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10:26:55

조르디 크루이프

요르디 크루이프에서 넘어옴
조르디 크루이프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파일:에콰도르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41대
클럽
파일:충칭 당다이 리판 로고.svg

21대

}}} ||
FC 바르셀로나 국제 스카우트 이사
Asesor Tecnico de Futbol Club Barcelona
파일:조르디 크라위프.jpg
이름 <colbgcolor=#ffffff,#191919> 조르디 크루이프
Jordi Cruijff
본명 요한 조르디 크라위프
Johan Jordi Cruijff[1]
출생 1974년 2월 9일 ([age(1974-02-09)]세) /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주 암스테르담시
국적
[[네덜란드|]][[틀:국기|]][[틀:국기|]] |
[[스페인|]][[틀:국기|]][[틀:국기|]]
신체 184cm
직업 축구선수( 미드필더[2], 센터백[3]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color=#373a3c> 선수 FC 바르셀로나 B (1992~1994)
FC 바르셀로나 (1994~1996)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96~2000)
셀타 비고 (1999 / 임대)
데포르티보 알라베스 (2000~2003)
RCD 에스파뇰 (2003~2004)
메탈루르흐 도네츠크 (2006~2008)
발레타 FC (2009~2010)
감독 마카비 텔아비브 (2017~2018)
충칭 리판 (2018~2019)
에콰도르 대표팀 (2020)
선전 FC (2020~2021)
행정 AEK 라르나카 (2010 / 단장)
마카비 텔아비브 FC (2012~2016 / 단장)
FC 바르셀로나 (2021~2023 / 국제 스카우트 이사)
국가대표 9경기 1골 ( 네덜란드 / 1996)
9경기 2골 ( 카탈루냐 / 1995~2004)
정보 더 보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가족 아버지 요한 크루이프
}}} ||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감독 경력4. 기타 경력5. 기록
5.1. 대회 기록
6. 이야깃거리

[clearfix]

1. 개요

네덜란드 축구선수 출신 감독 축구행정가. 2021년부터 FC 바르셀로나 기술고문을 맡고 있다.

요한 크루이프의 아들로 유명하다. 크루이프와 아내 대니 코스터 사이의 세 자녀 중 막내이며, 부모의 국적인 네덜란드 국적이지만, 크루이프가 선수 생활을 한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서 스페인 국적도 가지고 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파일:jordicruyffbarca.jpg
1992년, 아버지 요한 크루이프가 감독으로 있던 FC 바르셀로나의 리저브 팀인 FC 바르셀로나 B에서 데뷔하였다. 오스카르 가르시아와 함께 팀내 득점 1위에 오르는 등의 활약으로 1994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프리시즌 투어에서 FC 바르셀로나 1군으로 콜업되었다. 1994년 9월 4일, 1군 정식 데뷔전을 치렀으며, 11월 2일, 4-0으로 이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서 데뷔 골을 기록하였다.

이후 1994-95시즌 주전급 선수로 활약하며 28경기 9골을 기록,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로날드 쿠만과 함께 팀내 최다 득점자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으나, 잦은 부상에 시달리며[4] 성장해야 할 시기에 오히려 기량이 하락하였고 유리몸인 그저그런 선수로 전락한다. 결국, 1996년 요한 크루이프가 FC 바르셀로나 감독직에서 경질됨과 동시에 요르디의 계약도 만료되어 팀을 떠나게 된다.

파일:jordicruyffmanutd.jpg
상술한 챔피언스 리그에서의 활약 덕분인지 알렉스 퍼거슨 감독으로부터 러브콜이 왔고 1996년 8월 £1.4M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 4년 계약을 맺는다. 시즌 초반 준수한 활약을 보였지만, 11월 말 무릎 부상이 재발해 다시 바르셀로나 시절과 같은 악순환을 반복하게 된다. 1998/99시즌 셀타 비고로 임대를 떠나기도 했으나 2골만을 기록하고 맨유로 복귀한다. 결국 별 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2000년 6월 30일 계약이 만료되어 팀을 떠나게 된다. 4년간 총 57경기에 출전하여 8골을 득점하였다.

파일:jordicruyffalaves.jpg
그렇게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한 유망주로 잊혀질 때쯤, 라리가 데포르티보 알라베스로 이적, 팀을 UEFA컵 준우승으로 이끌었다.[5] 2002/03시즌 구단이 강등되면서 2003/04시즌 RCD 에스파뇰로 이적, 10여 년만에 부상 없는 첫 시즌을 보내게 된다. 이후, 2004년 잠정 은퇴했으나, 2006년 우크라이나의 메탈루르 도네츠크로 복귀하여 두 시즌을 뛰었고, 2009년 몰타의 발레타에서 플레잉 코치로 1시즌을 보낸 후 현역 생활을 마감하고,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다.

2.2. 국가대표 경력

파일:jordicruyffinternational.jpg

스페인-네덜란드 이중국적자로서 청소년시절 두 국가 모두가 국대로 선발하려고 했으나, 네덜란드를 택했다. 바르샤에서 보여준 포텐을 당시 네덜란드 국대 감독이었던 거스 히딩크에게 인정 받아 1996년 4월 24일, 독일과의 친선 경기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히딩크호 오렌지 군단에서 몇 경기 뛰기는 했으나, 잦은 부상으로 인해 성장하지 못해서 출장 수는 매우 적다. 당시 네덜란드가 골든 제네레이션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후광으로 승선은 했으나, 붙박이는 되지 못한 것이다.[6] 그리하여 UEFA 유로 1996에 간신히 승선할 수 있었으나,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는 나가지 못했다. 네덜란드 국대로 9경기에 나가 1골을 기록했다.[7]

2001년의 활약으로 2002 월드컵 지역 예선을 앞두고 있던 네덜란드 국내에서는 요르디가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지만,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한편 스페인 국대는 뛰지 않았지만, UEFA 정식 회원국이 아닌 카탈루냐 축구 국가대표팀으로는 출전하기도 했다.

3. 감독 경력

마카비 텔아비브의 단장을 맡다가 2017-18시즌에는 감독으로 취임했다. 리그를 2위로 마치기는 했는데, 2010년대 이 팀은 이스라엘 리그에서 항상 1, 2위를 다투던 팀이었기 때문에 대단한 지도력으로 보기는 힘들다.

2018년 7월, 중국 슈퍼 리그 충칭 당다이 리판 감독으로 부임했다. 전임감독이 바로 파울루 벤투. 벤투는 7월 22일 경질 당시 13위로 리그를 마쳤으나, 감독 경력은 고작 1년밖에 안되는 요르디 크루이프는 이후 2무 4패의 저조한 성적을 기록, 8월 19일에는 강등권인 15위까지 내려왔다. 이후 1무 1패를 더해 아직 첫 승도 신고하지 못한 채로 강등권인 15위에 머물러있다.

9월 15일 허난 젠예를 이겨 강등권으로 몰락시키고 강등권에서 벗어났는데, 이 패배 때문에 허난의 장외룡 감독은 해임당했다. 파울루 벤투나 장외룡을 보면 묘하게 크루이프는 한국과 간접적인 악연이 있다. 의외로 감독직에 능력이 있는 듯, 2018년 부임 초기에는 강등권을 전전했으나, 결국 강등을 면했고, 2019년에는 별다른 선수 수혈이 없음에도 팀을 중상위권에 고정시켰다.

하지만 저예산팀인 충칭의 한계 때문에 결국 10위로 리그를 마쳤다. 충칭 당다이 리판이 구단 홈페이지와 SNS계정을 통해 2019년 12월 크루이프와 상호 계약을 해지를 알렸다. 구단의 요구와 본인의 요구를 맞추지 못한 듯. 후임은 2017년까지 이 구단을 맡았던 장외룡.

2020년 1월 15일에 에콰도르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계약기간은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 남미 지역예선까지다. 하지만 7월 25일, A매치를 단 한 경기를 치러보지도 못하고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8월 14일 로베르토 도나도니 감독을 경질한 선전 FC의 새 감독으로 부임했다.

FC 바르셀로나의 차기 회장이 주안 라포르타로 결정되고 난 뒤 라포르타가 크루이프를 팀 보드진으로 삼겠다는 말을 하면서 선거 다음 날인 2021년 3월 8일, 크루이프에게 공식 합류 요청서를 보냈다고 한다.

5월 25일, ESPN의 보도에 의하면 크루이프가 라포르타와 만나 바르셀로나에서의 역할에 대해 대화를 나눌 것이라고 한다.

8월 1일부터 클럽에 합류하기로 발표가 났고, # 9월 2일에 최종적으로는 클럽의 국제 스카우트 이사직으로 확정되었다.

한편 아약스 감독인 텐하흐가 22-23 시즌부터 맨유감독부임 확정으로 공석이 된 아약스의 새 사령탑 후보중 한명이라는 루머가 있었으나 아약스가 알프러트 스뢰더르를 선임하여 무산되었다.

2023년 5월 16일, 6월 30일을 끝으로 바르셀로나를 떠나기로 하였다. 단장 마테우 알레마니가 더 나은 조건을 위해 6월 30일을 끝으로 바르셀로나를 떠나 아스톤 빌라로 간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 이 때 크루이프의 향후 거취문제도 함께 거론되었다. 구단을 떠난다는 보도와 후임 단장으로 승진[8]하는 보도가 있었는데 결국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알레마니는 빌라행을 개인적인 사유로 거절하고 바르셀로나를 떠난다는 입장을 번복했는데, 이게 크루이프와 연관이 있다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4. 기타 경력

은퇴 후 키프로스의 AEK 나르나카(2010), 이스라엘 마카비 텔아비브(2012-2016)의 프런트에서 단장으로 근무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6. 이야깃거리

  • 아버지 덕택에 세계 최고의 클럽과 네덜란드 대표팀에서 뛸 수 있었다는 낙하산 이미지가 있지만, 당시 네덜란드 대표팀의 감독이었던 거스 히딩크는 자서전 '마이웨이'를 통해 요르디가 요한의 아들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를 대표팀에 합류시킨 것은 그 사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고 밝혔다.[9] 또한 발렌시아 CF 감독 시절(1991년)부터 지켜본 바로는 득점 감각이 뛰어나고, 상당한 기술력을 겸비한 공격수이며 바르셀로나에서 뛸 만큼 완숙한 단계에 이른 선수라고 평했다. 요한 크루이프 역시 자서전 '마이 턴(My Turn)'을 통해 아버지로서 아들이 대중으로부터 비난 받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실력이 2군 선수들과 비교해 월등하지 않았다면 1군에 콜업하지 않았을 것이고, 코칭 스태프들에게 요르디는 1군에서 뛸 만한 수준의 선수인가를 재차 확인한 끝에 데뷔시켰다고 한다. 결과론적으로 무릎 반월상연골판 수술을 잘못 받는 불운을 겪어 성공적인 선수 커리어를 보냈다고 볼 순 없지만, 부상에서 자유로웠던 데뷔 시즌 쿠만, 스토이치코프와 팀내 최다 득점자에 오른 것을 보면 확실히 포텐과 실력은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1] Jordi는 George의 카탈루냐식 이름이며, 요르디가 아닌 조르디라고 한다. 사실 요한 크루이프가 붙여준 이름이다. [2] 세컨드 스트라이커로도 뛰었지만,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었다. [3] 말년에 메탈루르흐 도네츠크에서 센터백으로 뛰었다. [4] 무릎 반월상연골판 수술을 잘못 받아 선수 커리어 내내 훈련 조차 100% 소화하지 못하는 몸 상태가 되었다. 더이상 정상적인 선수 생활이 어려워진 것. [5] 2001년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리버풀 FC와의 결승전에서 89분 극적인 동점골로 연장 승부를 이끌었다. 그러나 연장 후반 리버풀의 맥칼리스터가 찬 프리킥이 델피 헬리의 몸에 맞아 굴절이 되면서 골든 자책골이 나왔고 5-4로 패배했다. [6] 당시 네덜란드 미드필드에는 클라렌스 세도르프, 필립 코쿠, 에드가 다비즈, 마르크 오버르마르스, 로날트 더부르 등등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요르디가 뚫기 힘들었다. [7] 여담으로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차두리를 지도했다고 한다. 요한 크루이프의 후광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조르디 크루이프와 역시 차범근의 후광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차두리는 그 배경이 판박이였기 때문이다. [8] 알레마니 후임으로 바르셀로나 선수였다가 지금은 하피냐 에이전트이기도 한 데쿠가 거론되었는데, 데쿠를 스카우트 이사직으로 하고 크루이프를 단장으로 승진할 수도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9] 참고로 2002 한일 월드컵 이전까지만 해도 요한 크루이프와 히딩크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없었다. 또 히딩크 성격상 시원하게 때려치면 때려쳤지 어떠한 압력이나 청탁을 받는다고 받아들일 인물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