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05 21:12:27

이소응(조선)

파일:external/search.i815.or.kr/009_011.jpg
<colbgcolor=#0047a0> 이명 신항(愼恒) / 의신(宜愼) / 직신(直愼)
경기(敬器)
아호 습재(習齋) / 사정거사(思靖居士)
본관 전주(全州)[1][2]
출생 1852년
강원도 춘천도호부 남산 외이작면
(현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강촌리)[3] #
사망 1930년 4월 23일[4] (향년 78세)
부모 아버지 문포공 이도재(文浦公 李道栽)
어머니 고령 신씨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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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말기 의병장.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 생애

1852년(철종 3년) 강원도 춘천도호부 남산 외이작면(오늘날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강촌리) #에서 태어났다.

1895년(고종 32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져 전국에서 의병 항쟁이 일어나자 1896년 1월 춘천부에 집결한 지방 유생 유중락, 이만응(李晩應) 등과 농민 1,000여 명에 의해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대의 아래 일본을 오랑캐 왜노(倭奴)로 규정하는 등 의병의 명분을 뚜렷이 하는 한편 전국에 격문을 보내 함께 거사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 때 정부에서 춘천부 관찰사 겸 선유사(宣諭使)로 개화파 관료인 조인승(曺寅承)을 임명하여 파견하자 그를 친일파로 몰아 살해하였다. 이어 남한산성의 경기 의병과 연합하여 서울을 공격하기로 계획하였으나 관군의 공세로 전력이 약화되자 지평군수 맹영재(孟英在)를 찾아가 협조를 요청하였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제천 유인석(柳麟錫) 의진에 들어가 활동하다 만주 망명하였으며 춘천 의진은 종형제 이진응(李晋應)과 이경응(李景應)이 지휘하였다.

1930년 4월 23일에 향년 79세로 별세하였다.

3. 기타

  • 저서로는 춘천의 의병 운동과 유인석 의진의 활동 상황을 기록한 《습재연보》, 《습재선생문집》 등이 있다.
  • 손자가 어렵게 살고있다는 안타까운 사연이 알려졌다. # 손자 이인백씨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이 비닐하우스에 산다고 알려지면 할아버지의 명예가 훼손될까봐 명패를 반납했다고 한다.


[1] 경창군파 9대손. 'O응(應)' 항렬. [2] 경창군 이주(慶昌君 李珘) - 창흥군 이수(昌興君 李脩) - 고성부정 이석(高城副正 李氵奭) - 화평군 이벌(花平君 李橃)- 이정직(李廷稷) - 이지(李至) - 이유영(李惟英) - 이연(李淵, 《경창군파보》에서는 이연초(李淵初)로 나옴) - 이도재(李道栽) - 이소응(李昭應). 철종의 형 영평군 이경응의 양자로 입적한 청안군 이재순과는 원래 같은 경창군파 - 창흥군계로, 17촌 숙질 간이다. [3] 인근의 수동리, 방곡리와 함께 전주 이씨 집성촌이다. [4] 음력 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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