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21:08:39

육군특수전사령부/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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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군사독재 관련2. 민주화 이후3.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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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군사독재 관련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특전사는 군사정권의 최일선에서 하수인 노릇을 하며 손쉽게 동원 가능한 병력으로 권력 찬탈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는 친위대로 이용된 어두운 과거가 있다.[1]

이용된 사건만 해도 5.16 군사정변, 사법부의 독립 침해, 12.12 군사반란, 부마민주항쟁 진압, 민간인 유혈진압 및 대량학살 등 그야말로 다양하다.

이로 인해 실추된 이미지는 1990년대가 넘어서야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는데 광주에선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검은 베레모를 쓰고 돌아다니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1980년대에는 호남에 위치한 여단들뿐 아니라 모든 특전여단들에서 휴가 시 군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나가도록 권고되었던 때도 있었다고.

1.1. 쿠데타 가담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정변 전두환 전 대통령의 12.12 군사반란에 계엄군으로 특전부대들이 가담했으며, 특히 12.12에서는 주역으로 활동하였으며 3공수특전여단장 최세창 준장이 부하인 15대대장 박종규 중령을 시켜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을 체포하는 하극상을 저질렀다. 이때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사후 중령 추서)이 전사했다.

전두환이 1공수특전여단장 출신, 노태우가 9공수특전여단장 출신이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결성한 조직인 하나회로 맺어져 있던 이들 중에는 1여단장( 박희도), 3여단장(최세창), 5여단장( 장기오)이 있었으며 덕분에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화운동 진압에 특전사 병력을 거리낌 없이 이용할 수 있었다.

그래도 12.12 사태 당시 기준으로 하나회에 붙어먹어 상관을 배신한 1공수, 3공수, 5공수와는 달리 9공수는 유일하게 반란 세력이 아닌 육본 지휘를 따르고 있었던 부대였다. 당시의 9여단장은 윤흥기 준장으로 육사 출신인 다른 공수특전여단장들과는 달리 갑종 출신인데다 성격 또한 우직했고 참모장까지도 갑종 출신이라 전두환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9공수 병력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했다. 하지만 쌍방간에 병력 동원을 하지 말자는 전두환의 신사협정 제안에 육군본부의 수뇌부들이 속아넘어가고 육군참모차장이자 당시 진압군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윤성민 중장은 윤흥기 9여단장에게 회군을 명령해 이에 따라 9여단은 회군했다.[2] 12.12 군사반란이 성공한 뒤 윤흥기 여단장은 경질되어 하나회 출신 이진삼으로 갈아치워졌다.

1.2. 무장군인 법원 난입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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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부마민주항쟁 진압

1, 3, 5공수특전여단 병력이 출동·진압하였다. 계엄군의 진압은 매우 폭력적이며 혹독했다고 한다.

1.4. 5.18 민주화운동 과정에서의 학살

당시 특전사의 구조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회 전두환은 한때 1공수여단장을 한 적이 있었고 1사단장을 하고 나서 보안사령관이 되었다. 전두환은 후임 1공수여단장을 후배인 박희도에게 물려줬다. 또한 하나회 페이크 최종보스 노태우 역시 9공수여단장과 9사단장직을 역임한 바 있다. 일명 1-1 라인과 9-9 라인이라고 일컫는다. 특전사 수뇌부에는 하나회가 잔뜩 포진되어있었고 당시 특전사령관이 정병주였긴 하지만 휘하 여단장들 대부분이 이미 정병주가 아니라 전두환을 자신의 직속상관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군대에서의 서열보다 하나회에서의 서열이 더 중요했기 때문인데 하나회가 다름아닌 전두환 박정희에게 만들어 바친 군내 사조직이기 때문이었다. 이것 때문에 하나회에서는 유학성이나 황영시 등이 별 3개인 중장 계급을 달고도 별 2개인 소장 계급을 달고 있는 전두환의 부하 노릇을 한 것이다. 한마디로 특전사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이미 손아귀에 넣고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5.18 민주화운동 진압으로 이미지가 급격하게 나빠졌는데 당시 3여단, 7여단, 11여단 소속 군인들이 폭도 진압을 명분으로 광주광역시의 민간인들을 70cm 길이의 쇠심이 박힌 장봉으로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M16을 난사해 쏴죽였으며[3] 여성들의 경우 성폭행을 가해 임신시키기까지 했다.

진압작전으로는 흔히 충정훈련으로 불리는 공격적인 유혈진압법이 사용되었다. 방패없이 진압봉과 무기만으로 진압하는 방식으로, 이 훈련으로 인해 다른 특수전 훈련도 못 하는 경우가 많았다. 비정규적인 특수작전에 투입되어야 할 부대가 시위진압 부대로 변질된 것도 문제지만 게다가 훈련 중 정신교육이랍시고 "시위 군중의 배후에는 빨갱이가 도사리고 있다. 단호하고 무자비하게 때리고 짓밟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의 가스라이팅까지 벌였다.] 더 큰 문제는 시위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젊은 청년들을 보이는데로 잡아들였는데 남성들의 경우 반송장이 될 정도로 무자비하게 폭행했고 여자들의 경우 산으로 끌고 가 집단으로 성폭행을 일삼았으며 이를 넘어서 아예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총격을 가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단지 분수대를 돌아 나가려는 버스 운전사마저 아무 이유도 없이 사살했다. #

진압작전에 참가했던 계엄군들이 갖고 있던 "빨갱이나 불순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켰다는 긍지와 자부심"은 나중에 진실이 하나둘 밝혀지면서 "군사독재 정권의 앞잡이" 내지는 "잔인한 학살자"라는 불명예로 돌아왔다. 애초에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지나가는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쏴죽이는 건 물론 임산부와 유아까지 쏴죽이고 여성들을 미성년자까지 집단 강간하고 임신시키기까지 하는 행위를 위의 "빨갱이나 불순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 자체가 당시의 계엄군들이 얼마나 답이 없는 족속들인지를 증명한다. 이쯤 되면 당시 광주시민들 입장에선 군사독재 정권 시절 특전사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인간들만 모아서 입대시킨 부대인가 싶을 정도. 여기에는 이전의 부대원들 사이에서 돌던 광주, 전남에 대한 혐오적인 인식을 세뇌한 것도 한 몫한 바 있다.

지금도 광주의 나이 든 사람들은 "공수부대"라고 하면 매우 싫어하는 경우가 많은데 5.18 민주화운동 시기에 진압군의 만행을 알게 된다면 특전사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까지 살아 있는 전 하나회 소속 장군들이나 계엄군 출신들은 이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정당하고 당연한 행동이었다고 여기는 경우가 대다수이며 오히려 당시 북한에서 간첩을 보내 이를 방조했다는 식으로 왜곡된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에 보수적인 조선일보 기자 조갑제는 광주 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한 정황에 대해 '무슨 개소리냐?'는 이야기를 했고(사실 '북괴는 오판마라!' 사진을 촬영한 장본인이 조갑제다) 그들의 리더인 전두환조차도 이 이야기를 듣고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라고 금시초문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보안사 출신인 전두환이 북한의 개입이 이뤄졌다면 몰랐을 리가 없다. 아니면 당시 보안사나 중정(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서리도 겸직하고 있었다.)의 정보력이 바보가 아닌 이상. 따라서 이런 북한 관련 이야기는 자신이 그렇게 잔인하게 민간인들을 학살한 학살자라는 입장을 회피하기 위한 일종의 자기 최면에 가깝다. 실제로 이런 식의 자기 합리화는 PTSD 환자들의 증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
『89년 1월 청문회에서 양심선언한 뒤 같은 동료들이 「죽이겠다」고 협박전화를 걸고 집에도 찾아와 행패를 부렸습니다. 한 때는 협박때문에 자살도 시도했습니다. 뒤를 이어 양심선언하겠다는 동기생이 있었지만 제가 협박당하는 모습을 보고 그만뒀습니다.』〈7여단 33대대 최영신(崔永信.41.중사)씨〉
(중략)
〈「광주로 간 군인들」이 연재되는 동안 독자뿐만 아니라 당시광주에 있었던 공수부대원들부터 수많은 전화가 걸려왔다.
증언자 상당수는『네가 그런 소리했느냐』『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중앙일보, <광주로간군인들>6.끝.아물지 않는 후유증

문제는 1988년 이후 국회 광주청문회 등을 통해 양심선언한 일부 특전사 출신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에 부정적인 의견을 증언했다는 이유로 범죄를 증언했다고 보복하는 조폭들과 같은 심리로 자신들의 동료에게 협박과 테러를 가한 바 있다는 점이다. 이쯤 되면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된 특전사는 도대체 특수부대인지, 아니면 범죄 조직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2000년 5월 19일 MBC 스페셜 (충정작전, 그후 20년) 방송 내용에 따르면 5.18 민주화운동 당시 7여단 출신 최영신이 주남마을 학살의 진실을 증언하자 특전동지회에서 협박은 물론 심지어 테러까지 가한 사례가 있다!! 이들은 결국 자신들이 유혈진압은 정당했다고 주장하는 전범들과 똑같은 주장을 한 셈이다.
최씨는 양심선언 후 “홀가분했고,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또 자신의 양심선언 후 관련자들의 고백이 이어질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국방부는 최씨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반박했고, 그는 같이 군생활을 한 일부 동료들에게도 배신자로 여겨졌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가 그 때 양심선언 한 것에 대해 잘했다는 동료들이 절반, 싫어하는 동료들이 절반이에요. 경조사 자리에서 만나도 광주 이야기는 금기 사항이죠. 어느 날은 술을 마시고 후배가 ‘도대체 왜 그랬냐’고 묻기도 했죠"
단죄 못한 5·18 계엄군 범죄 - ‘5ㆍ18 김 소령 악행’ 알린 최영신씨 “계엄군 양심고백 이어질 줄 알았는데…”

게다가 위의 최영신이 2018년에 다시 한 번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무려 계엄군 출신자들 중 절반이나 되는 인간들이, 자기들이 저질렀던 쓰레기 짓을 인정하지 않고 적반하장으로 고발자인 최영신을 배신자 취급하는 뻔뻔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진급 못 한 게 한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보아 죽어도 뉘우칠 생각이 전혀 없음이 확실하다.

거기에 11공수특전여단은 뻔뻔하게도 부대 입구에 전두환 계엄군 승전 기념비를 자랑스럽게 전시해 두고 있었다가 2019년 5월 16일에 광주시와 5월 단체의 협의로 광주광역시 상무지구의 5.18 기념 공원의 발판으로 묻혔다.

이때 실추된 이미지는 2000년대가 넘어서야 간신히 겨우 회복된 정도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광주에서 검은 베레모를 쓰고 돌아다니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을 정도였다. 광주에서 검은 베레모를 쓰고 택시에 탑승하려다가 택시기사가 베레모를 보고 승차거부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전남 담양에 위치한 11여단에서는 출타시 사복 착용을 허용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11여단은 5.18 당시 광주에서 학살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광주시 주남마을 버스 승객 학살, 주남저수지 어린이 사살, 교육사와의 오인교전 및 이에 대한 분풀이로 주변 가정집들에 쳐들어가서 가택수색을 핑계로 집안에 있던 민간인 사살 등 5.18 당시 민간인 학살은 주로 11여단이 저질렀다 그래서 그런지 광주광역시 전라남도의 택시 기사 및 버스 기사들과 일반 시민들은 특전사 대원들이 휴가를 나오면 일부러 꼽을 주거나 승차거부는 기본에 심지어는 어린 고등학생들은 그들에게 시비 및 폭행을 일삼기도 한다고 전해진다. 당연히 이들도 이런 푸대접에 항의를 하지만 되려 "니들이 할 말이 남았냐?" 라는 말에 기가 죽어서 돌아다니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후에 젊은 사람들을 구성으로 해서 과거의 특전사들을 사적제재하러 간다는 인원들도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1999년에 5.18 민주화운동 피해자들이 3, 7, 11여단을 방문해서 부대원들의 사과를 받고 용서를 해 주는 행사가 있었다. # #

2. 민주화 이후

2.1.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 가담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 선포 후 곽종근 특수전사령관이 가담하여 국회의원들 체포를 위해 제707특수임무단 제1공수특전여단을 헌정 역사상 최초로 국회에 불법 진입시켰으며, 제3공수특전여단 제9공수특전여단을 헌정 역사상 최초로 헌법 기관인 경기도 과천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청사로 불법 진입시켰다. 특히 9공수의 경우 3일 밤 10시 30분경 비상 소집되어 2개대대가 버스 편으로 국회로 이동해 외곽에서 대기하다가 계엄이 해제되자 철수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서울 서대문에 위치한 겸손방송국 사옥에 불법 투입되어 입구와 주변 길목을 차단했다.[4]

12월 6일 국방부는 곽종근 특수전사령관은 수도방위사령관 이진우, 국군방첩사령관 여인형과 함께 직무정지 후 수도군단으로 대기조치를 받았다.

12월 9일 군사전문가 김종대 전 의원이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특전사 부대원들로부터 제보를 밝혔다. 제보에 따르면 계엄군은 특전사의 일부가 아닌 사실상 대다수의 부대였다고 한다. 초동단계에서의 작전 차질로 인해서 실행되지 못해 일부 부대는 되돌아갔으며 "지금까지 본 계엄군의 출동은 빙산의 일각이었다"고 말했다.

김종대 전 정의당 의원이 계엄군은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의 일부가 아닌 사실상 대다수의 부대였다며 "초동단계에서의 작전 차질로 인해서 실행되지 못해 일부 부대는 되돌아갔다"고 주장했다.

군사 전문가인 김 전 의원은 9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서 특전사 부대원들로부터 제보를 받았다며 지금까지 본 계엄군의 출동은 빙산의 일각이었다고 말했다.

김 전 의원에 따르면 12월3일 오후 10시23분 계엄이 선포됐는데, 특전사가 병력을 대기시킨 건 저녁 7시 직전부터로 보인다며 (대기) 목적을 말하지 않아서 (부대원들은) 훈련용 대기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이어훈련용 대기는 기상이 나쁘면 안 뜨는데, 그날 눈발이 날려서 당연히 출동이 취소될 걸로 알고 특수전 항공대에서 준비를 소홀히 했다며 특전사령관이 이 사실을 알고 재차 대기를 시키면서 엄청 화를 냈다고 전했다.

김 전 의원은 1공수와 9공수가 (명령받은 오후 11시보다) 48분 늦게 국회에 도착했다며 3공수 등 다른 공수부대도 이미 출동 대기 상태라서 같이 합세하기로 돼 있었는데, 3공수 병력은 국회로 추가 출동하다가 계엄이 해제되는 바람에 되돌아갔다고 한다.

12월4일 전라도 익산이나 담양에 있는 7공수, 11공수까지 서울로 올라오는 것으로 출동계획이 짜여 있었다며 계엄이 선포되기 전날인 12월2일 (특전사 행사로) 모든 여단장이 특수전사령부에 모였다고 말했다.

곽종근 육군특수전사령관이 김병주 더불어민주당 의원과의 인터뷰에서 "언론 보도를 보고 계엄 선포를 알았다"고 주장한 것 역시 거짓말이라고 지적했다. 김 전 의원은 우선 헬기가 제때 안 뜬다고 곽 전 특수전사령관이 엄청나게 화를 냈다고 하고, 새벽 1시 (계엄해제) 표결 의결에 사령관이 몹시 괴로워했다고 하며 상심하는 이런 장면들이 모두 참모들한테 노출이 됐다고 말했다.

12월 10일 그동안 곽종근 사령관의 해명이 거짓으로 드러났다. 곽 사령관은 국회 국방위원회 긴급 현안질의 출석해 지난 4일 24시30분부터 24시40분 사이 윤석열이 곽 사령관에 두 번 전화했다고 실토했다. 두 번째 통화에서는 곽 사령관에게 "의결 정족수가 아직 안 채워진 거 같다. 빨리 (국회)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안에 있는 인원들을 끄집어내라"고 지시한 사실을 밝혔다. 또 기존에는 TV를 보고 계엄 사실을 알았다고 거짓말 했으나 최종 (계엄) 임무를 받은 것이 12월 1일 일요일이었며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비화폰으로 통화하면서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그전에는 김 전 장관이 반국가 세력을 척결해야 한다는 식으로 힌트를 줬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김 전 장관으로부터 국회와 선거관리위원회 3곳, 민주당 당사, 여론조사꽃(방송인 김어준씨가 설립한 여론조사기관) 등 6곳을 확보하고 봉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민주당 당사가 작전지역에 포함됐다고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2월 13일 내란 사태 당일 육군 특수전사령부와 수도방위사령부 군인들이 비상계엄이 선포되기 전 오후 무렵부터, 서울시가 관리하는 CCTV를 들여다 본 것으로 확인되었다. 지난 3일 계엄 선포 5시간 전인 오후 5시 29분 31초, 수도방위사령부 소속 군인이 서울시 종합상황실 CCTV에 접속했다. 한남대교 주변 공영주차장에 설치된 CCTV, 용산구 한남동 일대를 비추는 다른 CCTV 7곳도 함께 열람했다고 한다. 곧이어 이번엔 특전사 소속 군인이 서울시 CCTV에 접근했는데 용산구 한남동이었다. 군은 이런 식으로 계엄 선포 전인 밤 10시 26분까지 142차례나 서울시의 CCTV를 들여다 봤다.

용산구 한남동과 강남구 압구정동, 종로구 자하문로까지 서울 전역을 가리지 않았다. 특히 8시 55분엔 노들섬에 있는 CCTV 5개를 15번에 걸쳐 살폈다. 국회에서 직선거리로 3킬로미터가량 떨어진 노들섬엔 헬기 착륙장이 있다. 비상계엄이 발표된 직후인 밤 10시 35분쯤 의사당대로, 여의도 국민은행, 국회 일대 CCTV 열람 횟수가 급증했다. 국회에서 병력이 철수한 4일 새벽 3시 48분까지 706차례나 서울시 CCTV에 접속했다. 특전사와 수방사, 그리고 수방사 산하 52보병사단과 56보병사단까지 소속도 다양했다.

서울시가 재난 상황과 치안 대비를 위해 시내 1만여 곳에 설치한 CCTV는, 통합방위태세·경계태세가 격상되거나 군 훈련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열람이 제한된다. 군 관계자는 서울시에 별다른 설명 없이 '장비 점검'과 '시스템 테스트'라며 CCTV를 들여다 본 것으로 파악되었다. #

12월 16일 검찰 특수본에서 곽종근 전 특전사령관을 구속했다.

3. 그 외



[1] 특히 제1공수특전여단이 자주 이용되었는데 서울과 주둔지가 매우 가까워 쉽고 빠르게 서울로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어디까지나 만약이지만 그때 신사협정이 안 맺어져서 육본이 회군 명령을 내리지 않아 9여단이 그대로 경복궁으로 갔더라면 하나회의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압 병력인 수기사 26사단이 출동하지 못한 상태에 당시 반란군은 수경사 예하 제1경비단 9사단, 20사단이 주력을 이루고 있어서, 9여단이 그대로 돌입했어도 큰 화력이 없고 인원도 적은 특수부대의 특성상 훨씬 많은 병력수와 화력을 갖춘 반군을 모두 제압하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서울 한복판에서 중화기를 쓸 수 없는 것은 반란군 측도 마찬가지이고 특전사 특성상 중화기를 가지도 있는 부대와 정면으로 붙을 일은 없었을 것이라서 성공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3] 심지어 버스 정류장에 서 있던 임산부마저 사격을 가했다. [4] 김어준 자택에도 체포조가 투입되었는데 김어준은 미리 제보 받고 대피하였다고 한다. 몇 공수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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