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런 죄도 범하지 않았지만, 단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했다는 이유로 죽는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이유로 죽게 됨을 기쁘게 생각하며,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내려 주신 커다란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1]
나는 이러한 이유로 죽게 됨을 기쁘게 생각하며,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내려 주신 커다란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1]
잠깐의 생명과 영원한 목숨을 바꿀 수 없습니다.[2]
1. 개요
일본 26위 성인은 1597년 2월 6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책형을 당한 26명의 천주교 신자다. 통상 26 성인의 순교라 지칭하고, 이들을 일본 이십육 성인이라 부른다.[3] 26명 모두 일본인은 아니고 스페인인, 중국인, 인도인, 멕시코인 등이 포함되어 있다.처형된 지 265년 뒤인 1862년에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이들은 예수가 죽은 골고다 언덕과 비슷한 니시자카(西坂)[4]에서 죽기를 원했고 처형 장소가 되었다. 지금은 순교성지가 되었으며 기념관도 함께 있다.
2. 성인의 명단
순서는 각 성인이 매달린 십자가의 동쪽부터다.[5]일본에선 세례명을 성 앞에 붙인다.
순교자 | 직분 | 특기사항 |
성 프란시스코[6] | 미상 | 체포되지 않았으나 순교하고자 나가사키로 가다 체포되어 처형당함. |
성 코스마 타케야(38세) | 선교사 | 오와리 출신. 칼 장인이었음.[7] |
성 베드로 스케지로 | 미상 | 순교자들을 돌보고자 파견되었으나 포박당하여 같이 순교. |
성 미카엘 코자키(46세) | 활 장인 | 프란치스코회 3회 소속. |
성 디에고 키사이 | 수도자 | 창으로 몸이 찔렸을 때 작은 목소리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부름. |
성 바오로 미키(33세) | 수도자 | 미요시 가문의 가신 미키 한다유의 아들. 죽기 전 "나는 아무 죄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했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당합니다" 라고 말함. |
성 바오로 이바라키(54세) | 미상 | 죽기 전 "주님!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라고 기도함. |
성 요한 고토(19세) | 수도자 | "아버지도 하느님의 가르침을 믿고 게으르지 않게 하느님을 섬기시기를"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묵주를 아버지에게 건냄. |
성 루도비코 이바라키(12세)[8] | 미상 | 본래 체포 시 제외되었지만 스스로 자청해 체포되었고 형장에 가서는 "내 십자가는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음. |
성 안토니오(13세) | 미상 | 중국인과 일본인의 혼혈. 형장에서 한탄하는 양친을 달램. |
성 베드로 밥티스타(48세) | 신부 | 스페인인. 그리스도처럼 양손이 못박히기를 희망함.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사망함. |
성 마르키노 데 라 아센시온(30세) | 신부 | 스페인인. 창으로 몸이 찔렸을 때 "주님! 저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겠습니다."[9]라고 외침. |
성 필립보(24세) | 수도자 | 멕시코인. 형 집행 중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성가를 부르면서 숨을 거뒀다. |
성 군디살보 가르시아(40세) | 수도자 | 인도인. 형 집행자에게 개전과 개종을 권유함. |
성 프란치스코 브랑코(28세) | 신부 | 스페인인. 사후에도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음. |
성 프란치스코 데 산 미구엘(53세) | 수도자 | 스페인인. 젊은 시절에 프란치스코회에 입회. |
성 마티아스 | 미상 | 세례성사를 받은 직후 박해가 시작되어 체포됨. |
성 레오 카라수마루(48세) | 선교사 | 이전에는 불교 승려였으나 개종함. |
성 보나벤투라 | 미상 | 이전에는 불교도였으나 유아세례를 받은 것을 알고 기독교로 개종. |
성 토마스 코자키(14세) | 미상 | 마르티노 신부를 도움. 나중에는 사제가 될 계획이었음. |
성 요아킴 사카키바라(40세) | 미상 | 의학을 공부하였음. 설교에 감동하여 세례를 받고 가난한 병자들을 위해 일하였음. |
의사 성 프란치스코(46세) | 미상 | 교토에서 세례를 받고 성 요셉 병원에서 일함. |
설교자 성 토마스(36세) | 선교사 | 정의감이 강했음. |
성 요한 키누야(28세) | 미상 | 수도원 가까이 살아 선교사와 접촉기회가 많았음. |
성 가브리엘(19세) | 미상 | 개종자. 양친 역시 가톨릭 신자가 됨. |
성 바오로 스즈키(49세) | 선교사 | 외국인 신부의 선교를 도움. |
3. 26위 성인 순교 성지
일본 26위 성인 기념비. 오른쪽의 2개의 탑이 있는 건 성 필립 성당 |
시성 100주년인 1962년에 순교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1981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했고 니시자카는 2012년 6월에 일본 가톨릭 교회 공식 순례지로 승인되었다.
26위 성인 기념관은 개관 시간이 09:00 ~ 17:00이며 연말연시에는 휴관한다. 입장료는 성인 500엔, 중고생 300엔, 초등학생 150엔이다. 나가사키역에서 멀지 않다. 기념관 안에는 26성인에 대한 자료 외에도 일본 가톨릭의 역사에 대한 자료들이 많은데 한국어 팜플렛이 구비되어 있으니 요청하면 된다.
카쿠레키리시탄의 마리아 관음상들 |
특히 카쿠레키리시탄이 만든 마리아 관음상과 기도에 활용된 미륵상을 볼 수 있으며, 당시 조정의 금교령, 기독교를 전도하기 위해 온 선교사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자필 편지와 조각상,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의 조각상 등이 있다. 조선인으로 임진왜란 때 끌려왔다가 선교사를 만나 개종한 뒤 막부의 탄압으로 화형당한 카이요[10]에 대한 기념비도 있는데 한일 양국의 가톨릭 교회 우호의 상징으로 2016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1595년에 제작된 일본 지도. |
기념관 내부에 전시된 1595년 무렵의 일본 지도인데 당시 서양에서 파악한 일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포르투갈 예수회의 Ludoico Teisera가 제작한 지도로 원본은 여기 참조. 홋카이도는 나타나지도 않고 도호쿠 지방은 상세하지 못하며 당시의 조선은 섬(COREA INSULA)으로 인식하고 있을 뿐 정확한 지리는 전혀 모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기념관 바로 옆에 있는 성 필립 성당은 기념관과 같이 지어진 건물로 2개의 탑이 인상적이다. 왼쪽의 탑은 지상에서의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는 걸 뜻하며 오른쪽 탑은 하늘에서의 자비로운 성령이 내려오는 걸 나타낸다. # 교토에서 처형지인 나가사키까지 걸어온 고난의 길을 기리는 기념물들이 많다.
'성 토마스 니시와 15명의 순교자'를 기리기 위해 세운 나카마치 성당이 니시자카 공원에서 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 가는 중간에 있으니 관련 종교 순례자들은 들러보는 것도 좋다.
4. 조선 출신 15인의 순교복자
- 소개된 26위의 성인 순교자 말고 393위의 순교자가 1867년과 2008년 두 번에 나누어 복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들 중 15위의 복자는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에서 끌려온 조선 출신 순교자들이다. 임진왜란 당시에 노예로 5만 명 정도의 조선인이 큐슈로 끌려갔는데 당시 나가사키 교구장인 세루케이라 주교는 1598년 노예매매에 가담한 신자들에 대한 파문과 전쟁으로 끌려온 노예에 대한 해방을 명시한 사목교서를 발표한다. 이에 천주교 신자였던 일본인들은 노예매매를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노예로 끌려온 조선인들도 자유를 되찾게 되었다. 약 7천 명의 조선인이 이로 인해 세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나가사키에는 성 로렌조 성당이라는 조선인 성당이 생기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서 393위의 순교복자 중 조선 출신이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15위의 순교복자 중에 카이요(Caius)와 빈센트 카운(Vincent Caun)이 있는데 이들은 조선인 첫 번째와 2번째 예수회 수사다. 빈센트 카운은 사제 양성을 받다가 순교하였는데 조선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사제서품이 1845년이므로 그로부터 220여 년 전에 조선인 최초의 사제가 일본에서 나올 수도 있었다. 이 이야기를 다르게 바꾸자면 막부가 가톨릭 박해를 하지 않았다면 한국 가톨릭의 역사도 충분히 바뀔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조선인 최초의 예수회 수사라고 일컬어지는 복자 카이요는 조선에서 승려로서 살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전쟁포로로 나가사키로 끌려오게 된다. 1598년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자 절에서 생활을 하던 중 예수회 신부의 눈에 띄어 세례성사를 받았고 예수회에 입회하고 싶어했지만 예수회 입회 허가는 나지 않았다. 대신 키리시탄 다이묘였던 복자 다카야마 우콘의 부하가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키리시탄 추방령을 내리자 다카야마 우콘은 필리핀 마닐라로 떠났는데 카이요는 주군을 버리지 않고 마닐라로 따라가게 된다. 복자 다카야마 우콘이 사망하자 다시 나가사키로 돌아온 그는 선교생활을 열심히 하던 중에 체포되었고 모진 고문과 협박을 견뎌야만 했다. 그는 사형집행일이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회 입회 승인이 났으나 입회 허가 소식이 일본에 전해졌을 때는 이미 순교한 후였다. 결국 생전에 예수회 수사가 되지 못했지만 조선인 최초의 예수회 수도자로 인정되었다. 그 와중에 도미니코회 수사를 숨겨준 죄로 끌려온 일본인 농부 고이치 디에고와 같은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깊은 신앙적 친교를 나누다가 같은 날 화형을 당하며 생을 마감한다. 2016년에 깊은 친교를 나누다가 함께 불길에 스러져간 두 사람을 기리는 "고이치 디에고와 조선인 복자 카이요 순교 현양비"가 일본 26위 성인 기념관 안에 세워졌다.
- 2번째 수사였던 복자 빈센트 카운의 행적은 복자 카이요 보다 조금 더 알려져 있다. 복자 빈센트 카운의 원래 성은 권씨로 세례명인 빈센트(빈첸시오)와 합쳐 빈센트 권[11]이라고 불린다. 그는 원래 양반가문의 자제였는데 13살에 양친을 여의고 임진왜란에 휘말려 노예로 나가사키로 끌려가게 되었지만 예수회 신부는 그의 총명함을 보고 세례를 주고 예수회 신학교에 입학시켜 사제로 양성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금교령이 선포되고 빈센트 권도 사로 잡혀 온갖 고문을 당했고 사형집행 전날에 수도서원을 함으로써 예수회 수사가 될 수 있었다. 복자 빈센트 권은 42살 되던 해인 1626년 6월 29일에 화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일본 26위 성인 기념관의 3층에 가면 다른 복자와는 다른 복장을 한 초상화가 한켠에 있는데 바로 복자 빈센트 권의 초상화다.
- 평신도 수도단체인 프란치스코회 재속 3회 출신으로 전해지는 조선인 복자도 있는데 복자 츠지 쇼보에 가스팔의 가족이다. 복자 츠지 쇼보에 가스팔은 정유재란때 일본에 끌려가서 포르투갈 상인에게 팔렸다가 몇 년 후 다시 나가사키로 와서 부인인 마리아와 결혼하였고 아들 키에몬 루카를 낳았다. 츠지 부부는 프란치스코 재속3회에 입회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선교에도 열정적이었으나 금교령 선포 이후 잡혀 1627년 8월 츠지 부부는 화형으로, 아들 키에몬 루카는 참수형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당초 츠지 쇼보에 파스칼을 제외하고 부인인 마리아와 키에몬 루카는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09년 일본 26위 성인 기념관에서 일하던 한국인 수녀가 마리아가 조선 출신이라는 것을 밝혀내었고 이를 나가사키 대교구장과 한일주교교류모임에서 양국 주교들이 인정하여 공식화되었다.
- 도미니코회 성직자를 숨겨주다가 최초의 조선인 순교자가 된 다케야 소자부로 코스메 가족, 일본 최초의 신부인 세바스찬 키무라 신부를 숨겨주다가 순교한 하마노마치 안토니오 가족, 프란치스코 재속3회 출신으로 글을 몰랐으나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선교를 하다가 순교한 시네몬 토마, 예수회 신부인 발다살 토마스에게 집을 제공하고 여러 편의를 제공하다가 밀고로 붙잡혀 순교한 아카시지에몬 카요 등의 조선출신 순교복자가 있다. 물론 시복된 이름에서 보면 알 수 있듯 조선인들의 한국어 이름이 한문 표기와 일본어의 음독, 훈독과 조선말을 모르는 서양 선교사들의 어설픈 음차 등 여러 단계에 걸쳐 왜곡되는 예가 빈번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이들 순교자들의 출신을 밝혀내는 일은 쉽지 않다. 시복 및 시성 이전에 조선인 포로 출신임이 밝혀지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안 그래도 마이너리티였던 막부 시절 일본의 천주교 신자들 중에서도 특히 마이너리티였던 조선인 전쟁포로 출신 신자들에 대한 관심도 널리 퍼지지는 않아서 기껏해야 일본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또는 재일동포 출신 성직자, 수도자 및 신학자들이 연구활동 중에 조선인임을 고증할 수 있는 근거를 일본, 필리핀, 유럽을 오가며 박박 긁어모아서야 간신히 한일 교계에서의 공인을 받곤 한다. 그래도 달리 생각한다면 시간이 지나 신학자들의 연구가 진척되고 증거가 모일수록 일본에서 순교한 조선 출신 신자들의 출신이 더 밝혀지리라는 기대는 할 수 있을 것이다.
5. 기타
-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 테라자와 히로타카는 이들의 순교로 가톨릭 신앙을 버렸고 이후 자신의 영지에서 가톨릭을 매우 박해하였다. 결국 그의 영지에서 시마바라의 난이라는 대규모 종교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 2016년 NHK 대하드라마 사나다마루 30화에 등장한다. 후시미성 공사에 목공 조장으로 참가하는 프란시스코 키치조에게 고니시 유키나가의 어머니 막달레나 와쿠사의 부탁으로 주인공 중 한명인 키리가 찾아가서 십자가상을 받아서 호소카와 가라샤에게 전달한다. 이후 토사[12]에 스페인의 배 산 페리페가 표류해 왔는데 실려 있는 화물의 가치가 70만석[13]이라는 소리를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전의 진도 8급 대지진으로 인해 소모된 지출을 만회한답시고 그 화물을 뺏으려고 하는데 몇년전 내린 배의 화물을 함부로 뺏지 말라는 명령과 충돌하지 않는답시고 신부 추방령을 꺼내들어서 신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한다. 귀와 코를 자르고 조리돌림 후 책형에 처하라는 잔인한 명령이었다. 프란시스코는 "왜 자신은 잡혀가지 않았을까요"라고 고민하면서 가면 안 된다는 가라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잡혀간 사람들에게 스스로 찾아간다. 이후 "6명의 선교사와 20명의 일본인 신자는 이후 나가사키에서 책형에 처해였다. 그 가운데에는 프란시스코 키치라는 장인도 섞여있었다"라는 나레이션과 함께 웃고있는 히데요시의 얼굴이 나온다. 이 사건은 도요토미 정권 안팎으로 부정적인 평가[14]를 받으며 말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제정신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일화로 나온다.
[1]
성 바오로 미키의 십자가 위에서의 설교.
[2]
12살의 성 루도비코 이바라키에게 "배교하면 살려주겠다"고 제안하자 돌아온 대답.
[3]
이들 외에도 성인 바로 전 단계인
복자로 선포된 일본인 천주교 순교자들의 수는 3백명이 넘는다.
[4]
나가사키시의
나가사키역 근처
[5]
아래의 기념비 사진에서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6]
후술하는
사나다마루에 목수로 등장한다.
[7]
26성인 코스마는 오와리 출신의 일본인이다. 진짜 조선인 순교복자 코스메 소자부로 타케야는 1619년 11월 18일 순교했다.
[8]
최연소 순교자다.
[9]
루카
23,46을 인용.
[10]
일본 기록밖에 없어서 이름이 그렇게 남아 있다.
[11]
한국식으로는 권 빈첸시오.
[12]
시코쿠 남부
[13]
당시 히데요시의 직할령이 222만석이고 다이묘중 제일 세력이 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250만석이었으니 엄청난 가치다.
[14]
히데요시를 오랫동안 섬긴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사위
사나다 노부시게에게 "화물에 욕심이 난다고 죄없는 사람들을 책형에 처할줄이야,
전하는 너무 오래 사셨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하고, 히데요시에게
맞서다가 굴복했지만
이후 역사에 아는대로
도요토미를 멸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혼다 마사노부에게 "
태합 전하의 처사는 상식을 벗어났다. 아무래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태합님은 망령나신 지도 모르겠다"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