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2 23:51:41

이한(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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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추존 존령
시조고 | 始祖考
파일:조경단.jpg
이한의 묘 조경단(肇慶壇)
출생 713년 추정[1]
장소 미상
사망 754년 추정[2] (향년 41세 추정)
장소 미상
능묘 조경묘(肇慶廟)[3] →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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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한(翰)
견성(甄城)
국적 신라
부친 불명
배우자 시조비
자녀 이자연
22대손 태조
시호 시조고선공존령
(始祖考先公尊靈)
관직 사공(司空)
}}}}}}}}} ||

1. 개요2. 상세3. 묘소 조경단

[clearfix]

1. 개요

조선 국성 전주 이씨 시조.

또한 대흥 이씨, 영해 이씨의 원시조이기도 하다. 생년은 미상[5], 754년( 신라 제35대 경덕왕 13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 상세

통일신라 중대 말기인 제35대 경덕왕 연간(742~765)에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6] 제29대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10세손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결혼해 이자연을 낳았다고 한다.[7] 《태조대왕실록》, 《 증보문헌비고》 등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태조 이성계는 이한의 22세손이다. 이성계뿐만 아니라 그 전에 무신정권의 제1대 집권자로 유명한 이의방의 선조이기도 하며, 이성계는 이의방의 동생인 이린의 직계 후손이다.

전주 이씨 시조 이한의 선대 조상들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설[8] 신라의 토착 성씨인 경주 이씨에서 분적(分籍)했다는 설[9] 등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에서는
'삼가 선원(璿源)을 상고하건대, 본디 나온 곳은 경주 이씨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태조실록》 4권(태조 2년 9월 18일 경신 2번째 기사)에서는
'신이 삼가 선원의 기원을 살펴보건대, 전주의 명망이 있는 집안으로서, 사공 휘 이한은 신라에 벼슬하여...'
라고 기록하고 있고,
《태조실록》 5권(태조 3년 2월 19일 기축 1번째 기사)에서는
'신의 선대는 본디 조선의 유종(遺種)인데, 신의 22대 조상 이한에 이르러 신라에 벼슬하여 사공이 되었으며...'[10]
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세종실록》 151권, <지리지> -전라도 전주부-
'토성(土姓)이 9이니, 이(李)•최(崔)•유(柳)•박(朴)•전(全)•유(庾)•한(韓)•백(白)이요...'
라고 기록한 것은 전주 이씨가 전주를 본관으로 한 토착 성씨[11]임을 의미하는 것일 뿐, 《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에 나오는 경주 이씨 기원 기사와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즉, 적어도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전주 이씨는 경주 이씨에서 기원한 전라도 전주의 명망있는 집안이란 것이다. 또한, 중국 기원설도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12][13]

한편 1388년 위화도 회군 이전에 세워진 이자춘신도비에서는 전주 이씨의 역사를 고려시대 초기[14] 아간(6등급) 이광희(李光禧)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이광희 이하로는 실존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중에 이광희의 위로 이한-이자연-이천상의 3대가 추가되는데, 《 인천 이씨 족보》에서 퍼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자연은 이한의 아들이고, 시중을 지냈다는 기록이 같다. 《인천 이씨 족보》에서 이자연의 동생으로 '이자상'(李子祥)이 있는데 《전주 이씨 족보》에 이자연의 아들로 이천상(李天祥)이 있으며, 이름은 다르지만 복야를 지냈다는 기록이 같다.

고려 제25대 충렬왕이 익조 이행리에게 사족(士族) 가문 출신이라고 언급한 점이나 예전부터 전주 이씨 가문이 계속해서 고려 조정에 음서로 출사한 점, 그리고 고려라는 나라가 철저하게 세습 문벌귀족들이 주도하는 나라였으며, 그들끼리의 이너서클 내에서만 끼리끼리 혼사가 이루어진 점 등을 보면 고려 태조 왕건의 증조모 집안이기도 한 곡산 강씨( 신덕왕후), 고려 왕조 창건때 삼한벽상공신 한란을 배출하기도 한 청주 한씨( 신의왕후) 그리고 경주 김씨( 정안왕후), 여흥 민씨( 원경왕후), 개성 왕씨( 이방번의 처) 등 명문 귀족 가문들과 개경 왕씨 왕가까지 모두 포함한 유수한 기득권 가문들과 지속적으로 혼인해온 전주 이씨 가문도 신원은 확실하게 보증된 기존 귀족 가문이었고, 더 나아가 고려 왕조의 혈통을 문제삼아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는 명분으로 왕씨의 고려를 무너뜨리며 일어섰으니 더 말할 건 없지만 왕가로 일어서자 그 격을 더 높이기 위해 당시 최대 명문가인 인천 이씨 가계를 일부 도용한 걸로 추정된다.

3. 묘소 조경단

전라북도 전주시 전북대학교 근처에 있는 '조경단'(肇慶壇)에는 이한의 추정 묘와 위패를 모신 장소가 있다. '조경단'(肇慶壇)은 조선 왕조가 시작(肇)되는 경사(慶)스러운 곳(壇)이라는 뜻이다.

[1] 통일신라 중대의 최전성기였던 제33대 성덕왕 12년 추정. 조선 왕조의 가계 중 생년이 알려져 있는 시조 21세 이자춘부터 30세 정원군까지 10명의 생년을 가지고, 추세선을 구해서 추정한 이한의 출생연도이다. [2] 통일신라 중대 말기인 제35대 경덕왕 13년 추정. [3] 조선 영조 47년. [4] 대한제국 광무 3년. [5] 조선 왕조의 가계 중 생년이 알려져 있는 시조 21세 이자춘부터 30세 정원군까지 10명의 생년을 가지고 추세선을 구하면, 시조 이한의 출생년을 약 713년(신라 제33대 성덕왕 12년)으로 추산할 수 있다. [6] 다만 '사공'(司空)은 중국의 관직으로, 한국사에는 고려에 있었지만 통일신라에는 사공 벼슬이 없었다. 신라에는 대신 한자가 다른 '사공'(司功) 관직이 있었는데, 도성의 토목건축사업을 담당하던 전혀 다른 관직이다. 이한이 신라에서 사공을 지낸 부분은 후대에 기록하는 과정에서 혼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7] 이 기록도 믿기 어렵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생년은 603년이므로, 이한이 제35대 경덕왕 연간에 활동한 인물이라면 기껏해야 4~5세손이 최대이다. 게다가 경덕왕 시대의 사람의 아들이 170년 후인 제56대 경순왕 시대의 사람이다. [8] 연대, 작자 미상의 《완산실록》에 중국 기원설이 등장하는데, 모화사상의 영향으로 보인다. [9] 실제로 《경주 이씨 대종보》를 보면, 시조 이알평에서 중시조인 소판공 이거명 사이의 실전 세계를 부록으로 수록하면서, 중간에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실전 세계는 경주 이씨에서 분적한 합천 이씨의 조선 말기에 발견된 족보를 근거로 한 것이다. 다만, 경주 이씨 대종회에서는 신뢰성 문제로 실전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즉, 실전 세계는 조선 말기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알평에서부터 이거명까지의 36대에 이르는 경주 이씨 계보가 어느 날 갑자기 무더기로 발견된 점, 이희두(李禧斗)의 동생으로 '이진두'를 거명하며 '두'(斗)라는 동일 항렬자를 쓰고 있는 점, 동일 항렬자를 쓰는 것은 조선 말기 당시 족보 제작이 유행하면서 정착되었다는 점 등에서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 [10] 명나라 사신이 돌아갈 때 쥐어 보낸 문서 속 내용. 그러니까 중국 황제에게 보낸 서찰의 일종이며, 따라서 화자 신(臣, 신하)은 조선 태조가 스스로 낮추어 부른 것이다. 참조 [11] '토성'(土姓)이라는 것이 그 지역에 뿌리내린 성씨라는 의미일 뿐 그 지역에서 기원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12] 망조(亡朝)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조차 총 서너 번, 40여년이 걸리도록 꼼꼼하게 개수한 세종의 성정상 태조 당대의 구술보다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기록에 좀 더 힘이 실린다. [13] 성씨와 본관이 같은 동종불혼(同宗不婚) 및 근친혼 금지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으나, 한민족은 고대(신라), 중세(고려)에 걸쳐 왕실의 근친혼 만큼은 종종 있었던 편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사정 때문인지 근세조선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씨의 글자가 같은 경우(同姓不婚, 동성불혼)까지 원천적으로 제한되었다. 때문에 조선왕조 동안 이(李)씨 성을 가진 부마나 부인은 전혀 없고, 그래서 건국 이전인 추존 목조 이안사의 효공왕후(평창 이씨), 망국 이후에 남편을 따라 한국 호적에 편입한 이방자 여사 정도만 성씨가 오얏 리 글자를 쓴다. 물론 왕조 시작부터 입조했던 명나라 대명률의 영향도 있겠지만. [14] 고려시대 초기에는 태조 왕건이 신라 및 태봉의 제도를 섞어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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