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02:47:51

제임스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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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0065bd> 스코틀랜드 왕국 스튜어트 왕조 제7대 국왕
제임스 5세
James V
파일:Portrait_of_James_V_of_Scotland_(1512_-_1542).jpg
왕호 제임스 5세 (James V)
출생 1512년 4월 10일
스코틀랜드 왕국 린리스고 린리스고 궁전
사망 1542년 12월 14일 (향년 30세)
스코틀랜드 왕국 파이프 포클랜드 궁전
장례식 1543년 1월
홀리루드 수도원
재위 스코틀랜드 왕국의 왕
1513년 9월 9일 ~ 1542년 12월 14일
배우자 발루아의 마들렌 (1537년 결혼 / 1537년 사망)
기즈의 마리 (1538년 결혼)
자녀 제임스, 로버트, 메리
아버지 제임스 4세
어머니 잉글랜드의 마거릿
형제 제임스, 아서, 알렉산더
서명
파일:제임스 5세 서명.svg

1. 개요2. 갓난아기 왕3. 재위 기간4. 결혼5. 헨리 8세와의 전쟁6. 그 후7. 평가8. 가족
8.1. 조상8.2. 자녀

[clearfix]

1. 개요

중세 스코트어: Iames V
스코틀랜드 게일어: Seumas V
영어 & 스코트어: James V

스코틀랜드 왕국 스튜어트 왕조의 제7대 국왕.

어머니 마거릿 튜더가 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를 개창한 헨리 7세의 장녀이기 때문에, 튜더 왕조의 제2대 왕으로 절대군주였던 헨리 8세의 외조카이기도 했다.

또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메리 스튜어트의 아버지이기도 하며 외손자인 제임스 6세 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동군연합이 탄생했다.

2. 갓난아기 왕

부왕인 제임스 4세 플로든 전투에서 전사하자 1살 5개월의 아주 어린 나이로 척박한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다.[1] 제임스 4세의 유언에 의하면 모후인 마거릿 튜더가 재혼하기 전까지 새 국왕의 섭정이 되도록 되어있었으나 아무래도 그녀가 야심만만한 헨리 8세의 친누나였기 때문에 잉글랜드에 악감정을 품은 친프랑스파 스코트인들은 그녀 대신 올버니 공작 존을 적임자로 보았다. 존은 제임스 3세의 동생이었던 알렉산더의 아들로, 신왕 제임스 5세 다음으로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 서열 2위였다. 존의 아버지인 알렉산더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 내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바다 건너 프랑스로 망명해 존이 아기였을 때 죽었다. 이후로 존 스튜어트는 쭉 프랑스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마거릿 튜더가 갑자기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재혼하면서 친프랑스파 세력의 목소리가 커졌고 결국 1515년 올버니 공작 존 스튜어트가 프랑스군을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실권을 장악했다. 이는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굳건한 동맹을 상징했고, 이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이 잉글랜드로부터 국경지대를 방비하는데 성공하면서 올버니 공작 존은 능숙하게 스코틀랜드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 후 마거릿 튜더는 올버니 공작 존이 프랑스에 가 있는 틈을 노려 아란 백작 등의 친잉글랜드파 귀족들과 함께 1524년 쿠테타를 일으켜 올버니 정권을 종식시키고, 제임스 5세는 12살의 어린 나이에 친정을 선포했다.

3. 재위 기간

제임스 5세가 친정을 시작한 직후에도 새아버지인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여전히 실권을 잡고 있었고, 헨리 8세는 친잉글랜드파였던 앵거스 백작을 통해 스코틀랜드의 내정에 대한 간섭을 시도했다. 그래서 성인이 된 국왕 제임스 5세는 친프랑스파 귀족들의 협조로 앵거스 백작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앵거스 백작은 영지를 몰수당한 채 탠털론 성(Tantallon Castle)으로 은거했지만 곧 성을 포위한 국왕군에게 체포되어 1529년 잉글랜드로 추방당했고 그의 일가는 모두 숙청되었다. 그후 귀족들의 도움으로 제임스 5세는 스튜어트 왕실의 재정을 늘리고, 왕실의 권위를 어느 정도 높였다.

4. 결혼

국왕의 친정과 함께 제임스 5세의 결혼 문제가 부각되었다. 1517년에 체결된 루앙 조약[2]에 따라 프랑스 왕국 발루아-앙굴렘 왕조의 제1대 왕 프랑수아 1세의 왕녀와 제임스 5세의 결혼이 약속된 적이 있었으나, 프랑수아 1세의 왕녀들은 너무 어리거나 건강이 좋지 않아 결혼을 아직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의 국왕이었던 카를 5세는 스코틀랜드를 프랑스로부터 떨어뜨리기 위해 헨리 8세의 딸이자 카를 5세의 이종사촌인 메리 공주와의 결혼을 제안했다. 한편 카를 5세의 고모였던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는 자신의 조카이자 카를 5세의 여동생이었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3]를 추천했다. 결혼이 늦어지자 제임스 5세는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의 결혼을 잠시 고려하기도 했으나 성사되지는 않았다.

1534년 12월, 프랑수아 1세는 제임스 5세가 방돔 공작 샤를 드 부르봉[4]의 공녀인 마리와 결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왕의 장녀인 마들렌 공주가 결혼하기에는 너무 병약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제안을 받아들인 제임스 5세는 직접 프랑스로 건너가 마리를 만나 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마리를 직접 본 제임스 5세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파일:발루아의 마들렌.jpg
발루아의 마들렌.

이에 제임스 5세는 다시 프랑수아 1세에게 마들렌 공주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마들렌의 건강이 이때까지도 좋지 않았기에 프랑수아 1세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으나, 마들렌의 간청에 결혼을 허락했다. 이후 제임스 5세는 마들렌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돌아갔으나, 병약했던 마들렌은 도착한 지 2개월만에 결핵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다.

파일:마리 드 기즈.jpg
마리 드 기즈.

제임스 5세는 깊은 슬픔에 빠졌으나, 국왕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다시 결혼을 해야만 했다. 프랑스와의 굳건한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프랑스 공주와 결혼해야 했던 그는 마들렌 왕비의 여동생이었던 마르그리트 공주와의 결혼을 제안했으나, 딸을 또다시 잃고 싶지 않았던 프랑수아 1세가 거절했다. 프랑수아 1세는 대신 기즈 가문[5] 출신의 마리 드 기즈[6]를 새 왕비로 추천했고 제임스 5세는 그녀와 결혼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의 동맹을 강화시켰고, 잉글랜드와의 사이가 악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5. 헨리 8세와의 전쟁

1534년 헨리 8세<수장령>을 선포해 로마 교황청과 단절하고 잉글랜드 국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하자 양국 사이에 불안한 조짐이 흐르게 되었다. 스코틀랜드를 프랑스로부터 떼어내려 했던 헨리 8세는 외조카인 제임스 5세에게 자신처럼 로마 교황으로부터 독립하라고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러나 제임스 5세는 스코틀랜드 국교회의 수장이 되기보다는 잉글랜드를 견제하는 조건으로 프랑스 왕과 교황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현재의 상황이 더 만족스러웠다. 거기다가 헨리 8세는 외삼촌이었지만 부왕인 제임스 4세를 죽인 원수이기도 했으니..

제임스 5세가 말을 듣지 않자 헨리 8세는 자기가 직접 토론으로 외조카를 설득하려고 했다.[7] 그래서 헨리 8세는 자신의 잉글랜드 북부 순회때 요크(York)에서 만나 이야기하자고 전갈을 보냈다. 제임스 5세는 대충 대답을 얼버무렸지만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헨리 8세는 제임스 5세가 올거라고 믿으며 요크에서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제임스 5세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헨리 8세는 흥분하지 않고, 제임스 5세에게
"너그러운 삼촌으로서, 조카가 오지 않은 것을 기꺼이 용서해 주겠다."
라는 요지의 편지를 보냈지만 뒤로는 자신을 무시한 외조카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그러다가 신성 로마 제국과의 이탈리아 전쟁으로 프랑스가 바빠지자 헨리 8세는 드디어 괘씸한 외조카를 손봐줄 기회가 왔다는 것을 직감하고 10,000명의 병력으로 스코틀랜드로 쳐들어가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8] 제임스 5세는 즉시 군대를 소집해서 맞서 싸웠고 결국 잉글랜드군은 고전 끝에 스코틀랜드에서 철수했다. 잉글랜드를 증오하는 제임스 5세는 복수하겠다며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직접 친정에 나서 18,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제임스 5세의 스코틀랜드군은 처음에는 해든 리그 전투에서 승리했으나[9], 1542년 11월 솔웨이 모스 전투(Battle of Solway Moss)에서 3,000명의 잉글랜드군에게 맞서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허둥거리다가 참패했다.[10] 이 패배로 낙담한 국왕 제임스 5세는 스코틀랜드로 귀환하면서 국경 지대 방비를 강화하라는 몇몇 지시를 내리고, 임신한 왕비 마리 드 기즈와 함께 린리스고(Linlithgow)로 향했다.

6. 그 후

고작 30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강이 상당히 좋지 않았던 제임스 5세는 병석에 누웠다. 잉글랜드군과의 전투에서 겪은 참패와 귀족들의 끊임없는 반란 시도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평소에 앓고 있었던 신경쇠약이 도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질이나 콜레라에 감염되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12월 8일 왕비 마리 드 기즈가 자신이 기다리던 대를 이을 아들이 아닌 딸 메리를 출산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하면서
" 우리 왕조는 여아(女兒)[11]에서 시작되어 여아로 인해 끝나는구나"
("It cam wi' a lass, and it will gang wi' a lass."[12])
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결국 딸이 태어나고 나서 1주일도 안 된 12월 14일에 향년 30세로 요절하고 말았다. 메리 스튜어트 이전에 태어난 두 명의 적자들이었던 제임스와 로버트는 모두 영아기에 죽었기에 메리가 제임스 5세의 승하 후에 유일한 적자녀로서 훗날의 메리 여왕이 되었다.

7. 평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한 것과, 똑같이 패전으로 사망한 부왕 제임스 4세보다 인간적인 매력도 다소 부족해 스코틀랜드의 역대 국왕들 중에서 인기는 없는 편이다. 하지만 친정을 시작한 뒤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던 새아버지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를 제압하고, 플로든 전투의 참패 이후 위태로웠던 스튜어트 왕가의 왕권을 안정시키는 등 능력이 전혀 없는 왕은 아니었다. 특히 제임스 5세는 아버지를 닮아 외모가 훤칠하고 무예가 뛰어났다.
마지막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비록 결과는 나빴지만, 그렇다고 그동안 스코틀랜드의 군주들이 잉글랜드한테 겪었던 패전들보다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더욱이 제임스 5세가 승하했을 땐 아직 젊은 나이였고, 헨리 8세는 노년이 다가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제임스 5세가 건강하게 오래 살아서 후사를 이을 왕자를 낳았다면 스코틀랜드의 역사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8. 가족

8.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제임스 5세
(James V)
<colbgcolor=#fff3e4,#331c00> 제임스 4세
(James IV)
<colbgcolor=#ffffe4,#323300> 제임스 3세
(James III)
제임스 2세
(James II)
헬러의 마리아
(Mary of Guelders)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Margaret of Denmark)
크리스티안 1세
(Christian I of Denmark)
브란덴부르크의 도로테아
(Dorothea of Brandenburg)
마거릿 튜더
(Margaret Tudor)
헨리 7세
(Henry VII)
초대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
(Edmund Tudor, 1st Earl of Richmond)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Lady Margaret Beaufort)
요크의 엘리자베스
(Elizabeth of York)
에드워드 4세
(Edward IV)
엘리자베스 우드빌
(Elizabeth Woodville)

8.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기즈의 마리
(Marie of Guise)
1남 로스시 공작 제임스
(James, Duke of Rothesay)
1540년 5월 22일 1541년 4월 21일
2남 올버니 공작 로버트
(Robert, Duke of Albany)
1541년 4월 12일 1541년 4월 20일
1녀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Mary, Queen of Scots)
1542년 12월 8일 1587년 2월 8일 프랑수아 2세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
슬하 1남[13]

[1] 참고로 같은 케이스인 잉글랜드 랭커스터 왕조의 제3대 왕인 헨리 6세는 생후 9개월만에 왕이 되었다. [2]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동맹을 갱신하는 조약이었다. [3] 이후 헝가리 국왕 러요시 2세의 왕비가 되었다. [4] 부르봉 왕조의 제1대 왕이었던 앙리 4세의 친할아버지였다. 따라서 마리는 앙리 4세의 고모였다. [5]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1세의 친정이자 유서깊은 명문가인 로렌 가문의 분가였다. [6] 마리에겐 두번째 결혼이었다. 롱그빌 공작 루이 2세와 첫번째로 결혼해 아들 프랑수아(훗날 롱그빌 공작 프랑수아 3세)를 낳고 사별한 뒤 제임스 5세와 재혼했다. [7] 헨리 8세는 사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고, 종교개혁 당시 마르틴 루터가 발표한 논문에 대해 반박문을 쓰기도 했다. [8] 헨리 8세가 제임스 5세의 딸인 스코틀랜드의 메리를 자신의 아들인 에드워드 6세와 혼인시킬 것을 요구하면서, 8년 동안 벌어진 이 전쟁을 거친 구혼(Rough Wooing)이라고 한다. 참고로 이 전쟁은 헨리 8세가 승하하고,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할 때까지 이어졌다. [9] 스코틀랜드군 2,000명이 잉글랜드군 3,000명과 싸웠는데 이때 잉글랜드군을 2,000명이나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10] 숫적으론 잉글랜드군이 열세였지만, 스코틀랜드군이 공격을 받았을 때 진흙탕속에 군대가 있어 위치가 나빴고, 무엇보다 잉글랜드군에겐 스코틀랜드군에게는 없었던 경기병이 대규모로 있었다. 이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은 20명이 전사했고, 도주하다가 수백 명이 강에 빠져 익사했으며 1,200명이 포로가 되었다. 반면에 잉글랜드군은 피해가 고작 전사 7명에 불과했다. [11]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의 영웅인 로버트 1세 브루스의 왕녀였던 마조리 브루스가 월터 스튜어트와 결혼하면서,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로버트 2세가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이으며 스튜어트 왕조가 창건되었다. [12] 제임스 5세는 스코트어로 말했다. 해당 문장의 영역이 "It began with a girl and it will end with a girl." [13] 제임스 6세 & 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