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6-26 19:32:21

양맥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별명이 양맥인 e스포츠 관련 인물에 대한 내용은 제임스 맥코맥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예맥의 국가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예맥인
고조선 | 진번국 | 임둔국 | 낙랑국? | 대방국?
예인
부여계 : 고리국? | 북부여 | 동부여 | 갈사국 | 졸본부여
옥저계 : 북옥저 | 남옥저 | 동옥저
동예계 : 불내예국 | 화려국 | 북명
맥인
고구려 | 백제 | 비류국 | 조나국 | 개마국 | 구다국 | 주나국 | 해두국 | 행인국 | 황룡국 | 맥국 | 대수맥 | 소수맥 | 양맥
}}}
}}}}}}


1. 개요2. 관련 기록

1. 개요

梁貊

고구려 인근에 존재했던 소국 혹은 부족. 삼국사기에 의하면 유리왕 시기인 14년 8월 유리왕이 파견한 오이(고구려), 마리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현도군에 속했던 고구려현 또한 뺏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기록에서는 양맥의 부락을 명림답부, 고달가가 통제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고구려-위나라 전쟁 때 2차례(246년[1], 259년)나 양맥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고달가의 죽음 때 백성들이 탄식하면서 '안국군이 아니었다면 양맥, 숙신의 난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언급한 점을 보면 복속한 이후에도 고구려에 저항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소수맥과 대수맥의 소수와 대수가 압록강과 그 지류 혼강(비류수) 일대를 일컫듯이, 양맥(梁貊)도 양수(梁水)의 맥이라는 설이 있다.
한서 지리지 요동군 기록에 따르면 거취현(랴오양 동남쪽)의 실위산에서 나온 실위수(室僞水, 현재의 탕하湯河)가 북쪽으로 흘러 요동군 치소가 있는 양평현( 랴오양)에 이르러 양수(梁水,현재의 태자하太子河)로 들어간다고 나온다. 즉, 양수의 하류는 요동군의 중심지이고, 양수가 실위수와 만나기 이전의 상류지역에 양맥이 존재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현재의 본계( 번시)만주족자치현(本溪满族自治县)일대이다.

요동군 중심지 태자하 하류에서 고구려 중심지 혼강 유역으로 가려면 태자하 상류를 거슬러 넘어가야 하는데 요동군과 고구려(대수맥) 사이 길목에 양맥이 위치한 셈이다. 이는 3세기 고구려-위나라 전쟁에서 양맥 골짜기 전투가 벌어진 상황과도 맞아 떨어진다.

2. 관련 기록

(유리왕 33년, 14년)가을 8월에 왕이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병력 20,000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쳐서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병력을 내어 보내 한(漢)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秋八月, 王命鳥伊·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髙句麗縣 縣屬玄免郡.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13(卷第十三)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제1(第一) 유리왕
(신대왕 2년, 166년) (전략) 처음 명림답부(明臨荅天)의 정변 때에 차대왕의 태자 추안(鄒安)이 도망하여 숨었다. 새 왕의 사면령을 듣고는 왕의 〔궁궐〕 문에 이르러 아뢰어 말하기를, “지난번 나라에 재화(災禍)가 있었을 때 신은 죽지도 못하고 산골짜기에 숨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정사를 듣고 감히 죄를 아룁니다. 만약 대왕께서 법에 따라 죄를 정하여 저잣거리[市朝]에 버려서 〔죽이시더라도〕 오직 명에 따르겠습니다. 혹시 죽이시지 않고 먼 곳으로 추방하신다면 죽은 자를 살려 백골에 살을 붙여주시는 은혜이니 〔이는〕 신이 원하는 바이지만 감히 바라지는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곧 〔그에게〕 구산뢰(狗山瀨)와 누두곡(婁豆谷) 두 곳을 하사하고 양국군(讓國君)에 봉하였다. 답부를 국상(國相)으로 삼고 작위를 올려 패자(沛者)로 삼고, 내외병마(內外兵馬)를 담당하고 아울러 양맥(梁貊) 부락을 통령하게 하였다. 좌·우보를 바꾸어 국상(國相)으로 삼은 것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初明臨荅天之難, 次大王太子鄒安逃竄. 及聞嗣王赦令, 即詣王門告曰, “嚮囯有災禍, 臣不能死, 遯于山谷. 今聞新政, 敢以罪告. 若大王據法定罪, 弃之市朝, 惟命是聽. 若賜以不死, 放之逺方, 則生死肉骨之恵也, 臣所願也, 非敢望也.” 王即賜狗山瀬·婁豆𠈂二所, 仍封爲讓囯君. 拜荅夫爲國相, 加爵爲沛者, 令知内外兵馬, 兼領梁貊部落. 攺左·右輔爲國相, 始於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16(卷第十六)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제4(第四) 신대왕
(동천왕) 20년(246년) 가을 8월에 위(魏)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을 보내 10,000명을 거느리고 현도(玄菟)로부터 침략해왔다. 왕이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거느리고 비류수에서註 004 싸워 패배시키니 베어버린 머리가 3천여 급(級)이었다. 또 병력을 이끌고 다시 양맥(梁貊)의 골짜기에서 싸워 또 패배시켰는데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것이 3천여 명이었다. 왕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위(魏)의 대병력이 도리어 우리의 적은 병력보다 못하고, 관구검이란 자는 위(魏)의 명장이지만 오늘은 목숨이 내 손안에 있구나.”라고 하고, 철기(鐵騎) 5천을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였다. 관구검이 방진(方陣)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므로 우리 군사가 크게 궤멸하여 죽은 자가 1만 8천여 명이었다. 왕이 기병 1천여 기(騎)를 거느리고 압록원(鴨淥原)으로 달아났다.
二十年, 秋八月, 魏遣幽州刺史毋丘儉, 將萬人, 出玄菟來侵. 王將歩騎二萬人, 逆戰於沸流水上, 敗之, 斬首三千餘級. 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王謂諸將曰,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毋丘儉者, 魏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乃領鐡騎五千, 進而擊之, 儉爲方陣, 决死而戰, 我軍大潰, 死者一萬八千餘人. 王以一千餘騎, 奔鴨渌原.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17(卷第十七)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제5(第五) 동천왕
(중천왕) 12년(259) 겨울 12월에 왕이 두눌(杜訥) 골짜기에서 사냥을 하였다. 위(魏)의 장수 위지해(尉遲楷) <이름이 장릉(長陵)[2]의 이름을 범하였다.>가 병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왕이 정예 기병 5,000명을 선발하여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싸워서 이를 물리쳤는데, 베어버린 머리가 8천여 급이었다.
十二年, 冬十二月, 王畋于杜訥之谷. 魏將尉遅 名犯長陵諱., 將兵來伐. 王簡精騎五千, 戰於梁貊之谷, 敗之, 斬首八千餘級.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17(卷第十七)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제5(第五) 중천왕
(서천왕 11년, 280년) (전략)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달가를 안국군(安國君)으로 삼고 내외의 병마 업무를 맡아보게 하고 겸하여 양맥(梁貊)과 숙신(肅愼)의 여러 부락을 통솔하게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17(卷第十七)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제5(第五) 서천왕
(봉상왕) 원년(292년) 봄 3월에 안국군(安國君) 달가(逹賈)를 죽였다. 왕은 달가가 아버지의 항렬에 있고 큰 공과 업적이 있어 백성이 우러러보자, 그를 의심하여 음모를 꾸며 죽였다.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안국군이 아니었다면 백성들이 양맥(梁貊), 숙신(肅愼)의 난을 피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지금 그가 죽었으니 장차 누구에게 의탁할 것인가?”라고 하며 눈물을 흘리고 서로 조문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元年, 春三月, 殺安國君逹賈. 王以賈在諸父之行, 有大功業, 爲百姓所瞻望, 故疑之謀殺. 國人曰, “微安國君, 民不能免梁貊·肅愼之難. 今其死矣, 其將焉託.” 無不揮涕相弔.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17(卷第十七)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제5(第五) 봉상왕

[1] 다만 삼국사기를 제외한 삼국지, 자치통감, 관구검기공비 등 중국 측 사료에는 244년에 공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2] 고려 인종의 능호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