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4 02:52:01

정운일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순익(舜翼) / 춘주(春洲)
본관 연일 정씨[1]
출생 1884년 1월 16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서상면 남중동
(현 대구광역시 중구 장관동)
사망 1956년 2월 5일
경상북도 대구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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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대륜중학교· 대륜고등학교의 전신인 교남학원(嶠南學院)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인 정운기(鄭雲騏)[2]는 그의 첫째 남동생이다.[3]

2. 생애

정운일은 1884년 1월 16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서상면 남중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장관동)에서 1902년 함경북도 관찰부 주사(觀察府主事)를 역임한 # 아버지 정시원(鄭時源)과 어머니 청주 한씨 한시유(韓始愈)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5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다. 대한광복회는 1915년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일부 인사들이 제휴하여 결성한 혁명단체였다. 이 단체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행동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이었고 각처에 곡물상을 설치하여 혁명기지로 삼는 한편 혁명계획은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의협 투쟁으로서의 총독처단 계획과 친일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그는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16년 8월 김진만(金鎭萬)·김진우(金鎭瑀)·최병규 등과 함께 권총을 휴대하고 김진만의 장인인 대구 부호 서우순(徐祐淳)의 집에 잠입하였다. 그런데 이를 목격한 그 집의 머슴과 격투가 벌어졌고, 이러한 상황에서 김진우가 머슴에게 권총을 발사함으로써 사정이 여의치 않게 되자 일행은 일단 피신하였다.

그러나 곧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그는 1917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7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가출옥하였다. 이후 대구에서 조용히 지내다 8.15 광복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 미군정청 경상북도 상임고문을 역임하였다. 1948년에는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앞서 경상북도 선거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임되었으며 #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 경상북도 위원장 및 조사관을 역임했다.[4]

이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1956년 2월 5일 대구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정운일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본래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오리에 안장되었던 그의 유해를 2007년 10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했다.


[1] 문정공파-강화공파 24세 운(雲) 항렬. [2] 독립유공자에 서훈된 정운기와는 동명이인이다. [3] 출생 이후 작은아버지 정형원(鄭亨源)에 입양되었기 때문에, 족보상으로는 4촌 동생이다. [4] 당시 배중혁(裵重赫) 봉화군 국회의원( 대동청년단)의 반대가 있었으나, 조헌영 영양군 국회의원( 한국민주당)의 변호에 힘입어 79 대 19로 가결되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