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윌리엄 몬터규 William Montag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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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28년 6월 25일 | |
잉글랜드 왕국 서머셋의 도냐트 | ||
사망 | 1397년 6월 3일 (향년 68세) | |
잉글랜드 왕국 버크셔 비스햄 | ||
아버지 | 윌리엄 몬터규 | |
어머니 | 캐서린 그랜디슨 | |
형제 | 존, 엘리자베스, 시빌, 필리파 아그네스 | |
부인 | 켄트의 조앤, 엘리자베스 드 모훈 | |
자녀 | 윌리엄 | |
직위 | 솔즈베리 백작, 가터 기사단 단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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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활약했다.2. 생애
1328년 6월 25일 제1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와 제1대 그랜디슨 남작 윌리엄 드 그랜디슨의 딸인 캐서린 그랜디슨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존[1], 엘리자베스[2], 시빌[3], 필리파[4], 아그네스[5]가 있었다.1341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막내아들인 초대 켄트 백작 우드스톡의 에드먼드의 딸인 켄트의 조앤과 결혼했다. 1344년 1월 30일, 아버지 윌리엄 몬타구가 기사 토너먼트에서 심한 부상을 입고 사망한 뒤 제2대 솔즈베리 백작이 되었다. 1346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했고, 라 호그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후 1차 캉 공방전과 크레시 전투에 참전해 승리에 기여했다. 1348년 4월 에드워드 3세에 의해 창설된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1348년 5월, 그는 충격적인 진실에 직면했다. 그의 아내인 조앤은 사실 1339년 또는 1340년에 14살 연상인 젠트리 출신의 토머스 홀랜드와 비밀리에 결혼했다. 홀랜드가 해외로 떠난 뒤, 조앤은 어머니인 리들의 웨이크 여남작 마거릿 웨이크로부터 그와 결혼하라는 지시를 받자, 자신이 비밀 결혼한 것을 밝히게 되면 홀랜드가 잘못될 것을 두려워해 순순히 따랐다. 1347년 6월, 토머스 홀랜드는 에드워드 3세에게 사실을 고하고,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조앤을 되돌려받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이로 인해 조사 위원회가 설립되자, 윌리엄은 조앤이 위원회에서 증언할 수 없도록 성채에 감금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교회의 압력을 받자 어쩔 수 없이 풀어줬고, 조앤은 자신이 홀랜드와 결혼하길 원했으며, 그와 이미 결합했다고 증언했다. 결국 1349년 클레멘스 6세는 조앤과 윌리엄과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고, 홀랜드와 조앤의 혼인 관계를 인정했다.
1355년 흑태자 에드워드의 군대에 가담해 후위대 지휘관이 되었고, 1356년 9월 19일 푸아티에 전투에 참전해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와 함께 선봉대를 공동으로 지휘해 아군의 승리에 일조했다. 1359년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했고, 1360년 브레티니 평화 협약 협상에 참여했다. 이후 잉글랜드로 돌아간 그는 웨일스의 덴비 영주권을 놓고 모티머 가문과 대립했다. 이보다 앞서, 그의 아버지 윌리엄 몬타구는 1330년 에드워드 3세가 어머니 프랑스의 이자벨과 이자벨의 애인이자 권신인 로저 모티머를 축출하기 위한 정변에 큰 공을 세운 대가로, 로저 모티머가 소유했던 웨일스의 덴비 영주권을 받았다. 그러다가 에드워드 3세는 1355년 로저 모티머의 손자인 로저를 총애해 모티머 백작위를 돌려주기로 했다.
하지만 몬타구 가문이 가져갔던 덴비의 소유자에 대해서는 명확한 결정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두 가문은 이 땅의 소유권을 놓고 대립했다. 당시 나이가 들어 정사에 거의 손을 뗀 에드워드 3세는 분쟁 해결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고, 뒤이어 왕위에 오른 리처드 2세의 섭정을 맡은 곤트의 존 역시 두 집안 중 하나를 적으로 둘 생각이 없었기에 원만한 합의를 종용할 뿐 별다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윌리엄은 늘그막인 1396년에 들어서야 덴비를 모티머 가문에 돌려주겠다는 각서를 작성했지만 이를 집행하기 전에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어 솔즈베리 백작이 된 존 몬타구 대에서야 시행되었다.
1360년대 후반에 프랑스와의 전쟁이 재개된 뒤 잉글랜드군이 내내 밀리자, 1372년 투아르를 구원하기 위한 원정군을 이끌었지만 바람이 불리하게 부는 바람에 잉글랜드로 돌아가야 했다. 1373년 잉글래드 함대를 이끌고 생말로 항구에서 카스티야 선박 7척을 격파하고 브레스트를 구원했으며, 그해 8월에서 12월까지 에드워드 3세의 3남 곤트의 존이 감행한 슈보시(Chevauchée: 약탈 행진)에 참여했다. 1377년 라 로셸 항 주변 지역을 공격했지만 현지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1379년 리처드 2세가 새 국왕으로 등극했을 때 칼레의 대장을 맡아 프랑스의 요새화된 볼리외 수도원을 점령하고 불태웠다. 1381년 6월 와트 타일러의 난이 일어났을 때 런던에 있던 그는 리처드 2세에게 반군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조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385년 리처드 2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으며, 프랑스와의 휴전 협상에도 참석했다.
1393년 가족의 영지인 맨 섬을 윌리엄 스크토프에게 팔았고, 자신의 재산 중 절반을 두번째 아내 던스터의 엘리자베스에게, 나머지는 하인과 교회에 맡긴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1397년 6월 3일 버크셔의 비스햄에서 사망했고, 몬타구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가 사망했을 때 남성 후계자를 두지 못했기에, 솔즈베리 백작위는 조카 존 몬타구에게 돌아갔다.
3. 가족
- 켄트의 조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막내 아들인 초대 켄트 백작 우드스톡의 에드먼드의 딸. 1341년에 윌리엄 몬타구와 결혼했지만 1349년 결혼 무효 처리되었다.
- 엘리자베스 드 모훈(? ~ 1414): 던스터의 9대 모훈 남작 존 드 모훈의 딸.
- 윌리엄 몬타구(? ~ 1383): 기사. 1383년 윈저에서 열린 기사 토너먼트에 참석했다가 사고로 사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