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2-30 20:26:20

엄주동

파일:엄주동.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보본(普本)
본관 영월 엄씨[1]
출생 1897년 5월 23일
경상북도 장기군 현내면 임중리
(현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 임중리)
사망 1974년 2월 15일
서울특별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616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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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엄주동은 1897년 5월 23일 경상북도 장기군 현내면 임중리(현 포항시 남구 장기면 임중리)에서 아버지 엄재영(嚴在永)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윤택(金胤澤)의 딸 사이의 2남 6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2년 대종교에 입교했고 경성고등보통학교 부설 임시교원양성소에 재학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1915년 3월 경기도 경성부에서 이우용(李雨用)·최규익(崔奎翼) 등과 함께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契)를 조직하고 이진석(李鎭石) 등과 함께 서기로서 활동하면서 일본인들에게 피탈당하고 있는 각종 산업을 한국인 자신이 부흥시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1916년 나철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로 가려고 했을 때 김두봉·나주영(羅柱永) 등 5명과 함께 수행하기도 했다. 얼마 뒤 나철이 그곳에서 순국한 후에는 일전에 조직한 비밀결사 및 조선산직장려계 등을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정신교육과 일제의 경제 침탈에서 벗어나기 위한 각종 사업을 계획하다가 1917년 3월 5일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 뒤에는 만주로 망명해 서일 휘하에서 비서로 활동했고, 1920년 청산리 전투에도 참전했다고 한다. 1921년 8월에는 상하이로 가서 신규식 휘하의 연락책으로 활동하다가 신규식이 사망한 후 다시 만주로 돌아왔고, 1922년에는 길림성 연길현 육도구 용정촌(延吉縣 六道溝 龍井村)에서 군자금 조달을 위한 미곡상을 경영했다.

이후에는 귀국하여 경기도 경성부에서 서상일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했다고 하며, 1945년 8.15 광복을 맞았다.

1974년 2월 15일 서울특별시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엄주동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6년 10월 11일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했다.

[1] 복야공파-교리공파 27세 주(柱)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