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2:30

위탄(조위)

韋誕
179년 ~ 253년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 및 서예가. 위단의 아들, 위강의 동생. 는 중장(仲將). 옹주 경조윤 두릉현 사람.

2. 생애

장지에게 초서, 한단순에게 전서를 배워 여러 서체를 모두 잘 썼는데, 특히 현판을 쓰는 것에 뛰어났다.

건안 연간( 196년 ~ 220년)에 상계리를 지내다가 낭중에 올랐으며, 태화 연간( 227년 ~ 233년)에는 무도 태수에 임명되었지만 무도군은 촉나라에게 빼앗긴 상태인데다가 글에 능해 조정에 남아 시중이 되었다. 이후 중서감, 광록대부 등의 관직을 지냈다.

조예가 능운대(凌雲臺)를 완성하자 편액을 쓰게 했는데, 높은 곳에서 보는 것과 낮은 곳에서 보는 것은 달라 바르게 해야 했기 때문에 위태로움과 두려움 때문에 머리카락이 백발이 되었다고 한다.[1] 편액에서 내려오자 자손들에게 대자 해서를 쓰지 말라고 경고했으며, 청룡 연간( 233년 ~ 237년) 낙양, , 등의 궁전이 완성되자 위탄에게 조서가 내려와 대자로 관청의 현판을 써서 영원한 모범을 만들고자 해 어필과 먹을 주었지만 모두 맡아서 쓰지 않았다고 한다.

채옹은 스스로 실력에 자부심이 있었지만 함부로 휘두르지 않았으며, 장인이 그 일을 잘하고자 하면 그 도구를 예리하게 하듯이 자신도 그래야 한다면서 거절했다. 초서는 색정에 버금갔으며, 은퇴했다가 253년에 죽었다.

위항의 평가에 따르면 초서는 장창에게 미치지 못했으며, 전서는 한단순에게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양나라 원앙은 그의 글씨는 마치 용이 붙잡고 호랑이가 웅크린 것 같고, 검을 뽑고 쇠뇌를 펼친 것 같다고 평가했는데, 서진의 장화는 위탄과 그의 아들인 위웅, 종요와 그의 아들인 종회 등 네 사람이 예서를 잘 썼다고 했다.

그의 성품에 대한 평가로는 공융이 아버지인 위단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성품이 아름답고 올곧으면서 박학하며, 총명함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기까지 해 가문을 보존할 인재라고 했다. 또한 그의 형 위강과 함께 두 개의 진주와 같다고 해 근래에 보기 드문 진귀한 인물이라고 극찬했다.

소림, 하후혜, 손해, 두지 등과 함께 문장, 로 세상에 알려졌다고 한다.[2]


[1] 《감주집》에 따르면 능운대는 매우 높았는데, 위탄이 편액에 글을 쓰고나서 그 날로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런데 편액이 바르지 않자 장인을 불러 바로잡으려 하였다. 어떤 시종하는 군졸이 신발을 신고 올라갔는데 평지를 밟는 것과 같았다. 그에게 재주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물었더니 군졸이 답하기를 "재주는 없고 양쪽 겨드랑이에 각각 몇 촌(寸) 쯤 되는 날개가 있습니다." 하였다고 말이다. [2] 위서21 왕위이유부전.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39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39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