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영수회담( 領 袖 會 談)이란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과 입법부의 제1야당 대표(구 총재) 간의 회담을 말한다.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 이래 주기적으로 대통령이 제1야당과 영수회담을 가지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다.1.1. 어원
영수는 어떤 집단에서 특별히 뛰어난 사람을 의미하며, 따라서 영수회담은 국가나 정치단체 또는 어떤 사회조직의 최고 우두머리가 서로 만나서 의제를 가지고 말을 나눈다는 뜻이다.한자로는 ‘옷깃 영’(領), ‘소매 수’(袖)자를 쓰는데, 옷깃과 소매는 의복의 가장자리로, 사물과의 접촉이 많아 내구성 있는 소재를 덧대어 만들거나 옷감의 질도 신경써서 만든다. 자연히 옷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 되었으며, 어떤 집단의 으뜸이 되는 이들을 비유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이 되었다. 참조
1.2. 용례
한국 정치에서 '영수회담'이란 단어는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의 양자회담만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하는 경우가 보통이었고, 참여정부 이래로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분리되는 게 일반화되었지만 여당의 실질적 1인자는 여전히 대통령이다보니 일반적으로는 여당 대표와 야당 대표의 회담은 대개 영수회담이라 부르지 않는다.다당제 구도였던 노태우 정부,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문재인 정부에서는 1:1 만남 뿐만 아니라 원내 정당 대표들을 모두 초대하는 대표 회담을 하기도 했다. 문민정부는 당시 민주당, 자유민주연합을 국민의 정부는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을, 참여정부는 한나라당, 민주노동당, 국민중심당을, 문재인 정부는 국민의당, 정의당, 바른정당과 이후 민주평화당, 바른미래당, 정의당을 초대하는 등 대표 회담을 주최했다. 다만 이런 경우는 보통 영수회담이라고 부르지 않는데, 영수회담은 대통령과 야당 대표 단 둘만이 배석해 진행하는 회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이 정치적 난국에 봉착했을 때 야당의 대표들과 회담하여 국정을 풀어가는 것이 역사적 관습으로 존재했다. 회담 장소는 대통령의 집무 공간이 되는 청와대에서 열렸다. 식사를 겸해서 회담하는 경우도 있고 차담회 형식으로 회담하는 경우도 있다.
2. 정부별 영수회담
관습적인 영수회담의 뜻에 맞게 다자회담을 제외한 양자 영수회담만 정리한다.2.1. 이승만 정부 (0회)
이승만 정부 시절에는 영수회담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당초 무소속이었고, 나중에 자유당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 이후의 대통령들에 비해서는 국회나 정당과는 거리를 뒀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이 삼권분립을 철저히 하는 미국 정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며, 초대 대통령은 정파를 초월한 국부(國父)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1] 게다가 여야 공히 정당으로써 체계적인 정당조직을 갖추지 못 했다. 당시 정당은 조직이라기보다는 국회의원들이 모인 파벌들의 집합에 가까웠다. 한국 정당이 중앙당, 사무처 등 근대적 시스템을 갖추게 되는 것은 일본 정당정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김종필이 1963년 민주공화당을 창당한 이후의 일이다. 제2공화국 시절에도 영수회담은 없었다. 이 때는 정치체제가 총리 중심의 내각책임제였고, 여야 모두 지리멸렬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2.2. 박정희 정부 (5회)
△ 1965년 7월 20일 영수회담 |
△ 1975년 5월 21일 영수회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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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5월 21일 박정희 대통령 -
김영삼
신민당 총재
박정희 정부 시절에 있었던 영수회담 중 가장 유명한 영수회담이다. 이때 김영삼 총재는 회담 내용을 공개하지 않아 박정희 대통령과의 밀약설이 돌았고, 회담 이후 대여투쟁 노선이 다소 온건해지면서 정치적 위기에 몰리게 된다. 김영삼 대통령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영삼 총재가 먼저 육영수 여사에 대한 조의를 표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창밖의 새를 가리키면서 "내 신세가 저 새 같습니다"라고 하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고 한다. 이어 김영삼 총재가 유신철폐와 민주화를 제안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영구집권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하며 시간을 달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김영삼 총재는 대통령의 눈물과 진심을 믿었으나, 결과적으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김영삼은 회고록에서 박정희에게 속았다고 술회했다. YS 만난 박정희 "이 이야기는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합시다" 그러나 동아일보 광고탄압 중지, 투옥됐던 민주화 운동 정치인 일부 석방 등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다. #
2.3. 최규하 정부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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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2월 18일
최규하 대통령 -
김영삼
신민당 총재
1980년 2월 18일에 최규하 대통령과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영수회담이 있었다. 완전한 양자회담은 아니었고, 정부측에서는 신현확 국무총리와 최광수 대통령비서실장, 신민당 측에서는 박한상 사무총장, 황낙주 원내총무, 이택돈 정책위의장이 배석했다고 한다.[2] 5시간 면담에서 김영삼 총재는 정치일정 단축을 통해 조속한 개헌과 정권이양, 정치적 중립,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미 12.12 군사반란 이후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한 시기였던 만큼, 지금 와서는 정치적 의미가 크지 않은 영수회담으로 평가된다.
참고로 최규하 대통령은 당적을 가진 적이 없으며 전임 박정희 정부의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총재는 김종필이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상술한 김영삼 총재와의 회담에 앞서 1980년 2월 15일 김종필 민주공화당 총재와 최영희 유신정우회 의장 등 여당 간부들과 회담을 가졌다고 한다.
2.4. 전두환 정부 (1회)
△ 1987년 6월 24일 영수회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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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24일
전두환 대통령 -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이 영수회담 결과에 대해선 해석과 평가가 다소 엇갈리지만, 결과적으로 5일 뒤 6.29 선언으로 이어지는 회담이었다는 데에는 별 이견이 없다. 당시 영수회담에서 김영삼 총재는 4.13 호헌조치 철회, 김대중 사면복권, 6·10 민주항쟁 관련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하였으나, 전두환 대통령은 즉답을 피하면서 '본인은 남은 임기 동안 안보, 남북관계, 올림픽 등 국가적 문제에만 전념할 것이며 노태우 민정당 대표에게 정국을 이끌어가는 모든 책임과 권한을 넘겼다'고 말한다. 당시 정부측에서는 '4.13 호헌조치를 사실상 철회한 것'이라고 평가를 내놓았지만, 김영삼 총재는 회담 직후 결렬을 선언하며 6월 26일 평화대행진을 재개하기로 한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같은 날 전두환 대통령은 이민우 신한민주당 총재와 이만섭 한국국민당 총재와도 개별 영수회담을 가졌다. #
2.5. 노태우 정부 (2회)
△ 1990년 6월 16일 영수회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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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8월 31일
노태우 대통령 -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
노태우 대통령 겸 민주정의당 총재는 이 회담에 앞서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와 8월 22일, 제2야당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와 8월 29일에 개별 회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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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월 11일
노태우 대통령 -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
이후 노태우 대통령은 제2야당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와 1월 12일에,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와 1월 13일에 개별 회담을 했다. 이는 1월 22일 3당 합당의 전조였다.
언론에서는 노태우 정부의 영수회담을 위와 같이 2회로 기록하고 있지만 # 이는 야3당의 총재였던 3김씨(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와 모두 개별회담을 가졌던 경우만 계산한 것으로 보인다. 노태우 대통령은 야당 총재들과 단둘이 만나는 양자회담이나 # 여러 야당 총재와 만나는 다자회담을 매우 자주 한 것으로 확인된다. 1989년 12월 15일에는 청와대에 4당 대표가 모두 모여 자정까지 술을 곁들인 만찬회동을 가졌다고 한다. #
1989년 3월 7일에는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 3월 10일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와 각각 회담을 가졌으나,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와는 회담을 하지 않았다. 당시 야3당은 노태우 대통령의 대선공약이었던 중간평가 실시를 압박하기 위해 공조하고 있었는데, 노태우 대통령과의 회담 후 김대중 총재와 김종필 총재가 중간평가 투표 실시 반대로 입장을 선회한다.김영삼 고립작전 성공[3] #
2.6. 문민정부 (2회)
△ 1996년 4월 18일 영수회담 |
- 1994년 3월 11일 김영삼 대통령 - 이기택 민주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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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4월 18일 김영삼 대통령 -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영수회담은 2회지만 전술했듯, 김영삼 대통령은 대표 회담을 가지며 몇 차례 다당 대표와 만났다.
현재 언론에서는 김영삼 정부의 영수회담 횟수를 총 2회로 기록하고 있다. # 하지만 당시 언론보도를 살펴보면 김영삼 대통령의 영수회담 횟수는 그보다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양자 영수회담만 최소 5회 이상으로 추산된다. 文民정부이후 與野영수회담 日誌 당장 이 페이지에 문민정부 첫 영수회담으로 기재되어 있는 1994년 3월 11일 이기택 대표와의 영수회담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 "새정부 출범후 두번째로 이뤄진 (영수회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출처 1993년 언론보도에 따르면, 문민정부 최초의 여야 영수회담은 1993년 6월 15일 김영삼 대통령과 이기택 민주당 대표의 회담이었다. 출처
2.7. 국민의 정부 (8회)
△ 2001년 10월 9일 영수회담 |
- 1998년 2월 27일 김대중 대통령 - 조순 한나라당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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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1월 10일 등 총 7회
김대중 대통령 -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가장 많이 시행되면서 민주화 이래 가장 성과가 큰 영수회담으로 꼽힌다. 7번의 영수회담을 거치면서 약학 분리, 남북정상회담, 9.11테러로 인한 민생 안정 조치 등 여러 방면에서 합의를 이뤄냈기 때문. * 7차례 영수회담이 모두 국민의 정부 전반기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는 것도 특징이다. 그러나 야당 한나라당측에서는 '칠회칠배(七會七背)', 즉 일곱 번 만나 일곱 번 배신 당했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제갈량이 맹획을 일곱 번 잡고 일곱 번 풀어줬다는 칠종칠금(七縱七擒)에 빗댄 말이다. 여당이 번번이 야당을 배신했다는 뜻이다. # # 이회창 총재 역시 총재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그간 몇 차례의 영수회담 뒤 돌아온 것은 후회와 분노, 통탄뿐이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
국민의 정부는 여소야대 정국 속에서 국정을 이끌어야 했기 때문에 영수회담 뿐 아니라 야당 대표들과의 다자회담도 자주 열렸다. 또 특이하게도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노무현, 권영길, 이한동 등 당시 대선후보들과 회담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유래가 없는 사례로 뽑힌다.
2.8. 참여정부 (2회)
△ 2005년 9월 7일 영수회담 |
- 2005년 9월 7일 노무현 대통령 -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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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 9일
노무현 대통령 -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
2005년 9월 7일 영수회담은 노무현 대통령이 앞서 제안했던 대연정에 관한 회담이었다. 이 자리에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노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을 거부했다. 2007년 2월 9일 영수회담은 한나라당 측에서 전시작전통제권, 민생경제 관련 영수회담을 줄기차게 요구해왔던 것을 # # 청와대가 결국 수용하면서 이뤄졌다.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임하던 시대가 끝나고 '당정분리'가 자리를 잡게 되면서 영수회담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또한 영수회담이 '빈손'으로 끝나는 경우가 늘어났으며, 영수회담이란 용어 자체가 권위주의 시대의 산물이라는 부정적 시각도 생겼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은 "나는 행정부 수장이지 여당 영수가 아니며, 만약 영수회담을 하려면 민주당과 한나라당 대표끼리 만나 회담해야 한다"라고 하며 영수회담에 부정적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
대신, 노무현 대통령은 여야 4당 대표와 국회의장, 대법원장, 국무총리 등 3부요인 초청 만찬과 같은 형식의 대화를 추진했다. # 이는 대통령이 여당을 장악했던 권위주의 시대 유산에서 탈피하기 위한 시도로 긍정 해석되기도 하나, 역으로 제1야당 대표의 격을 낮추고 무시하는 행태이며 과거보다 여야간 대화가 경색되는 계기가 됐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2.9. 이명박 정부 (3회)
파일:영수회담0805.jpg |
△ 2008년 5월 20일 영수회담 |
△ 2008년 9월 25일 영수회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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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20일
이명박 대통령 -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
한미FTA 비준 처리와 한미 쇠고기협상이 영수회담의 주된 의제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17대 국회가 끝나기 전에 한미FTA 비준동의안을 국회에서 처리하도록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고, 손학규 대표는 한미 쇠고기협상 관련 대통령 사과를 요구하면서 사실상 합의가 결렬되었다. 이명박 "FTA 처리해 시대적 사명 다해야" 손학규 "쇠고기협상, 대통령이 사과해야" 당시 이대통령과 손대표는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를 놓고 30분 동안 설전을 벌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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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25일
이명박 대통령 -
정세균
통합민주당 대표
미국산 쇠고기 파동 논란 등으로 인해 국회 원구성이 석달 가까이 지연될 정도로 진통을 겪은 뒤, 이명박 대통령의 제안으로 정세균 대표가 영수회담을 가졌다. # 특별한 현안이 있었다기보다는 국정 전반에 걸쳐 폭넓은 대화가 이뤄졌다. 이때 영수회담 자체 결과는 매우 좋았다. 영수회담 결과로 경제, 민생, 남북관계 등 국정 전반에 7개항 합의를 발표했고, 국정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기로 합의했다. #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더 이상 좋을 수 없다고 총평할 수 있다"라고 평가했으며, # 최재성 민주당 대변인도 브리핑에서 "통상의 영수회담과는 다르게 진지한 분위기에서 마치 실무회담과 같은 회담을 진행했다"라고 하면서 "의미 있는 합의가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
그러나 이후 정세균 대표는 '대통령 좋은 일만 시켜줬다'는 혹독한 당내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민주, '정세균 체제' 정체성 논란 '영수회담 후폭풍' 정세균 리더십 석 달 만에 비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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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27일
이명박 대통령 -
손학규
민주당 대표
손학규 대표의 제안을 이명박 대통령이 수용하면서 이뤄졌다. 가계부채, 저축은행 사태, 일자리, 대학등록금, 추경, 한미FTA 등 6대 민생현안을 의제로 열렸다. 뚜렷한 결과물은 없었다고 평가 받았다. '한계' 확인한 영수회담… 靑 '흡족' 野 '무용(無用)'
2.10. 박근혜 정부 (0회)
양자회담은 없지만 다자회담은 여러 번 가졌다. 여야 대표와 3자회담, 원내대표까지 5자회담으로 하는 방식. #최순실 게이트 정국이던 2016년 11월 무렵 추미애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청와대에 영수회담을 제안했고 청와대도 이를 수락하며 박근혜 정부의 첫 영수회담이 열리는가 했지만, 당시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여론이 들끓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영수회담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높았으며, 제2, 제3야당이던 국민의당과 정의당 또한 반발하였다. 결국 추미애 대표 측에서 하루 만에 영수회담 제안을 철회하여 영수회담은 이뤄지지 않았다.
2.11. 문재인 정부 (1회)
△ 2018년 4월 13일 영수회담 |
2017년에 선출된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내가 당 대표 하는 한 영수회담 없다"고 선언하고 임기 초반 여러 번 있었던 대통령+원내 5당 대표 모임 등에 모두 불참했다. 그러나 2017년 10월 미국 방문 당시 북핵위기 대처를 위한 일대일 안보 영수회담을 제안했다. #
그러다가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기 2주 전인 2018년 4월 13일에 문재인 대통령과 홍준표 대표가 단독 영수회담을 가졌다. 당시 영수회담은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관련 단독 회담을 먼저 제안했고, 홍준표 대표가 이를 수락하면서 국내정치 전반으로 확대된 회담을 역제안하자 청와대가 이를 수용하면서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회담 시작 전까지 회담 사실을 공개하지 않을 정도로 비밀리에 추진되었다. #
문재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야당의 협조를 요청했고, 홍준표 대표는 '야당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면서도 '북핵폐기를 위한 회담이 되어야 한다', '한미동맹 강화 조치가 필요하다' 등의 의견을 전달했다. #
영수회담은 1회지만, 전술했듯 문재인 대통령은 대표회담을 몇 차례 가지며 여러 당대표와 만났다.
2.12. 윤석열 정부 ( 1회)
자세한 내용은 윤석열-이재명 영수회담 문서 참고하십시오.△ 2024년 4월 29일 영수회담 |
3. 영수회담의 정치적 의미
대통령이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권위주의 체제 시절에 영수회담은 정치적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승만 정부 시절에는 영수회담이 아예 없었고, 박정희 정부 시절에는 총 5번 열렸지만 큰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전두환 정부 들어서는 한번도 열리지 않다가 87년 6월 항쟁이 거세지고 정국이 급박히 돌아가고 나서야 한번 열린 것이다.영수회담이 가장 활발하게 이뤄진 시기는 8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노태우 정부,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시기였다. 즉, 3김시대였다. 이때 영수회담 뿐 아니라, 당대표간 다자회담도 많이 열렸다.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하는 시기였던 동시에, 카리스마적 보스가 당을 장악하던 시절이었다. 이때 대통령은 여당 총재를 겸임했고, 야당 총재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보스였다. 당 장악력이 높은 보스들끼리 통 큰 타협을 통해 여소야대 정국의 어려운 매듭을 풀 수 있었던 것이다.
참여정부 이후 영수회담은 줄어들게 된다. 영수회담이 열리더라도 과거와 같은 통 큰 타결은 보기 어려워졌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임하지 않아 당정분리가 자리 잡으면서, 대통령이 여당 대표를 패싱하고 야당 대표와 대화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 시각이 생겼다.
- 여야 모두 정당민주화를 통해 당대표가 당무, 원내대표가 원내현안을 각각 담당하는 이원화된 체제로 재편되었다. 원내대표의 역할과 권한이 강화되면서 여야 원내지도부 간 대화의 중요성이 커졌고, 자연스럽게 대통령과 당대표의 영수회담은 오히려 원내대표의 권한을 침범하는 것으로 비춰지게 되었다.
- 정당민주화로 인해 진성당원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사회 전반에 걸쳐 이념갈등과 진영논리가 극심해졌다. 여야 당대표가 함부로 협상하고 타협하면 당원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러다 보니 영수회담을 해도 통 큰 타협이 이뤄지기 힘들고, 실질적 결과물이 나오기가 어려워졌다.
- 영수회담 자체가 권위주의적이라는 인식이 커졌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여야간 대화로 풀어야 할 일을 대통령이 나서서 단칼에 해결한다는 발상이 권위주의적이라는 것이다.
- 진보정당 중심으로 '영수회담은 군소정당을 무시하는 구시대적 정치'라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다만 80, 90년대처럼 중요한 현안을 영수회담에서 단칼에 해결하기는 어렵지만, 영수회담은 여전히 그 자체로서 정부와 야당이 서로 소통하는 최고 수준의 자리라는 정치적 의미가 있다. 대통령은 야당 지지자들을 존중한다는 의미가 있고, 야당은 대통령에게 핵심 의제들에 대한 결단을 요구하고 압박하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영수회담의 정치적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1]
미국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지금까지 유일한 무소속 대통령으로 남아있다.
[2]
출처: 1980년 2월 19일 조선일보 보도
[3]
사실 그 당시 중간평가 공약이행 요구를 주도하고 밀어붙인 것은
김영삼 총재였다.
김영삼 총재와 재야세력은
노태우 임기 초반에 밀어붙이지 않으면 결국 노태우가 공약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
김대중 총재는 임기 2년차에 중간평가를 하자는건 시기상조이며 그보다는 5공청산이 먼저라는 입장이었고,
김종필 총재는 국민투표를 통한 임기단축은 위헌이라는 입장이었다. 결국 3김씨가 모여서 중간평가 국민투표를 추진하기로 합의했지만, 영수회담을 거치면서 이견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이는 YS와 DJ의 야권내 헤게모니 투쟁과도 관련이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