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1-16 01:53:58

임영식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마츠오카 에이조(松岡永造)
자 / 호 만암(萬岩) / 죽파(竹坡)
본관 장흥 임씨(長興 任氏)[1]
출생 1904년[2] 12월 13일
전라남도 해남군 계곡면 강절리[3][4]
사망 1959년 10월 5일[5]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시
묘소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시
상훈 대통령표창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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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201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임충식 국방부장관은 그의 4촌 동생이다.[6]

2. 생애

1904년 12월 13일 전라남도 해남군 계곡면 강절리에서 아버지 임홍덕(任洪德, 1871. 10. 2 ~ 1929. 12. 14)과 어머니 해남 윤씨 윤지선(尹智善, 1868. 10. 6 ~ 1942. 11. 29)[7]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해남군 계곡면 당산리 신기마을 1079번지로 이주해 본적을 옮겼고, 이후 해남군 해남면 고도리로 이주해 해남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해남공립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19년 4월 1일 밤, 학교 기숙사에서 학우 김규수(金奎秀)로부터 '독립만세운동' 참여를 권유받았고, 이에 동의한 뒤 같은 학교를 다니는 윤준하(尹俊夏) 등에게 참여를 권유했다. 4월 5일에는 김한식과 함께 해남면 고도리 손성옥(孫成玉)의 집에 찾아가 만세운동 참여를 독려했다. 같은 날 오후 3시에는 김규수 등과 함께 4월 6일 해남면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뜻을 모으고 사전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이때 임영식은 해남면 읍내의 청년들에게 만세운동 계획을 알리고 참여를 권유했고, 태극기와 만세운동 참여를 권유하는 광고문을 제작했다.

이후 거사 당일인 4월 6일 해남면 시장에는 50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으나, 만세운동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도 전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1919년 5월 6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이른 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를 제기하여 5월 9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대구감옥으로 이송되었고, 6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른 바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어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곧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해남공립보통학교에 복학해 졸업했고, 이어 상경해 휘문고등보통학교 고학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관리로 취직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중화민국 길림성으로 이주해 학교를 세워 교포들을 가르쳤으며, 8.15 광복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1959년 10월 5일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시에서 별세했다.

201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1] 문숙공파-백헌공파-선전공파 26세 식(植) 항렬. [2] 장흥임씨대동보 권1 749쪽에는 1902년생으로 등재돼 있다. [3] 수형인명부에는 해남군 계곡면 강절리가 출생지로 기재돼 있다. [4] 인근의 당산리·덕정리와 함께 장흥 임씨 집성촌이다. [5] 장흥임씨대동보 권1 750쪽에는 1945년 7월 10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돼 있다. [6] 임충식의 아버지 임홍주(任洪疇, 1886. 10. 17 ~ 1946. 6. 2)는 임영식의 아버지 임홍덕(任洪德, 1871. 10. 2 ~ 1929. 12. 14)의 남동생이다. [7] 진사공파(進士公派) 윤진표(尹鎭標, 1846. 5. 29 ~ 1886. 4. 15)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