에 나서, 몬로비아의 ECOMOG 본부에 부하 90명을 대동하고 방문하러 나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INPEL의 존슨은 도를 붙잡기 위해 도와 대화하고 싶다고 ECOMOG측에 전했다. 이 말은 도에게 전달되어 존슨을 신뢰한 도는 ECOMOG 본부에서 존슨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존슨은 도의 뒷통수를 쳤다. 그는 도를 체포하기 위해 지프차에 무기를 숨기고 부하 20명을 ECOMOG 본부로 보냈다.

ECOMOG 본부에 들어온 INPEL 병사들은 참모본부에 있던 도의 호위병 90명을 모두 죽인 후 도가 있던 참모본부 2층으로 침입했다. 가나 출신인 ECOMOG 사령관인 아널드 쿠아이노는 저항을 막을 수 없어 도를 INPEL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도는 존슨이 기다리던 INPEL 진지로 연행되어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 도는 필사적으로 대화하고 싶다고 애원했지만 존슨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부하에게 명령하여 도의 귀와 코, 손가락을 잘라내는 가혹한 고문을 가한 후에 총살형에 처해버렸다. 이리하여 새뮤얼 도 정권은 무너지고 말았다. 도가 사망한 후 반테일러의 기치를 내건 만딩고족의 알하지 크로마가 이끄는 무슬림 조직인 라이베리아 민주통일 해방운동(ULIMO)이 무장봉기하여 아모스 소여가 몬로비아만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렇게 끈질긴 내전 끝에 1990년 새뮤얼 케니언 도 대통령이 집권 10년 만에 암살당하고 그 뒤를 이어 아모스 소여의 임시정부가 출범하였지만 내전상황은 정부군과 테일러 측의 갈등으로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찰스 테일러의 NPFL과 존슨의 INPFL은 소여를 인정하지 않았고 1992년이 되자 라이베리아는 사우어파와 테일러파, 존슨파의 3개 세력으로 나뉘어져 분쟁을 벌이 시작했고 여기에 ULIMO에서 분리된 도 대통령 밑에서 일하던 크란족 출신의 루스벨트 존슨의 ULIMO-J파, 같은 크란족인 크로마파 등의 무장세력이 가세하면서 싸움이 더욱 격렬해졌다. 또 NPFL에는 5세 이상의 "차일드 솔저 유닛"이라 불리는 소년병 부대가 있었으며, 다른 무장세력도 동일한 소년병이 있었다. 또 테일러는 인접국인 시에라리온의 반란군 혁명통일전선(RUF)의 리더인 아흐메드 포다이 산코와 연대하여 NPEL은 국경을 넘어 시에라리온에서 RUF와 함께 전투를 벌여 댔다. 1993년에 일시 평화협정에 합의했지만 그 후에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이후 7년간의 내전끝에 간신히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찰스 테일러 라이베리아 대통령에 집권했으나, 이 양반도 곧 독재자가 되어 독재자답게 막장스런 행보를 자랑하였다.


[1] 1985년의 쿠데타에 참가하여 사건 후 코트디부아르로 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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