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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 라비에누스를 향해 투창을 던지는 10군단 장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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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6년 1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지휘하는 로마군과 티투스 라비에누스,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가 이끄는 옵티마테스군이 아프리카 속주 루스피나(현재 튀니지 모나스티르 인근)에서 맞붙은 전투.
2. 배경
기원전 48년 8월 9일,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추격을 피해 이집트로 망명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조언자들의 명령으로 암살당했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여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확인한 뒤,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생전에 남긴 유언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 7세가 공동 파라오로서 이집트를 다스리게 하려 했다.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조언자들은 권력 분쟁에서 패하여 사막으로 쫓겨난 클레오파트라의 복귀를 달갑지 않게 여겼고, 카이사르가 그녀를 일방적으로 지원하고 지나치게 간섭한다고 여겼다. 결국 기원전 48년 11월 갈등이 폭발하면서 알렉산드리아 전쟁이 발발했고,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 시에서 압도적인 숫자의 이집트군에게 포위되어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에 놓였다. 설상가상으로, 폰토스 왕국의 군주 파르나케스 2세가 로마 공화국이 내란에 휩쓸려 정신없는 틈을 타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6세의 야망을 이루고자 갈라티아와 소 아르메니아를 침략했다. 카이사르에 의해 소아시아 총독으로 임명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가 이를 막으려 했으나,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패했고, 폰토스군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소아시아 각지를 횡행하며 로마인들을 학살하고 로마 소년들을 거세했다.
기원전 47년,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 전쟁에서 가까스로 극복하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죽음으로 몰아간 뒤, 클레오파트라 7세와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공동 파라오로 옹립했다. 이후 클레오파트라와 나일강 유람을 함께 하는 등 수개월간 푹 쉰 그는 폰토스 왕국을 응징하고자 북상했다. 이후 벌어진 젤라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파르나케스 2세를 가볍게 물리쳤다. 파르나케스 2세는 병력을 규합하여 다시 싸우려 했지만 사위 아산더의 습격으로 살해되었다. 카이사르는 폰토스 왕국을 멸망시키고 아시아 속주의 일부로 삼은 뒤, 비로소 로마로 귀환했다.
이렇듯 카이사르가 이집트와 소아시아에 묶여있는 동안, 발칸 반도에서 탈출한 옵티마테스파 인사들은 아프리카에 도착한 뒤 세력을 규합했다. 폼페이우스의 장인이자 아프리카에서 대단한 명성을 구가하는 스키피오 가문의 일원인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총사령관을 맡았고, 카이사르의 유능한 부관이었으나 내전 발발 후 줄곧 폼페이우스를 따르며 카이사르에 대적했던 티투스 라비에누스가 부관을 맡았다. 또한 소 카토 등은 우티카에서 행정을 답당했다. 여기에 기원전 49년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를 패사시킨 누미디아 왕 유바 1세는 옵티마테스파의 든든한 지원자였다. 기원전 46년 무렵, 옵티마테스 파는 10개 군단, 다수의 경무장 보병대와 기병대, 120마리의 코끼리와 대함대를 거느렸다.
카이사르는 로마에 돌아와서 자신이 없는 동안 국정을 엉망으로 이끌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대신하여 나라를 질서를 바로잡았으며, 반란을 일으킨 군단들을 설득해 원정에 동참하게 했다. 이후 아프리카에 할거하는 적들을 처리하기 위해 시칠리아 릴리바이움에 6개 군단과 2,000 기병대를 모았다. 이들이 탈 수송선이 아직 충분히 모이지 않았지만, 그는 기원전 47년 12월 말 현재 가지고 있는 수송선에 병사들을 탑승시켜 아프리카로 건너갔다. 1월엔 지중해에서 심한 폭풍이 종종 발생하기 때문에 함대를 출격하기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카이사르는 적 대함대의 감시를 피해 바다를 건너려면 지금 기습적으로 상륙하는 게 낫겠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남겨진 부대에게 수송선이 도착하는 대로 알아서 바다를 건너라고 지시하고, 자신은 곧장 아프리카로 항해했다.
그러나 바다를 건너던 중 심한 폭풍우가 일어나는 바람에 함대가 뿔뿔이 흩어졌고, 간신히 바다를 건너 하드루멘툼 인근에 상륙한 카이사르에게는 3,000명의 보병과 150명의 기병 뿐이었다. 그는 하드루멘툼 시에 귀순을 권했지만 묵살당하자, 며칠간 포위하다가 루스피나 인근으로 철수해 흩어진 병력을 수습했다. 도중에 하드루멘툼 수비대가 추격했지만 카이사르의 역습으로 격퇴되었다. 기원전 46년 1월 1일 렙티스를 점거한 뒤 여기저기에 흩어졌던 병력과 함대가 합류하면서 병력이 어느 정도 확보되었다. 그는 6개 코호트를 숙영지에 남기고, 30개의 코호트(대략 9,000명)와 400명의 기병, 150명의 투석병를 이끌고 각지를 돌며 식량을 확보하고자 했다.
한편, 하드루멘툼 수비대로부터 카이사르가 출현했다는 소식을 접한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즉시 대군을 소집한 뒤 카이사르를 쳐부수러 출진했다. 그는 티투스 라비에누스와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에게 누미디아 기병과 경보병 수만 명을 맡겨 앞서 가서 카이사르를 견제하게 했다. 그들은 곧 루스피나 인근에서 식량을 수집하고 있던 적군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이리하여 루스피나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카이사르군
- 지휘관: 율리우스 카이사르
- 병력: 30개 코호트(9,000명), 400 기병, 150 투석병
3.2. 옵티마테스군
- 지휘관: 티투스 라비에누스,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
- 병력: 8,000명의 누미디아 기병, 1,600명의 갈리아와 게르만 기병, 다수의 경보병
4. 경과
카이사르는 보급품을 확보하기 위해 30개 코호트의 선두에서 원정을 떠나던 중, 그의 진영에서 4.5km 떨어진 곳에서 적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정찰병들은 좁은 대열을 펼치고 전진하는 적군을 보고 대규모 보병이 자신들을 향해 접근하고 있다고 여겼다. 이 보고를 접한 카이사르는 측면 공격을 받을 것을 우려해 군대를 한줄로 길게 배치하고, 소수의 기병을 양익에 나눠 배치했으며, 궁수대를 전면에 내세웠다.그러나 이것은 함정이었다. 라비에누스는 기병들 사이에 대규모 누미디아 경보병대를 둔 채 좁은 대열로 행군하게 해서, 적 정찰대가 "저들은 보병대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착각하게 유도했다. 실제로는 8,000 명의 누미디아 기병이 라비에누스의 핵심 부대였다. 적을 눈앞에 마주하고서야 이 사실을 깨달은 카이사르는 군단병들에게 사각형 모양의 방어 진형을 세우게 하고, 빈약한 숫자의 기병과 궁수들을 진형 안에 들어가게 했다.
라비에누스는 경보병대를 먼저 파견해 적 군단병들을 향해 화살비를 퍼붓게 했다. 뒤이어 누미디아 기병대가 출격하여 적 군단병들 주위를 맴돌면서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했다.큰 방패로 쏟아지는 화살을 막으면서 전진했지만, 적의 이같은 전술로 곤욕을 치렀다. 더욱이 건조하고 뜨거운 사막 한복판에서 조금도 쉬지 못하고 맹공을 받았으니, 심한 갈증에 시달려 체력이 급격히 깎였다. 카이사르는 군단병들이 열받은 나머지 전열을 이탈하여 적을 쫓아가는 걸 막기 위해 5보 이상 나아가는 걸 금지했다. 익명의 저자가 기술한 '아프리카 전쟁기'에 따르면, 라비에누스는 말을 몰아 그런 적 주위를 돌면서 야유를 퍼부었다.
"카이사르의 신병 여러분! 왜 그렇게 긴장해 있나? 보아하니 그의 잘난 궤변에 홀렸던 모양이지? 그가 자네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군. 진심으로 동정하네."
이에 한 병사가 앞으로 나오며 외쳤다.
"라비에누스! 난 신병이 아니라
10군단의 용사다!"
라비에누스가 "네가 누군지 모르겠는데?"라고 하자, 그는 곧 누군지 알게 될 거라고 한 뒤 필룸을 던져 그의 말을 죽여 낙마시킨 뒤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고 한다.
"라비에누스, 10군단이 너에게 주는 선물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카이사르군의 대형이 점차 흐트러지고 부하들이 소규모로 모여있다가 적의 화살 세례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한 기수가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려 하자, 카이사르는 그를 붙잡아 몸을 돌리며 "적은 저쪽에 있다!"라고 외쳤다. 이렇듯 병사들이 전의를 잃을 기미가 보이자, 카이사르는 대형을 바꾸기로 했다. 그는 몇 개 코호트에게 뒤로 물러서서 적의 기병대에 맞서 싸우게 하고, 나머지 코호트들은 경보병대에 대응하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형성된 두 대형의 군대는 가까이 접근해 온 적을 향해 필룸을 던지며 돌격했다. 라비에누스군은 갑작스런 반격에 당황하여 패퇴했고, 카이사르는 적이 물러선 틈을 타 진영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군이 숙영지로 철수하려던 그때,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와 그나이우스 칼프루니우스 피소가 1,600명의 갈리아 및 게르만 기병과 많은 보병대를 이끌고 전장에 도착하여 라비에누스군과 합세했다. 그들이 다시 공세를 가하자, 카이사르군은 테스투도 진형을 결성해 적의 모든 투척 무기를 막았다. 그러다가 적의 공세가 약해지자, 카이사르는 전군에 신호를 보내 쐐기 대형을 형성하여 적을 향해 돌격하게 했다. 적 기병대는 이 공격을 잽싸게 피했지만, 경보병대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미처 피하지 못하고 상당수가 살육당했다. 이때 페트레이우스 역시 부상당했다. 이후 해가 완전히 저물어서 앞을 분간하기 어려워진데다 완전히 지친 두 군대는 각자의 진영으로 후퇴했다.
5. 이후
다음 날 새벽 카이사르는 본영으로 철수했고, 페트레이우스는 "스키피오의 몫을 남겨두자"라며 추격하지 않았다. 식량을 수집하려던 그의 계획은 실패했지만, 전군이 몰살당할 뻔했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루스피나에 돌아와서 진영을 요새화하고 수병들을 육지에 올라와서 경무장 보병으로 배치했으며, 군대 내 장인들을 시켜 투창을 대대적으로 제작하게 했다. 또한 시칠리아에 가능한 한 많은 곡식과 보급품들을 가져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얼마 후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현장에 도착하여 라비에누스, 페트레이우스와 연합한 뒤 카이사르의 진영에서 3마일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 하지만 적진의 방어 상태가 완고하자 함부로 공격하지 않고 기병대를 여러 차례 파견해 찔러봤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사이에 추가 병력이 카이사르와 꾸준히 합류하자, 스키피오는 우티카로 철군한 뒤 누미디아군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적군이 우티카로 후퇴하는 것을 목격한 카이사르는 즉시 추격에 나섰다. 이후 양측은 몇 차례 소규모 전투를 치렀지만 전력이 완비될 때까지 회전을 벌일 생각이 없었기에 정면 대결을 회피했다.
그러다 누미디아 왕 유바 1세가 3개 군단과 누미디아 기병대, 30마리의 코키리를 이끌고 스키피오와 합세했고, 카이사르 역시 제9 군단과 제10 군단을 맞이했다. 하지만 여전히 전력에서 열세였던 카이사르는 우티카 공략을 포기하고 본영으로 돌아갔으며, 스키피오는 그를 추격했다. 이후 제타 마을 주변에서 양군은 대치했으나, 스키피오는 카이사르와 회전을 벌이는 걸 기피했다.
카이사르는 추가 병력을 규합하는 동시에 스키피오에게 회전을 제의했으나 그가 끝까지 거절하자 강제로 싸우게 만들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원로원파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도시인 탑수스를 포위했고, 스키피오는 탑수스를 상실하면 북아프리카의 원로원파에 대한 지지도가 추락할 것임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카이사르와 회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양군은 탑수스 전투에서 아프리카의 패권을 놓고 격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