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03:09:14

재추


1. 개요2. 재신3. 추밀4. 재추회의5. 관련 문서

1. 개요

재추(宰樞)는 고려에서 재상급 관료 집단을 가리키던 말로 중서문하성(재부)의 신(臣) 또는 성재(省宰)와, 중추원(추밀원, 추부)의 밀(密)을 아울러 일컫는다. 오늘날의 국무위원 내지 상임위원회 위원장급 인사에 해당한다.

2. 재신

중서문하성(재부)의 종1품 ~ 종2품 관료를 재신(宰臣) 또는 성재(省宰)라고 한다.

종1품 중서령은 일반적으로 포함시키지 않는다. 명목상 인신지극(人臣之極)이라 하여 신하로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 관직이었지만, 실제로는 대개 왕족의 명예직이나 고위 관료의 치사(은퇴)직 내지 추증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자겸이나 최씨 정권 최충헌, 최항처럼 드물게 권세가 극한에 이른 권신은 현직 중서령으로서 수 년에 걸쳐 정치를 주도하기도 했고, 고려 말의 증언에서도 중서령에 대한 인식이 엇갈려서 명백하게 구분된 것은 아니다.[1] 어쨌든 관료가 중서령이 될 정도라면 이미 다른 재신직을 거쳤을 것이므로 큰 의미는 없다.

각 관직은 역할보다는 등급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재신 각각의 구체적인 역할은 겸직 및 판사직에 따라 결정된다.
  • 종1품 문하시중

    • 시중은 연구자나 강사마다 유래나 입지를 고려하여 상황에 따라 다른 재신과도 구분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재신직은 엄밀히는 원래 율령제상의 관직이 아니라 재상이 아닌 다른 관직을 본직으로 가진 관료를 재상 회의에 참여시키기 위해 주던 호칭에서 유래된 것으로 고려에서도 주로 겸직의 형태로 수여된 반면, 시중은 그 자체로 본래의 관직이고, 시중이 없을 땐 겸직에 따라 수상이 결정되는 다른 재신과 달리 겸직과 상관없이 자체적으로 수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시중이 수상일 때는 재추회의 때 상석을 마련하지만, 평장사 이하가 수상일 때는 상석을 마련하지 않는다는 의전상의 차이도 있었다.
  • 정2품 평장사

    • 무신정권기에 관위 인플레가 생기기 전까지는 중서령만큼은 아니지만 시중도 빈 자리일 때가 많았다. 보통 평장사까지는 자리를 채워두기 때문에 시중이 없으면 평장사가 수상이 된다. 평장사직의 명칭에는 여러 변형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중서·문하 각각 1명씩 채워두는 것이 보통이나, 한 번에 3~4명까지 임명되는 경우도 있었다.[2] 고려에서는 중서·문하 시랑직과의 결합이 고정되었기 때문에 이 둘은 동일시된다.
  • 종2품 참지정사

    • 고려사 백관지에 따르면 정원은 1명이지만 실제로는 보통 2명, 많게는 3명까지 임명됐다.[3] 대체로 상서성의 좌·우 복야나 6부 상서직과의 결합이 일반적이었고 이하의 재신직도 같다. 참지정사 이하의 재신직은 서로가 서로를 겸한 경우도 간혹 나타난다.
  • 종2품 정당문학

    • 중국의 3성 6부제를 기반으로 한 다른 직책과 달리 정당문학은 고려 고유의 직책이다. 음서 출신자에 대한 제약이 딱히 없던 다른 재신직과 달리 대개 과거 출신자에 문장에 명성이 있어야 임명됐기 때문에 재부 안에서의 지위에 비해 거치기 까다로웠다.
  • 종2품 지문하성사

3. 추밀

중추원(추밀원, 추부)의 종2품 ~ 정3품 관료를 추밀(樞密)이라고 한다.[4]

추밀은 엄밀히 따지면 재상과는 구분되지만, 넓은 의미에서 재상 집단에 포함된다. 따라서 그 위상은 추밀에서 재신으로 승진하는 것을 입상(入相)이라고 하여 재상과는 격을 달리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던 한편, 드물게 추상(樞相)이라고 하여 재상에 준하게 취급하는 경우도 있어 일정하지 않다. 품계의 차이도 있고 주 업무 영역인 국방 문제까지도 도병마사로 인해 재신에 의한 간섭이 일반적이었으므로 재신과의 위격 차이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중요 안건은 항상 재신과 함께 의논했으므로 고려의 재상 집단을 가리킬 때는 이 둘을 뭉뚱그린 재추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구성은 중추원 문서 참조.

4. 재추회의

재신과 추밀이 회의하여 의사 결정을 하는 행위를 재추 또는 양부(兩府) 합좌라고 한다. 원래는 국방 문제는 도병마사, 법령 제정은 식목도감에서 다루고 그 외 그때그때의 중요 안건에 대해서도 재추가 함께 의논하도록 하여 비정기적으로 행해졌는데, 원 간섭기 때 도병마사가 도평의사사로 개칭되고 업무 범위가 국정 전반으로 확대되고 상시 행해졌다.

원래는 중국사에서도 송나라 중서성 추밀원을 묶어 양부라 지칭하고 중요 안건을 같이 의논하게 했기 때문에 꼭 한국사에서만 나타나던 특징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한국사 시험 및 강의에서는 과목 범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하므로 삼국시대 화백회의, 제가회의, 정사암으로부터 이어지는 한국사 특유의 귀족회의의 연장에서 이해하도록 하고 있다.

5. 관련 문서


[1] 이제현은 시중, 평장사, 참지정사, 정당문학, 지문하성사를 도병마사의 판사라고 했고, 조준은 중서령, 시중, 평장사, 참지정사, 정당문학을 중서(문하성)의 오성(五星)이라고 하여 말단의 지문하성사를 빼고 대신 중서령을 필두로 집어넣었다. [2] 고려도경에는 중서시랑 중서문하평장사,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문하시랑 겸중서문하평장사가 나타나고, 장양수 홍패에는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3명, 문하시랑 평장사 1명이 나타난다. [3] 조선 건국 초에 상고한 고려 초기 제도에 따르면 중서령 이하 지문하까지의 정원은 10명이다. # 그러나 고려사 백관지에 나타나는 해당 관직들의 정원을 다 더하면 9명이다. 따라서 이 차이는 참지정사직의 정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4] 이 중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정3품 승선(承宣)은 제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