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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카이사르군과 폼페이우스의 옵티마테스군이 일리리아의 주요 항구도시 오리쿰을 상대로 벌인 공방전.2. 상세
기원전 48년 초,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드리아 해 해상을 봉쇄하다가 겨울 숙영에 들어간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의 함대를 피해 브룬디시움에서 출항하여 팔레스테에 기습 상륙했다. 그는 배를 이탈리아로 돌려보내 나머지 군대를 데려오게 하고, 숙영지에 1개 군단을 남겨둔 뒤 나머지 6개 군단을 이끌고 하루 거리에 있는 오리쿰 시로 진군했다. 그들은 여러 산길에 병력을 나눠서 진군해 다음날 새벽에 집결했다.도시 수비대 지휘관 루키우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는 파르티아가 보내준 경기병대와 함께 도시를 지키고자 했지만, 주민들과 수비대는 현직 집정관인 카이사르에 대항하길 싫어하여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카이사르는 도시에 입성한 뒤 토르콰투스를 사면했고, 토르콰투스는 디라키움으로 달아나 폼페이우스와 합류했다. 한편 오리쿰 항구에는 폼페이우스의 부하 루크레티우스와 미누키우스가 18척의 군함으로 곡물선을 지키고 있었다. 도시가 항복하면서 곡물을 바다로 가져갈 수 없게 되자, 그들은 곡물선을 모조리 가라앉힌 뒤 디라키움으로 도피했다.
카이사르는 마르쿠스 아킬리우스 카니누스를 오리쿰 수비대 지휘관으로 임명한 뒤 아폴로니아로 진격하여, 그곳 지휘관 루키우스 스타베리우스의 항복을 받아낸 뒤 다시 디라키움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얼마 후 옵티마테스파 함대가 오리쿰 항구를 봉쇄하면서 전황이 역전되었다. 아킬리우스는 항구 입구에 돌을 실은 배를 침몰시키고 그 위에 다른 배를 정박시켜서 적이 항구로 들어오는 걸 막았다. 그러나 해상 봉쇄로 인해 식량이 부족해져 기아의 기미가 감돌았다.
이후 디라키움 공방전을 수행하던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이탈리아로부터 완전히 단절시키기 위해 장남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에게 오리쿰을 공략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함대를 이끌고 항구로 진격해 닻을 내린 배들을 나포했고, 잠수부들을 보내 침몰한 배의 돌을 제거하여 항구에서 끌어내리게 했다. 또한 항구에 남아있던 배들을 공격하여 4척의 작은 갤리선을 노획하고 나머지는 불태웠다. 뒤이어 배에 탑재된 탑들을 통해 성벽을 향해 화살을 퍼부었고, 부대를 끊임없이 교체해 도시를 맹공격했다. 결국 오리쿰 수비대는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다.
그리하여 오리쿰을 장악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뒤이어 리시로 진격하여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그곳에 남겨둔 수송선 30척을 불태웠다. 그러나 사흘간의 포위 공격에도 수비대의 거센 저항으로 도시를 공략하는 데 실패하여 상당한 손실을 입고 퇴각했다. 그는 이후에도 해상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카이사르 측의 해상 보급을 차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