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27년 4월 15일, 광동군벌이며 국민혁명군 4군 군장인 리지선과 광동파 정객인 국민당 중앙위원회 감찰위원 구잉펀 등이 자행한 반공 쿠데타이다. 장제스의 4.12 상하이 쿠데타와 연이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하여 국민당 좌파와 중국 공산당의 우한 국민정부는 극심한 타격을 입게 된다.2. 배경
1926년 7월, 중산함 사건으로 대권을 잡은 장제스의 주도 하에 중국국민당은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했다. 1927년 4월 시점에 이르러 북벌은 대성공하였으나 영왕운동, 천도논쟁을 비롯한 여러 내부적 이슈와 공산당이 주도한 급진적인 사회개혁으로 인하여 국민당 내부의 좌우갈등은 심각한 수준에 치달아 있었다. 이러한 좌우 갈등의 축에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가 있었는데 우한 국민정부는 장제스를 경계하여 그를 국민당 중정위 상무위원회 위원장에서 해임하는가 하면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직에서도 해임하는 등 그에 대한 정치적 공세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난징과 상하이를 점령한 이후 부쩍 강력해진 국민당 좌파의 공세에 직면한 장제스는 이에 대처하기 위해 국민당 내부의 우파 장군들을 규합하여 이에 맞서려 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광서파의 리쭝런, 바이충시와 광동파의 리지선이었다. 여기에 우징헝, 리스쩡, 장런제, 차이위안페이, 장쥐, 샤오위안충, 구잉펀 등 중앙감찰위원회의 우파 정객들도 장제스를 지지하였다.난징사건으로 인해 열강과의 충돌이 벌이지고 3.31 충칭 쿠데타가 일어나 충칭에서 공산당원들이 살해당하는 등 국민당 내부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1927년 4월 2일, 장제스는 리지선에게 전보를 보내 상하이로 와서 중대사를 상의하자고 제안하였다. 당시 리지선은 북벌 시기 호남성에서 4군을 이끌고 큰 전공을 세운 후 광동성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광동성은 혁명의 시발점임과 더불어 국민당에 가장 많은 재정수입을 가져다 주는 중요한 곳이었다. 장제스의 입장에서는 리지선의 지지가 필수적이었다.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는 리지선과 황샤오훙이 상하이에 가는 것을 반대했으나 리지선은 중앙의 지시를 무시하고 상하이로 가서 장제스와 회담을 가졌다. 리지선은 장제스의 반공 주장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3. 전개
3.1. 우한 정부와 리지선의 갈등
천도논쟁에서 장제스가 패하여 국민정부가 우한으로 이동한 후, 광저우는 배경 단락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리지선이 장악한 상태였다. 우익인사였던 리지선은 광동에서 군정을 강화하여 노동조합을 탄압했으며 미하일 보로딘을 압박하여 강제중재제도를 도입하였다. 한편 1927년 시점에서 우한 국민정부의 주요 수입은 호북에서 걷는 약간의 아편세와 더불어 광동의 세입이 전부였다. 절강, 강소, 복건 지역은 장제스가 장악하여 중앙에 재정권을 내주려 하지 않고 있었고 호남성은 너무 가난하여 돈이 벌리지가 않았다. 재정부담이 너무 심각해지 우한 국민정부는 각지 주둔군에게 군비 조달을 알아서 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되었다. 1926년 12월 1일부로 재정부는 각 주둔군에게 군비 지급을 중단했다.1927년 1월 행해진 난창 군무선후회의는 호북성과 강서성에 300만월, 호남성에 60만원에 군비를 부담하게 하고 부족액을 재정부가 떠맡기로 결의했으나 실질적으로는 각군이 현지에서 군비를 조달하는 형국이 되었다. 이는 재정부담을 경감시키는 한편 각 군장들을 군비를 무기로 제압하려는 우한 국민정부의 계획이었으나 장제스를 비롯한 각 군장은 군비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자 극도로 분노하게 되었다. 한편 광동성은 매달 400만원의 자금을 무한 국민정부에 송금하고 있었는데 광동성이 국민정부가 장악한 지역 중에서 제일 부유한 곳이었으므로 광동성으로 각 세력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1927년 2월 실업부장 겸 광동성 재정청장으로 쿵샹시가 임명되면서 광동성의 재정문제는 조용해진 듯 싶었지만 광동성 군사청장을 겸하고 있던 리지선은 휘하의 4개 사단을 확충하려는 자금 70만원을 우한 측이 주려하지 않자 큰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 때문에 리지선은 군사청 없는 군사청장이 되어 직함만 있지 지휘할 부서가 없었다.
재정권을 확보하려는 우한 국민정부와 군비 문제로 큰 갈등을 빚은 리지선은, 장제스를 견제하기 위해 공산당과 친밀한 입장을 보였던 청첸, 루디핑이나 눈치를 보며 애매한 태도를 유지한 광서파와 달리 장제스의 반공 구상에 적극적으로 동의를 표하며 장제스를 지지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힘을 얻은 장제스는 광서파를 다그쳐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부대들을 해산시키고 급기야 4월 12일,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한편 우한 국민정부는 장제스가 어느 정도의 행동을 취할 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장제스와 회동한 리지선의 중앙집행위원, 총사령부 총참모장, 군사위원직을 박탈하는 등 강경한 모습만을 보이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
3.2. 리지선의 봉기
난데없는 상하이 쿠데타에 우한 국민정부가 얼떨떨해하고 있는 사이, 리지선과 구잉펀은 즉각 군대를 파견하여 광저우의 중화전국총공회 광동사무처, 성항노동자파업위원회, 소련 고문관의 주택 등을 포위하고 1주일 동안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압수 수색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황포군관학교 교관이며 중국 공산당원인 소초녀, 웅웅 등이 피살되었다. 기외에 공산당 덩페이, 리치한, 류얼쑹 등도 살해되었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원 600여명을 포함한 총 2,100여명이 체포되고 100여명이 살해되었으며 홍콩 파업 중 결성되었던 규찰대는 모두 해산되었다. 이때 한국인 수십명 또한 좌경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에서 비밀리에 총살되었다고 한다. 또한 공산주의 성향의 철도 노동자 2천명이 해산되었고 리지선을 지지하는 기계공 노동조합이 철도부문을 장악하였다. 이어 리지선은 공회 개조위원회를 수립하여 공회를 장악하고 각 지방의 농민협회를 해산했다.4월 20일, 중국 공산당은 군사독재를 타도하자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중공 광동구 위원회로 하여금 저우치젠을 소관에 파견하여 북강 지역에서 혁명투쟁을 실시할 것을 지령하였다. 이에 광동구당위원회는 팽배, 양석훈, 장선명 등 7명을 중심으로 중공 동강특별위원회를 조직, 4월 24일, 총파업을 선언했으나 리지선의 탄압으로 인하여 실행에 옮겨지진 못했다. 결국 광동노동자대표자회의는 완전히 해산되었다. 이러한 청당 행위는 무양, 상주, 산터우 등으로 계속 퍼져 나가 광동성 전역에 걸쳐 공산당원 숙청이 실시되었다. 공산당은 이에 맞서 풍평을 총사령으로, 양선집을 당대표로 임명하여 토역혁명군을 수립하여 광동의 여러 농촌에서 무장폭동을 실시하였으나 리지선에게 모두 진압당했다. 동강특별위원회 서기 펑파이도 광저우 쿠데타에 대항하여 수차례 폭동을 조직했으나 실패하고 난창으로 이동하여 난창 폭동을 조직한다.
3.3. 난징 국민정부 수립
4월 15일, 후한민, 우징헝, 장런제, 리스쩡, 등택여, 간나이광, 천궈푸 등은 난징에서 중국 국민당 2기 4중전회 예비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정하였다. 4월 16일, 장제스는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좌담회를 소집, 중앙정치위원회와 중앙군사위원회를 소집하고 4월 18일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하였다. 주석에 후한민, 내정부장에 설독필, 외교부장에 우차오수, 재정부장에 구잉펀, 사법부장에 왕충후이가 추대되었다. 4월 17일, 우한 국민정부는 장제스를 국민당에서 제명하고 체포령을 하달했으나 우한 국민정부의 영향력은 양호 지역으로 축소되었기 때문에 이 명령은 당연히 효력이 없었다.난징 국민정부는 1호 명령을 하달, 국민당 내부에서 청당을 실시하여 미하일 보로딘, 천두슈, 쉬첸, 덩옌다, 오옥장 등 공산당원과 좌익 인사 190여명에 대한 체포령을 하달하고 5월 7일 중앙청당위원회를 수립, 등택여를 수석위원에 추대하여 대대적인 청당을 실시했다. 5월 20일, 청당 조례가 발표되어 난징 국민정부가 장악한 남방 각성에서 공산당 숙청이 실시되었다.
4. 결과
국민정부 지배 구역 중에서 가장 부유한 광동성이 떨어져 나감에 따라 우한 국민정부의 세입은 호북성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형국이 되었다. 이는 우한 국민정부가 4.12 정변 이후에 곧바로 장제스 토벌을 실시하지 않은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펑위샹과 동맹하여 하남성을 확보함으로 북방의 형국을 안정시킨 우한 국민정부는 장제스를 토벌하려 했으나 우한 국민정부 지배 구역 내부에 극심해진 노농운동과 열강과의 갈등으로 인한 경제적 붕괴로 인하여 군사적 원정을 실시하기는커녕 정권을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실정이 되었다.결국 1927년 6월, 강서성 정부주석 주페이더가 분공을 실시하였고 허젠, 양썬 등이 마일사변을 일으켜 우한 국민정부는 내부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했으며 7월에 국공결렬이 일어남에 따라 1차 국공합작은 종식되고 9월 영한합작으로 우한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는 통합하게 된다.
5.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초기혁명운동의 연구, 민두기, 서울대학교출판부.
- 중국국민혁명운동의 구조분석, 민두기 등 공저, 지식산업사.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중국근현대사, 회전광의, 일월서각.
- 중국공산당역사 1권 상,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 중국 혁명의 비극, 해롤드 로버트 아이작, 숨쉬는책공장.
- 蔣介石과 4·12 政變, 배경한, 동양사학연구 38권, 동양사학회.
6. 관련문서
- 중산함 사건(1926.3.20)
- 국민당의 1차 북벌
- 영왕운동(1926.5.25~1927.4.1)
- 천도논쟁(1926.10~1927.3)
- 상하이 폭동(1926.10.24~1927.3.22)
- 난창 군무선후회의(1927.1.1~1927.1.7)
- 한커우 사건(1927.1.3)
- 난징사건(1927.3.24)
- 4.12 상하이 쿠데타(1927.4.12)
- 마일사변(1927.5.21)
- 1차 산동파병(1927.5.28)
- 국공결렬(1927.7.15)
- 난창 폭동(1927.8.1~1927.10.4)
- 영한합작(1927.9.15)
- 당계전쟁(1927.10.20~1928.1.25)
- 장제스-다나카 회담(1927.11.5)
- 장황사변(1927.11.17~1927.12.11)
- 광저우 폭동(1927.12.11~1927.12.13)
- 국민당의 2차 북벌(1928.4.7~1928.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