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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9년 3월 9일에서 18일, 이탈리아 반도 끝자락의 항구도시 브룬디시움(오늘날 브린디시)에서 발칸반도로 후퇴하려는 폼페이우스와 이를 저지하여 내전을 조기에 종결하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로마군이 맞붙은 전투.2. 배경
기원전 49년 1월,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부재 중 집정관 선거 입후보를 절대로 허락하지 않고 자신에게만 군대 해산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원로원과 대립하다가, 이대로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에 들어갔다간 정적들의 맹공으로 정치생명이 끝장나고 명예가 실추된다고 판단해 내전을 감행했다. 이탈리아 주민들은 갈리아 전쟁의 영웅인 그를 열렬히 환영했고, 병사들은 앞다퉈 그에게 가담했다. 원로원으로부터 카이사르를 대신해 갈리아 전체의 총독으로 임명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코르피니움 시에서 33개 코호트를 주둔시켜 카이사르와 대적했다.( 코르피니움 공방전) 그는 폼페이우스가 곧 도와줄 거라고 믿고 버티려 했으나, 폼페이우스는 구원 요청에 응하지 않고 "내 지시에 따르지 않고 멋대로 행동하지 마라"며 당장 귀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메시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포위되었고, 그는 군대를 버리고 달아나려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군대의 반란으로 사로잡혀 카이사르에게 넘겨졌다.카이사르는 아헤노바르부스를 비롯하여 자신에게 귀순한 옵티마테스파 인사들을 군인들의 모욕으로부터 보호해준 뒤 자신과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한 뒤 각자 원하는 데로 가라며 풀어줬다. 물론 병사들 역시 어떠한 해코지도 하지 않고 자신의 군단에 배속시켰다. 그는 코르피니움 원로원으로부터 60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전달받았으나, 이를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 그렇게 해서 전투는 마무리되었고, 카이사르는 7일간 코르피니움에 머물렀다가 폼페이우스가 있는 아풀리아로 진군했다. 카이사르의 승리를 알게 된 폼페이우스는 그때까지 모은 병력을 이끌고 루케니아에서 카누시움으로 갔다가, 다시 이탈리아 끝자락인 브룬디시움으로 이동했다. 카이사르는 그가 이탈리아를 빠져나오지 못하게 해서 내전을 조기에 끝내고자 브룬디시움으로 향했다. 이리하여 브룬디시움 공방전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카이사르군
- 지휘관: 율리우스 카이사르
- 부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
- 병력: 제 8군단, 제 12군단, 제 13군단
3.2. 옵티마테스군
- 지휘관: 폼페이우스
- 부관: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루키우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 병력: 22개 코호트
4. 경과
폼페이우스는 브룬디시움에 도착한 뒤 양치기들을 불러모아 말을 줘서 약 300명의 기병을 결성했다. 그리고 함대를 최대한 끌어모아서 지금까지 확보한 병력을 실어서 발칸 반도로 이송하기 시작했다. 카이사르는 진군하던 중 폼페이우스의 공병대장인 그나이우스 마기우스를 잡은 뒤 공화국을 공동으로 구원하고 싶으니 평화 협상을 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그에게 들려서 브린디시움으로 보냈다. 기원전 49년 3월 9일 브룬디시움에 도착한 그는 현직 집정관 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가 대부분의 군대를 이끌고 디라키움으로 떠났고, 폼페이우스는 여전이 22개 코호트와 함께 브룬디시움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폼페이우스가 이탈리아를 떠나는 걸 막기 위해 항구의 출구를 차단하고 도시를 포위하기 시작했다.카이사르는 항구 연안 바다가 얕은 점을 이용해, 폭이 좁은 항구 입구에 양쪽 제방을 따라 둑을 새로 세웠고, 양쪽 제방을 따라 한쌍의 뗏목을 배치하고 네 모퉁이에 각각 닻으로 고정해 파도에 흔들리지 않게 했다. 이후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같은 크기의 똇목들을 추가하여, 마치 둑의 자연스러운 연장선처럼 덮어서 방어할 때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둑의 외부와 양쪽 측면은 격자와 플루테우스로 보호했으며, 적의 함선과 화재 공격으로부터 요새 작업을 좀더 잘 방어하기 위해 4개의 뗏목 마다 2층 탑을 세웠다. 카이사르가 자신을 가두려 들자, 폼페이우스는 대형 수송선을 항구에 배치한 뒤, 그 위에 전쟁 기계와 모든 종류의 무기를 탑재한 3층 탑을 세웠다. 병사들은 탑 위에 올라가 적군이 세우려는 둑을 향해 화살을 퍼부어 작업을 방해했다.
전투는 매일 벌어졌고, 양측은 화살, 투석 및 기타 원거리용 무기를 사용했다. 카이사르는 평화 협상을 어떻게든 하고 싶었지만, 폼페이우스가 마기우스로부터 받은 자신의 메시지에 어떠한 답도 하지 않자, 부관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에게 폼페이우스 진영에 찾아가 자신의 뜻을 전달하게 했다. 레빌루스는 가까운 친구이자 친척인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를 만나 카이사르의 메시지를 폼페이우스에게 분명히 전해달라고 요청했다. 리보는 이를 승낙하고 폼페이우스에게 카이사르가 그와 만나고 싶어하며, 적절한 조건하에 적대 행위를 즉시 중단하고 싶어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두 집정관이 이미 에페이로스로 가버린 이상 그와 평화 협상을 논할 수 없다고 답했다.
그렇게 평화 협상은 결렬되었고, 카이사르는 둑 공사를 이어갔다. 브룬디시움 포위 9일째 되던 날, 두 명의 집정관을 군대와 함께 발칸 반도로 이송했던 수송선들이 브룬디시움으로 돌아왔다. 폼페이우스는 함대가 돌아오자마자 에페이로스로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카이사르의 공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도시 곳곳에 바리케이드과 장애물을 설치한 뒤 병사들을 조용히 승선시켰다. 이때 일부 경보병들을 성벽에 배치해두고, 대부분의 군대가 승선을 완료했을 때 합의된 신호에 따라 그들을 다시 호출하기로 하고, 빠른 배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소에 남겨뒀다.
브룬디시움 주민들이 자기들을 버리고 도망치는 폼페이우스에게 분개하여 카이사르에게 즉시 알리자, 그는 서둘러 군대를 이끌고 브룬디시움으로 진격했다. 폼페이우스는 해질녘에 항해를 시작했을 때 신호를 보냈고, 성벽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신호를 보고 즉시 해변으로 달려가 빠른 배에 올라 타서 함대에 가세했다. 폼페이우스의 함대는 아직 둑이 쌓여 있지 않은 쪽으로 배를 몰아 강행 돌파했는데, 오직 2척 만이 카이사르 병사들이 세운 장벽에 얽히는 바람에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포획되었다.
결국 폼페이우스가 에페이로스로 탈출하는 걸 막지 못한 카이사르는 갈리아 키살피나, 피체노움, 메시나 해협 등 전 해안 지역의 함선들을 총동원해 브룬디시움에 집결시키라는 통보를 내렸다. 하지만 그러려면 기나긴 시간이 필요했고, 그는 그 동안 히스파니아의 폼페이우스군을 물리치기로 했다. 기원전 49년 4월 1일 로마에 입성한 뒤 국고를 확보하여 군자금을 마련한 후, 일주일 뒤 히스파니아로 진군했다. 진군하던 도중에 마실리아가 귀순을 거부하고 저항하자, 카이사르는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에게 3개 군단을 맡겨 육상에서 공격하게 하고( 마실리아 공방전),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해군을 맡겨 해상에서 봉쇄하게 한 뒤, 자신은 히스파니아로 계속 진군했다. 히스파니아에 주둔하고 있던 폼페이우스 측 장성들이 이에 맞서면서, 일레르다 전투가 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