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10 13:19:02

오쿠무라 다케오


오쿠무라 다케오(奥村 武雄: 1920년 2월~1943년 9월 22일)

1. 개요2. 생애
2.1. 수병 출신 비행병2.2. 중일전쟁에서 데뷔2.3. 태평양 전쟁 개전2.4. 라바울 항공대
3. 격추수 논란

1. 개요

일본의 전투기 조종사

2. 생애

2.1. 수병 출신 비행병

다이쇼 시대에 후쿠이현에서 태어난 오쿠무라 다케오는 격추수 54기로 일본 해군 전투기 조종사 중에서 탑 클래스의 무공을 세운 에이스 파일럿이었다. 살아있을 때 계급은 상등 비행병조였으나 전사한 후에 1계급 특진되어 비행병조장이 되었다.

2.2. 중일전쟁에서 데뷔

1935년(쇼와 10년)에 일본 해군의 신병 훈련소 중 하나인 쿠레 해병단(呉海兵団)을 통해 입대했다. 원래는 수병으로 근무했으나 조종원을 지망하여 1938년(쇼와 13년) 2월에 규율이 엄격한 일본군에서 가장 혹독하기로 악명높은 조종 연습생 과정을 통과해 9월에 42기로 수료했다. 첫 자대로 제14항공대(第十四航空隊)에 배속된 그는 1940년(쇼와 15년) 10월 7일에 중국 쿤밍을 공습하는 96식 육상공격기의 직엄대로 처음 실전 출격을 경험했다. 고후쿠다 테루후미(小福田晧文 : 1909~1995) 대위가 지휘한 이 전투에 오쿠무라 다케오가 함께 비행한 7대의 제로센은 이들을 요격하기 위해 접근해온 중국 공군의 I-15 전투기를 13대나 격추시켰는데, 오쿠무라는 이 데뷔전에서 무려 4대의 적기를 잡아내는 놀라운 전공을 세웠다. 약관 스무살의 신참 조종사는 첫 교전에서 에이스 문턱에 성큼 다가서게 되었다.

2.3. 태평양 전쟁 개전

태평양 전쟁이 터진 후인 1942년(쇼와 17년) 8월 24일에 항공모함 류조(龍驤)의 함상전투기 대원으로 참전한 그는 2차 솔로몬 해전에서 과달카날 근해의 미 해군 함선들을 공격하는 97식 함상공격기를 엄호하기 위해 장거리 출격을 감행한다. 이 날, 모함인 류죠는 미 해군의 함상폭격기 18대와 함상공격기 9대의 합동 공격을 받고 대파되었다가 결국 침몰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오쿠무라 병조는 몇 대의 미군기와 동시에 교전을 펼치고 격추도 하는 등 나름의 활약을 했지만, 모함을 잃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8월에 라바울에 기지를 전진 배치시킨 타이난 해군항공대(11월부터는 251해군항공대로 개칭)에 전속되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출격하며 미군들과 싸우던 그는 12월 10일에 잠시 본토에 돌아갔는데, 이때까지 그의 격추수는 14대를 헤아리고 있었다.

2.4. 라바울 항공대

1943년(쇼와 18년) 7월, 제201해군항공대로 소속을 옮긴 오쿠무라 다케오는 다시 라바울 기지로 돌아갔다. 그는 해군의 비상 활주로를 겸하고 있던 부인 기지로 가서 작전에 참가했다. 9월 14일에 연합군의 대규모 공습 부대가 부인 기지로 접근해오자, 오쿠무라는 기지 방어를 위해 긴급 출격했다. 그는 이날의 교전에서 무려 10대의 격추를 보고했는데, 그 내역은 B-24 중폭격기 1대, F4U 1대와 5대의 F6F, 그리고 미 육군 소속의 P-40 전투기 2대와 마지막으로 SBD 1대였다. 이 격렬한 전투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우고 살아 돌아온 오쿠무라에게는 11항함 사령관인 구사카 진이치(草鹿任一) 제독이 직접 무공훈장을 수여해주었다.

오쿠무라는 9월 22일에도 뉴기니 폰반도 레틴 곶 앞바다를 통과하는 연합군의 수송함대를 공격하러가는 아군 폭격기들을 엄호하기 위해 출격하지만, 돌아오지 못했다. 가와이 시로(河合四郎) 대위가 지휘한 이 전투에서 귀환한 동료 전우들의 증언에 따르면, 오쿠무라 다케오는 50대가 넘는 P-38과 P-40의 합동 공격에 맞서는 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한다. 항공대장은 전사한 오쿠무라가 세운 공적을 기리기 위해 2계급 특진과 금치 훈장 추서를 상신했지만, 이 서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 격추수 논란

1943년 이후 일본 해군은 더 이상 조종사 개인의 격추 기록을 집계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오쿠무라 다케오 역시 정확한 격추수는 불명확하다. 그렇지만 일본 해군항공대를 오랫동안 연구해오면서 여러 권의 저서를 펴낸 항공역사가 헨리 사카이다의 주장에 따르면, 오쿠무라 다케오는 중일 전쟁에서 4대, 솔로몬 항공전에서 대략 50대의 적기를 격추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격추 전과는 미군과의 대조에 의해 상상 부분이 과장되거나 피해를 입은 기체까지 추락한 것으로 오인한 것이며, 실제로는 30기 전후가 적절한 전과라는 주장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어쨌든, 일본측 자료에 의하면 오쿠무라 다케오는 스기타 쇼이치 다음가는 에이스로 정리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전투기 에이스 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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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56b94> ▲ 180~228위
순위 이름 국적 격추 수 비고
229위 베른트 갈로비치 독일 64대
위르겐 하르더 독일
롤프 헤르미헨 독일
발터 린트너 독일
빅토르 페터만 독일
에르하르트 페터스 독일
귄터 라두슈 독일
하인츠 뢰커 독일
루돌프 쇠네르트 독일
238위 프란츠 괴츠 독일 63대
하인리히 호프만 독일
게르하르트 호무트 독일
빌헬름 쉴링 독일
헤르만 슈타이거 독일
쿠르트 벨터 독일 야간 56대 격추
제트 전투기 에이스 1위
244위 칼-하인츠 코르데스 독일 62대
빌헬름 휘프너 독일
헬무트 노이만 독일
247위 게르하르트 보이틴 독일 60대
한스-에케하르트 봅 독일
호르스트 카르가니코 독일
프란츠 체히 독일
알프레트 프랑케 독일
프란츠 흐르들리카 독일
쿠르트 켈터 독일
아우구스트 모르스 독일
카를 문츠 독일
알프레트 라우흐 독일
257위 알렉산드르 포크리시킨 소련 59대
한스-아놀트 슈탈슈미트 독일
발터 보르허스 독일
프란츠 에케를레 독일
카를 슈테펜 독일
파울 초르너 독일
263위 헤르만 부흐너 독일 58대
마르틴 베커 독일
헤르베르트 브뢴레 독일
프란츠 에케를레 독일
지크프리트 엥퍼 독일
헤르베르트 프리벨 독일
빌헬름 프로이뵈르트 독일
게르하르트 라트 독일
하네스 트라우트롭트 독일
시노하라 히로미치 일본
그리고리 레치칼로프 소련
274위 니콜라이 굴라예프 소련 57대
하인리히-빌헬름 아네르트 독일
콘라트 바우어 독일
발터 브란트 독일
후고 다머 독일
쿠르트 에베너 독일
아돌프 칼쿰 독일
헤르베르트 푸슈만 독일
요하네스 자이페르트 독일
헤르만 볼프 독일
284위 콘스탄틴 칸타쿠치노 루마니아 56대 루마니아 1위
만프레트 에버바인 독일
구스타프 프랑크치 독일
호르스트 하제 독일
하인츠 하클러 독일
에리히 호하겐 독일
헬무트 홀츠 독일
에두아르트 이스켄 독일
쿠르트 크나페 독일
헬무트 쇤펠더 독일
귄터 지거 독일
하인츠 슈트뤼닝 독일
에트문트 바그너 독일
헬무트 뷔크 독일
에이노 루카넨 핀란드
299위 카를-하인츠 벤데르트 독일 55대
빌헬름-페르디난트 갈란트 독일
헤르베르트 바로이터 독일
한스-디터 프랑크 독일
가브리엘 타우처 독일
304위 오쿠무라 다케오 일본 54대
요한 바둠 독일
한스 엘러스 독일
아우구스트 가이거 독일
빌헬름 하우스비르트 독일
하인츠 레버 독일
지크프리트 짐슈 독일
하인츠 빈케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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