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시대의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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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공방전 영어: Siege of Oxfor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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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142년 9월 26일 ~ 12월 초 | |
장소 | 잉글랜드 왕국 옥스퍼드 | |
원인 | 마틸다를 사로잡아 내전을 끝내려는 스티븐 왕의 공세 | |
교전국 | 스티븐 왕 지지 세력 | 마틸다 지지 세력 |
지휘관 | 스티븐 왕 | 마틸다 |
결과 | 스티븐 왕의 옥스퍼드 공략, 마틸다 탈출 | |
영향 | 무정부시대 장기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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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정부시대 시기인 1142년 9월 26일 ~ 12월 초, 스티븐 왕이 이끄는 군대가 마틸다가 머무는 옥스퍼드를 포위하면서 벌어진 공방전.
2. 배경
1140년경 스티븐 왕(빨간색)과 마틸다(파란색)을 추종하는 지역을 표시한 잉글랜드 남부와 웨일스 지도.
1135년 12월 헨리 1세가 사망한 뒤 잉글랜드 왕위를 가로챈 스티븐 왕에 반발한 마틸다가 앙주 백작이자 남편인 조프루아 5세와 이복 형제인 글로스터의 로버트 등의 지원을 받아 1138년에 거병하면서 발발한 무정부시대에 휘말린 잉글랜드 왕국은 두 개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런던을 중심으로 삼은 잉글랜드 동부 지역은 스티븐 왕을 지지했고, 잉글랜드 서부와 웨일스는 마틸다를 지지했다. 스티븐 왕이 1141년 2월 2일 링컨 전투에서 글로스터의 로버트에게 패배 후 생포되고 마틸다가 런던 인근에 도착해서 대관식을 준비하면서 내전이 마무리되는 듯 했지만, 마틸다의 오만한 행보에 분노한 런던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마틸다를 쫓아냈고, 스티븐 왕의 왕비인 불로뉴의 마틸다가 반격을 개시해 윈체스터 전투에서 글로스터의 로버트를 생포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1141년 11월, 마틸다 여왕은 스티븐 왕과 글로스터의 로버트를 교환하자는 불로뉴의 마틸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후 그녀는 옥스퍼드에 자리를 잡고 독자적으로 화폐를 주조했다. 옥스퍼드는 왕궁이 별도로 있고, 강과 도랑으로 둘러싸여 있어 안전했으며, 런던에서 남서쪽으로, 사우샘프턴에서 북쪽으로 가는 주요 경로의 교차점에 있어 큰 전략적 가치를 지녔다. 옥스퍼드를 통제한 이는 런던과 북부로의 접근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마틸다가 옥스퍼드로 데려간 군대의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소규모 왕실 의회를 주기적으로 열었고, 자기에게 충성을 바치는 주민들의 청원을 접수했다. 일각에서는 그녀가 런던과 가까운 이곳에서 병력을 끌어모은 뒤 런던을 도모하려는 계획이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1142년 6월 24일, 마틸다는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좀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글로스터의 로버트를 남편에게 보내 대규모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게 했다. 당시 스티븐은 죽어가고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중병에 시달렸기 때문에, 마틸다는 로버트가 앙주로 잠시 떠나도 안전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스티븐은 이 무렵에 건강을 회복했고, 곧바로 군대를 소집해 마틸다 세력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먼저, 항구 도시인 웨어햄을 공략해, 마틸다가 앙주 백국과 연락할 수 있는 길을 끊었다. 뒤이어 시렌세스터, 램턴, 그리고 뱀튼 성을 확보했다. 이 성들을 공략하면서, 옥스퍼드와 잉글랜드 남서부 사이의 연락망이 끊어졌고, 옥스퍼드로 진군할 길이 열렸다. 이렇게 모든 준비를 갖춘 뒤, 스티븐은 옥스퍼드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3. 전투 경과
1142년 9월 26일, 스티븐 왕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옥스퍼드 인근 강둑에 도착했다. 이들이 옥스퍼드로 진군하려면, 여러 수로를 도하해야 했다. 수비대는 이들을 향해 화살을 퍼부었지만, 스티븐의 군대는 악착같이 밀어붙인 끝에 성 가까이 이동했다. 한 부대가 뒷문으로 옥스퍼드에 진입하자, 수적으로 너무도 열세했던 옥스퍼드 수비대는 도시를 버리고 성채로 도주했다. 도시는 철저히 약탈당하고 불태워졌고, 수많은 시민이 살해당했거나 몸값을 위해 잡혔다. 마틸다는 얼마 안 남은 병력만 거느린 채 옥스퍼드 성에서 외롭게 농성해야 했다.옥스퍼드 성에는 식량이 충분했고 방어 시설도 튼튼했기에 장기 포위가 불가피했다. 스티븐은 주변 지역을 직접 약탈해 포위된 자들이 식량을 찾는 걸 막았고, 종탑, 공성추, 투석기를 포함한 다양한 공성 무기들을 제작해, 성벽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보몬트 궁전을 본부로 삼고 성채를 쭉 살펴본 그는 북쪽 성벽과 보몬트 궁전 사이에 위치한 언덕 2개에 투석기를 가져온 뒤 북쪽 성벽에 큰 바위를 퍼붓도록 했다. 그는 이를 통해 성에 피해를 입히는 것 외에도 주민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려 했다. 이 무렵 옥스퍼드에서 약 13마일(21km) 떨어진 월링포드 성에 마틸다의 추종자들이 사병들을 데리고 집결했지만, 압도적인 군세로 몰아붙이는 적군을 어찌할 엄두를 못 내고 가만히 있기만 했다. 그래도 옥스퍼드 수비대는 악착같이 저항했지만, 12월이 다가왔을 때 식량이 부족해져 기아의 위협을 받았다.
1142년 12월,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300~400명 가량의 병사와 52척의 함선에 탑승한 기사를 데리고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여기엔 조프루아 5세와 마틸다의 아들인 헨리 플랜태저넷도 동행했다. 그러나 조프루아 5세 본인은 현재 지배하고 있는 노르망디 공국에서 잉글랜드로 가기를 거부했다.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옥스퍼드에서의 소식을 전해듣자 웨어햄을 포위 공격했느데, 아마도 스티븐 왕이 포위를 풀고 웨어햄을 구출하려고 달려오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스티븐 왕은 이를 무시하고 옥스퍼드 공방전을 이어갔다.
그러던 12월 초 어느 날 밤, 마틸다는 기사 4명과 함께 변장한 채 성 조지 타워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갔다. 당시 공방전이 오래 지속되면서 스티븐 군대 내부의 많은 병사가 탈영하고 다른 이들은 경계를 게을리 했다. 그녀는 방심한 적군 진영을 몰래 지나간 뒤 추종자들이 모여 있던 월링포드에 도착했다. 그녀의 탈출은 하느님이 그녀에게 행운을 안겼다는 풍문이 퍼질 정도로 기적적인 일로 여겨졌다. 옥스퍼드 성채는 마틸다가 탈출한 다음 날 항복했고, 스티븐은 그곳에 새 수비대를 배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