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시대의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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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전투 영어: Battle of Lincol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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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
시기 | 1141년 2월 2일 | |
장소 | 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링컨 | |
원인 | 링컨 시를 둘러싼 스티븐 왕과 마틸다 세력의 대결 | |
교전국 | 스티븐 왕 지지 세력 | 마틸다 지지 세력 |
지휘관 | 스티븐 왕 | 글로스터의 로버트 |
병력 | 1,250명 | 1,000명 |
피해 | 불명 | 불명 |
결과 | 마틸다 세력의 승리. | |
영향 | 스티븐 왕의 생포 및 일시적인 폐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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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정부시대 시기인 1141년 2월 2일, 스티븐 왕과 마틸다의 군 사령관 글로스터의 로버트가 링컨 시를 놓고 맞붙은 전투. 스티븐 왕이 생포되면서 일시적으로 폐위되었다.
2. 배경
1138년 글로스터의 로버트를 위시한 마틸다 지지 세력이 스티븐 왕을 상대로 반기를 든 이래, 잉글랜드 왕국은 양분되었다. 스티븐 왕은 런던을 중심으로 동부 지역을 확고히 장악했고, 마틸다의 지지자들은 서부 지역을 장악했다. 양자는 소규모 접전을 잇달아 벌였지만, 어느 쪽도 확실한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그러던 1139년 4월 9일, 스티븐 왕이 스코틀랜드 국왕으로서 마틸다를 위해 자기를 몰아내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노섬벌랜드를 침공했던 다비드 1세와 더럼 평화 협약을 맺었다. 스티븐은 다비드 1세의 아들 헨리가 헌팅던 백작의 명예를 계속 누리는 걸 허용할 뿐만 아니라 노섬벌랜드 전체를 다비드 1세에게 양도하기로 했고, 다비드 1세는 스티븐을 잉글랜드 왕으로 인정하고 마틸다를 더 이상 돕지 않기로 했다.이때 헨리 왕자는 칼라일 성을 손에 넣었는데, 체스터 백작이자 북부 잉글랜드 최대의 거물인 라눌프 드 게르논은 자기 아버지인 라눌프 르 메신이 소유했던 성이 헨리에게 넘어갔다며 격분했다. 1140년 9월 말, 라눌프는 스티븐의 궁정에 머물던 헨리 왕자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조직했다. 그는 이복형인 윌리엄 드 루마와 함께 헨리가 스코틀랜드로 돌아가는 길목인 링컨 성을 접수했다. 하지만 이 음모는 스코틀랜드로 향하는 헨리를 배웅하기 위해 함께 하던 스티븐 왕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스티븐 왕은 라눌프와 타협하기로 하고, 링컨과 더비 영지와 링컨셔 보안관 작위를 라눌프에게 양도하는 대신 헨리가 스코틀랜드로 무사히 돌아가는 걸 보장받았다.
그러나 링컨 주민들은 라눌프의 강압적인 통치에 반감을 품고, 스티븐 왕에게 사절을 보냈다. 그들은 라눌프가 방심하고 있다면서, 지금 링컨으로 와주면 성문을 열고 귀순하겠으며, 라눌프를 스티븐에게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스티븐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1141년 1월 6일, 스티븐 왕이 이끄는 왕실군이 링컨에 도착한 뒤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무혈 입성한 뒤 라눌프의 수비대가 숨은 성을 포위했다. 라눌프는 아내 글로스터의 마틸다를 성에 남겨둔 채 가까스로 탈출했다. 그 후 라눌프는 마틸다 진영으로 귀순하기로 하고, 체셔 지역과 웨일즈에서 새로운 군대를 모집하면서 글로스터의 로버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잉글랜드 북부 최대의 거물을 끌어들임으로써 내전을 유리하게 이끌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마음먹고 링컨으로 진격했다. 이리하여 링컨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
1141년 2월 1일,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라눌프 드 게르손이 링컨 시 인근 외곽에 도착하여 숙영지를 세웠다. 당시 성을 포위 중이던 스티븐 왕은 적군이 근접했다는 소식을 듣고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여러 측근이 적군이 멀리서 달려오느라 지쳤고, 도시 주변 늪지대에 포진해 기동이 어려우니, 지금 당장 공격하면 승산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스티븐은 기사도에 따라 공정한 전투를 하겠다며 거부하고 다음날 오전에 평원으로 나아가 적과 전면전을 벌이기로 했다.2월 2일, 스티븐 왕의 군대가 평원에 포진했다. 스티븐 본인은 중앙에 배치된 보병대를 이끌었고, 좌익과 우익에는 기병대가 배치되었으며, 오른쪽 측면에는 리치먼드 백작이자 콘월 백작 알란 르 루, 노퍽 백작 휴고 비고트, 우스터 백작 왈레랑 드 보몬트, 노샘프턴 백작 시몬 2세 드 상리스, 서리 백작 윌리엄 드 워렌의 부대가 포진했고, 좌측 측면에는 기드 이프르가 이끄는 플란데런 백국 용병대와 기사들, 오말 백작 윌리엄 르 그로스의 분견대가 배치되었다.
이에 마틸다 진영에서도 맞은편 평원에 포진했다. 중앙에는 라눌프 르 게르논의 분견대가 포진했고, 좌측에는 스티븐 왕에 의해 영지를 몰수당한 잉글랜드 기사들로 구성되었고, 우익에는 포이스 왕국의 마도그 압 마레두드와 귀네드 왕국의 왕자 카드왈라드르 압 그루피드가 지휘하는 웨일스 분견대가 포진했다. 후방 예비대는 총사령관 글로스터의 로버트가 지휘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스티븐 왕의 병력은 1,250명이고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1,000명을 지휘했으며, 스티븐 왕은 좀더 많은 보병을 지휘했지만 기병의 전투력은 상대방보다 열세했다고 한다.
스티븐 왕은 전투 전에 장병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연설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약해서 장병들에게 잘 들리게 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알았기에, 대신 목소리가 무척 큰 부하 클레어의 볼드윈에게 맡겼다.[2] 볼드윈은 이 연설에서 스티븐의 대의의 선함과 그의 적들의 사악한 면모를 설명했고,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를 토끼의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던 중 글로스터의 로버트가 공격 명령을 내렸다. 스티븐은 적이 몰려오자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선발대를 파견해 적군이 마을 주위를 가로지르는 위담 강을 도하하는 걸 저지하도록 했지만, 웨일스 경보병대가 우수한 궁술을 발휘해 많은 적병이 사살되자 전의를 잃고 도주했다.
그 후 로버트의 군대는 강을 도하하자마자 적을 몰아붙였다. 기욤 드 이프르와 윌리엄 르 그로스가 이끄는 좌익 부대는 무장 수준이 떨어지는 라눌프의 웨일스 부대를 밀어냈지만, 로버트가 급파한 강력한 기사들은 스티븐 왕의 우측면을 돌파했고, 그곳에 있던 알란 르 루, 휴고 비고트, 왈레랑 드 보몬트, 시몬 2세 드 상리스, 윌리엄 드 워렌이 모두 생포되거나 전장을 이탈했다. 그 후 기사들은 후방을 돌아가서 기욤 드 이프르와 윌리엄 르 그로스의 적 좌익 부대를 공격했고, 결국 그들 역시 패주했다. 이제 스티븐 왕이 직접 이끄는 기사들로 구성된 중앙 부대만이 계속 저항했다. 로버트는 이들을 에워싸도록 했고, 왕실군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스티븐은 어느덧 자기가 홀로 남아서 적에게 둘러싸인 걸 알게 되자 "사자처럼" 싸웠다. 일부 기록에는 자기 검이 부러지자 양손 덴마크 도끼를 들고 계속 싸웠다고하고, 다른 기록에는 처음에는 도끼를 휘두르다가 도끼 자루가 부러지자 검을 빼들어 계속 분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침내 돌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뒤 생포되었다. 이리하여 요크 전투는 글로스터의 로버트가 이끄는 마틸다 세력의 승리로 종식되었다.
4. 이후
로버트는 스티븐을 생포한 뒤 링컨에 입성한 후 스티븐에게 도시를 넘겨준 링컨 시민들을 대거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이후 스티븐은 글로스터로 이송되었다가 브리스톨로 옮겨졌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사슬에 묶여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스티븐이 폐위된 채 감옥에 수감된 뒤, 마틸다는 여왕으로 떠받들어진 채 1141년 6월 중순에 런던 인근 윈저 성에 자리잡았다. 그러나 마틸다의 통치는 짧았다. 그녀는 자기가 일찍이 유럽 대륙 최강의 국가인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였던 경험 때문에 무척 권위적인 태도로 일관했고, 런던 시민들이 누리던 특권을 무시하고 세금 납부를 강요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에 분노한 런던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켰고, 마틸다는 런던에서 축출되었다.한편, 스티븐 왕의 지지자들은 스티븐의 왕비인 불로뉴의 마틸다와 기욤 드 이프르가 이끄는 새로운 군대를 결성했다. 1141년 9월 14일, 불로뉴의 마틸다가 이끄는 군대는 윈체스터 전투에서 적군을 격파하고 글로스터의 로버트를 생포했다. 그 후 1141년 11월 1일, 스티븐은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교환되어 런던으로 돌아왔다. 이후 무정부시대는 1153년까지 이어지며 잉글랜드 왕국을 황폐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