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5 22:00:46

야마다 코사쿠

<colbgcolor=#000000><colcolor=#f7f7f7> 야마다 코사쿠[1]
[ruby(山田, ruby=やまだ)][ruby(耕筰, ruby=こうさく)] | Kósçak Yamada
[2]
파일:야마다 코사쿠.jpg
출생 1886년 6월 9일
도쿄부 도쿄시 혼고(現 도쿄도 분쿄구)
사망 1965년 12월 29일 (향년 79세)
도쿄도 도시마구 세이조 5초메 자택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직업 작곡가, 지휘가
수훈 문화훈장 (1956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1936년)
아사히 문화상 (1941년)
NHK 방송문화상 (1950년)
역임 직위 도쿄 필하모니 관현악부 수석 지휘자
일본음악문화협회 회장
일본지휘자협회 회장
제국예술원 회원
분카가쿠인 음악과 주임 교사
소아이(相愛) 여자전문학교 전임교수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00><colcolor=#f7f7f7> 학력 도쿄음악학교[3] (성악과 / 졸업)
베를린 왕립 고등음악학교[4] (작곡과 / 졸업)
활동 기간 1914년 – 1965년
장르 클래식
부모 아버지 야마다 켄조(山田謙造)[5]
어머니 야마다 히사(山田ひさ)
형제 누나 건틀릿 츠네[6]
배우자 나가이 이쿠코(1915년 결혼, 1916년 이혼)
무라카미 키쿠오(1916년 결혼, 1956년 이혼)
츠지 테루코 (1956년 결혼)
자녀 장녀 야마다 미사
장남 야마다 코시
차녀 야마다 히사
양녀 야마다 히로코
}}}}}}}}}

1. 개요2. 생애3. 오케스트라 운영
3.1. 도쿄 필하모니회3.2. 일본교향악협회
4. 대표적 작품
4.1. 교향곡 및 교향시4.2. 무용 및 극음악4.3. 오페라4.4. 합창곡4.5. 가요4.6. 동요4.7. 대학교가4.8. 군가&전시가요
5. 여담

[clearfix]

1. 개요

고세키 유지, 고노에 히데마로와 함께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지휘자. 서양음악을 전공하고 연구하며, 일본어 특유의 억양과 감성을 살린 중독성 있고 흥겨운 멜로디로 현재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는,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수많은 명곡들을 남겼다. 일본 최초의 관현악단 창설 등 일본의 서양음악 보급에 힘썼다. 젊은 시절부터 뉴욕 카네기홀에서 자작 관현악곡들을 연주, 베를린 필하모니, 현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전신인 레닌그라드 필하모니 교양악단 등의 지휘를 맡는 등, 국제적으로도 큰 명성을 떨쳤다.

일본 국내에서는 교향곡 이외에도 유명 동요 <赤とんぼ, 고추잠자리>를 비롯한 수많은 동요와 영화음악, 그리고 도쿄대학의 운동회가(歌)인 <大空と>을 비롯하여, 와세다대학 응원가 <競技の使命> 메이지대학, 니혼대학, 칸사이 대학, 히토츠바시대학, 도시샤대학, 간세이가쿠인대학 등의 교가의 작곡을 맡는 등, 현재 일본의 유명 대학과 고등학교 교가 다수를 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일본 내에 전개된 전시체제에서 각종 군가 및 선전가요의 작곡에 앞장선 점, 일본 군부로부터 장교급 대우를 받은 이력이 있다는 점에서 전범으로 낙인 찍히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이전부터 쌓아올린 음악적 업적, 특히 현재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 오케스트라 NHK 교향악단의 전신이 되는 일본교양악협회의 창설을 이끌고, 일본 내의 서양 음악의 발전(특히 클래식)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일본에서는 여전히 그의 죽음과 업적을 기리는 등 우수한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평가하고 있다.

2. 생애

지금의 후쿠시마현 후쿠시마시에 해당하는 후쿠시마 번의 번사 출신이자 의사였던 야마다 겐조(山田謙造)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6년 10살 무렵 아버지가 별세하자,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스가모미야시타(巣鴨宮下)[7]에 위치한 지에이칸(自営館)[8]에 들어가, 13살까지 시설에서 학업에 열중한다. 1899년, 13살 무렵, 누나의 도움을 받아 오카야마에 위치한 사립 야스타다 학교에 입학, 매형인 에드워드 건틀릿에게 서양음악의 기초를 전수받는다. 14살 때는 칸세이가쿠인 중학부로 전학, 재학중이던 16살 무렵 첫 작품 'MY TRUE HEART'를 작곡한다.

이후, 칸세이가쿠인 본과를 중퇴하고 현재의 도쿄예술대학의 전신인 도쿄음악학교 예비과에 입학, 1908년, 도쿄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한다. 참고로 그는 작곡가가 된 이후 한때 자신의 모교였던 간세이가쿠인의 같은 학교 법인 간세이가쿠인대학 교가의 작곡을 맡는다.

1910년부터 3년간 미쓰비시 재벌의 총수 이와사키 코야타(岩崎小弥太)의 지원을 받아, 독일의 베를린 왕립 예술 아카데미 작곡과에 유학하며, 막스 브루흐(Max Bruch) 등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베를린 유학시절인 1912년에는 최초의 일본인 작곡 교향곡인 <개선(凱旋)과 평화>를 작곡했다. 귀국 후인 1914년에는 이와사키가 1910년에 조직한 도쿄 필하모니회의 관현악부 수석지휘자로 임명되지만, 코사쿠의 이성문제가 이와사키를 격분하게 만들었고, 이후 이와사키가 자금 지원을 끊자 어쩔 수 없이 이듬해 해산하고 만다.

1917년에는 미국에 넘어가, 카네기홀에서 자작곡을 중심으로 한 연주회를 개최, 1924년에는 작곡가 고노에 히데마로(近衛秀麿)[9]와 함께 하얼빈의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일본인 단원들을 섞은 오케스트라 연주회 '러일교환 교향관현악 연화회'를 주최, 또한 고노에와 함께 이를 모체로 한, 현 NHK 교향악단의 전신인 일본교향악협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불투명 회계문제로 내분이 발생, 단원이었던 쿠로야나기 모리츠나[10]외 3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단원이 고노에와 행동을 함께 했기에, 야마다쪽이 크게 불리했고, 이후 악단을 나오게 된다.

1921년에는 사립학교 분카가쿠인(文化学院) 음악과 주임 교사를 직임한다. 1926년 40세가 되던 무렵, 쇼난 지역(현재의 요코스카 일대)의 치가사키 정(茅ヶ崎町)로 거주지를 옮기고 6년간 생활한다. 오케스트라 악단의 실패에 의해 거액의 빚을 지게 되었으나, 이곳에서 다시 재기, 그 유명한 <아카톤보(赤とんぼ, 고추잠자리)> 등 일본의 동요 명곡 다수가 여기서 탄생한다.

1930년에는 본래 이름이었던 耕'作'에서 耕'筰'로 이름을 개명하고, 1936년에는 프랑스의 최고의 명예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상받는다. 1940년, 전시체제 개시 후 전색이 깊어지자, 연주가협회를 발족시키며, 스스로 회장 자리에 취임한다. 같은 해 11월에는 오페라 <쿠로후네(黒船, Black Ships)>를 초연, 또 황기 2600년 축하 연주회에서는 프랑스의 작곡가 잭 이베르(Jacques Ibert)의 신작 '축전예곡'를 지휘한다. 1941년 아사히 문화상 수상, 정보국 관할 하의 일본음악문화협회가 발족되자 부회장에 취임한다. 장관대우를 받으며 때때로 군복 차림으로 다녔기 때문에, 이후 전범 취급 대상에 오르기도 했다. 1942년 제국예술원 회원에 선출, 1944년에는 일본음악문화협회 회장에 취임한다.

전쟁 후, 자신의 전시중 행동에 관해 도쿄신문에서 음악평론가 야마네 긴지 사이에서 이른바 '전범논쟁'이 일어나게 된다. 논쟁이 수습된 1948년 무렵 뇌출혈로 쓰러진 뒤, 왼쪽 하반신 불구가 된다. 1950년에는 일본지휘자협회 회장에 취임하며, 다시 방송문화상을 수상. 1956년, 문화훈장을 수상. 이혼 및 재혼을 계기로 호적상의 이름도 耕'筰'로 변경한다. 1965년 11월 경, 코사쿠는 성 루크 국제병원에 입원했으나, 그의 가족이 도쿄도 세타가야구 세이조 지역에 위치한 웅장한 서양풍 저택을 빌리면서, 같은 해 12월 4일, 야마다는 퇴원 후, 세이조 자택에 들어와 요양을 이어나간다. 이윽고 12월 29일, 자택 2층 방에서 야마다는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향년 79세, 묘소는 도쿄도 아키루노시 소재의 니시타마 묘원(西多摩霊園).

3. 오케스트라 운영

3.1. 도쿄 필하모니회

야마다는 오랜 시간 일본에서의 본격적인 오페라 상연과 상설 오케스트라의 설립 등의 꿈을 품고 있었지만, 당시 근대화를 이룬지 얼마 되지 않은 일본은 그러한 기반 시설이 턱없이 부족했고, 자본 역시 부족했기에 그 혼자서는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만나게 된 것이 바로 미쓰비시 재벌의 총수이자, 상당한 음악 애호가였던 이와사키 코야타(岩崎小弥太)였다.

야마다와 이와사키의 만남은 야마다가 다니던 도쿄음악학교의 첼로 교사였던 하인리히 베르크마이스터가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 야마다를 첼로 지도를 하고 있던 이와자키에게 소개함으로써 시작된다. 야마다는 이와자키를 알게 된 뒤 독일 유학 기회를 얻는 한편, 이와자키 자신도 음악감상 서클의 하나로 '도쿄 필하모니회'를 스스로 설립하여 자금 출자를 자처했다. 당초에는 군악대나 당시 인기가 있었던 미쓰코시소년음악대 등이 일시적으로 뭉친 '합동 오케스트라'의 형태를 띄고 있었으나, 이윽고 소규모의 상설 오케스트라로 발전하여, 1915년부터는 제국극장에서 공연을 개시했다.

그러나, 그 무렵 막 결혼을 한 야마다가 얼마 뒤 다른 여성(이후 이 여성과 재혼한다)에게 눈을 돌렸다는 사실을 들은 이와자키가 격노. 이와자키는 즉시 금전 지원을 끊는다. 이와자키로부터 출자가 끊긴 도쿄 필하모니회는 이후 금전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되고, 결국 1년 뒤인 1916년 2월에는 맥없이 해산하며 야마다의 소원이었던 상설 오케스트라 개최의 꿈은 좌절되고 만다.

3.2. 일본교향악협회

도쿄 필하모니회 해산 후, 미국 카네기홀 공연과 오페라 상연을 통해 다시금 상설 오케스트라 창설의 꿈을 품게 된 야마다는 "우선 본고장의 오케스트라를 초청해 세간의 주목을 오케스트라에 모이게끔 해야겠다"며 당시 동양 최고의 실력을 뽐내던 하얼빈의 동청철도교향악단(東支鉄道交響楽団)을 초대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초빙에 관한 이야기는 꽤 깊게 진행되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좌절, 우선은 이듬해인 1924년 4월에 일본교향악협회를 설립했지만 당시의 야마다는 자신의 사업을 이행할 파트너를 찾고 있었고, 악보 등의 자료 및 시설 상태는 대단히 열악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유럽 유학에서 대량의 악보와 함께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은 고노에 히데마로와 만나게 된다. 사정을 들은 그는 야마다에게 조력할 뜻을 전했고, 야마다는 고노에의 악단 참여와 하라 젠이치로(原善一郎)라는 러시아에 능통하고 수완이 좋기로 유명했던 매니저를 고용을 결정하며, 이제 꿈을 이룰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진다. 이후 그는 대지진으로 단념한 동청철도교향악단의 초빙에 다시금 착수한다.

1925년 4월에 개최된 러일교환 교향관현악연주회가 성공적으로 상연을 마치며, 이를 발판으로 삼아 협회는 1926년 1월에 첫 정기연주회를 열었다. 6월까지 총 12차례의 연주회를 개최했으나,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협회는 붕괴한다. 그것은 바로 1926년 9월 8일, 고노에가 하라의 단원 내 구조조정에 불복하며 돌연 협회의 탈퇴를 선언, 이에 고노에를 지지하던 단원 44명은 이른바 '고노에파(派)'으로 분리되어 신교향악단을 설립한다. 한편, 야마다에게는 그들이 모두 떠나간 뒤 쿠로야나기 모리츠나(黒柳守綱)[11]와 마츠바라 요노스케(松原与輔), 오카무라 마사오(岡村雅雄), 군지 아키오(郡司昌雄)로 구성되는 <몽파르나스 트리오>의 3명밖에 남지 않게 된다. 분열의 원인은 용도불명의 돈이 얽힌 회계 비리가 원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나중에 관동군의 정보 담당이 된 하라가 이러한 비리에 엮여 있었다는 설도 있으나 이는 정확하지 않으며, 애초에 야마다 자체가 금전적인 부분에 있어 다소 느슨한 성격이었다는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여겨진다.

야마다의 금전적 문제를 제쳐두더라도 지휘자로서의 실력이나 열정은 타 지휘자와 비교해 보아도 전혀 뒤쳐지지 않았다고 여겨지나, 실력이나 열정만 보더라도 오케스트라의 운영자로서의 자격을 갖추지는 못 했던 것은 아닌가라는 지적 역시 있다. 일본의 유명 지휘자이자 현직 피아니스트인 이노우에 미치요시(井上道義)는 "단원으로서의 야마다와 고노에 둘의 성격을 비교했을 때, 야마다 쪽의 경우 카리스마성이 부족했던 것이 아닐까"라고 이야기한다.

야마다는 전쟁 이후, 뇌출혈로 쓰러지며 왼쪽 하반신이 불구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때때로 지휘에 나섰다. 그러나, 그 중 실제 지휘 대부분은 다른 사람에 맡겼다고 한다. ( 베토벤 교향곡 9번의 첫 연주 지휘를 미하일 움라우프에게 맡긴 것과 비슷하다). 그가 오페라 <쿠로후네(黒船, Black Ships)를 지휘했을 때 역시, 실제 지휘는 아사히나 타카시(朝比奈隆)에게 맡겼다.

이후 그가 세운 도쿄 교양악협회는 여러 차례의 개혁을 걸쳐 21세기 현재 아시아 최고의 오케스트라라는 평가를 받는 NHK 교향악단으로 발전한다.

4. 대표적 작품

주로 일본의 작가 기타하라 하쿠슈와 함께 수많은 국민 가요, 동요와 교가 등을 창작했다. 또한, 야마다의 관현악곡, 실내악곡 등의 작품은 미발매된 것이 많은 데다, 심지어는 자필 악보의 대부분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소실되어 버렸기에 필사본으로만 보존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정확한 발매년도가 알려져 있지 않은 경우도 많다. 악보의 대다수는 일본근대음악관[주소] 에 소장되어 있으며, 일본악극협회(日本楽劇協会)가 관리하고 있다.

파일:20180308-00000011-wordleaf-000-16-view.jpg

▲ 왼쪽이 젊은 시절의 야마다 코사쿠. 오른쪽이 그와 오랜 시간 협업한 기타하라 하쿠슈다.

4.1. 교향곡 및 교향시

<rowcolor=#fff> 연도 제목 비고
1912년 かちどきと平和 교향곡 바장조, 최초의 일본인 작곡 교향곡
1913년 暗い扉 교향시
曼陀羅の花 교향시
1916년 マグダラのマリア 무용교향곡
1921년 明治頌歌 교향곡
1934년 鶴亀 가창교향곡 제3번
1940년 神風 교향시, 작사자 미상
1956년 おやさま 교향시 작사자 미상

4.2. 무용 및 극음악

<rowcolor=#fff> 연도 제목 비고
1916년 青い焔 무용교향곡
明暗 무용교향곡
マリア・マグダレーナ 무용교향곡
1920년 タンジールの死 극음악
指鬘外道 극음악, 다이쇼- 쇼와 시대의 가인(歌人) 야나기와라 뱌쿠렌(柳原白蓮)의 희곡이 원작.
1922년 盲鳥 무용시곡
1928년 忠義 극음악
연도 미상 星の世界へ 극음악, 일본의 극작가이자 번역가였던 키노시타 모쿠타로(木下杢太郎)의 희곡이 원작.
연도미상 信仰 극음악

4.3. 오페라

<rowcolor=#fff> 연도 연도 비고
1913년 堕ちたる天女 메이지 시대 소설가이자 번역가,
극작가였던 츠보우치 쇼요(坪内逍遥, 1859-1935)의 희곡이 원작. 날개옷 설화를 배경으로 한 악극
1931년 おやめ 오페라&발레
1940년 黒船(Black ships) 쿠로후네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오페라

4.4. 합창곡

<rowcolor=#fff> 연도 제목 비고
1912년 秋の宴 베를린 왕립 고등음악학교(現 베를린 예술대학교) 졸업작품으로 작곡.
1930년 梵音響流 얼마 뒤 「巴里仏国寺に捧ぐる曲」로 제목을 변경.
1941년 カンタータ『聖戦讃歌 大陸の黎明』
1945년 カンタータ『沖縄絶唱譜』
1948년 秋の歌 쇼와 23년 전국아동가창콩쿠르 (現 NHK 전국학교음악콩쿠르) 과제곡

4.5. 가요

<rowcolor=#fff> 연도 연도 비고
1925년 からたちの花 기타하라 하쿠슈 작사
1927년 この道 기타하라 하쿠슈 작사
1928년 中国地方の子守唄 편곡
연도 미상 鐘が鳴ります 기타하라 하쿠슈 작사
연도 미상 かやの木山の 기타하라 하쿠슈 작사
연도 미상 ロシア人形の歌 기타하라 하쿠슈 작사, 전5곡으로 구성
연도 미상 魚師の娘 에드워드 뫼리케 작사
연도 미상 후카오 스마코 작사[13]

4.6. 동요

<rowcolor=#fff> 연도 제목 비고
1921년 赤とんぼ 미키 로후 작사[14], 야마다 코사쿠 동요의 대표곡이자 일본에서는 대단히 유명한 곡.
2007년에는 일본 문화청이 선정한 일본의 노래 100선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해질녘의 고추잠자리를 보고 옛날을 생각하며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23년 砂山 기타하라 하쿠슈 작사
あわて床屋 기타하라 하쿠슈 작사
1924년 まちぼうけ 기타하라 하쿠슈 작사
1932년 ペチカ 기타하라 하쿠슈 작사
연도 미상 七夕 카와지 류코 작사

4.7. 대학교가

<rowcolor=#fff> 학교명 및 제목 작사 비고
와세다대학 응원가 <競技の氏名> 이가라시 치카라(五十嵐力)
게이오기주쿠대학 컬리지 송[15] 호리구치 다이가쿠(堀口大學)
주오대학 제2교가 코바야시 이치로(小林一郎)
히토츠바시대학 학가<一つ橋の歌(武蔵野深き)> 이초카이(銀杏会)[16]
도쿄대학 운동회가 <大空と> 기타하라 하쿠슈
무사시노미술대학 교가 기타하라 하쿠슈
도시샤대학 학가 기타하라 하쿠슈
시바우라공업대학 학가 기타하라 하쿠슈
간세이가쿠인대학 교가 기타하라 하쿠슈
간세이가쿠인대학 응원가 <打ち振れ旗を> 기타하라 하쿠슈, 에드워드 브랜든
도쿄미술대학 교가 하야시 코케이(林古渓) 도쿄예술대학
도요대학 교가 하야시 코케이
도쿄농업대학 학가 <常磐の松風> 오가미 사이슈(尾上柴舟)
도쿄여자대학 교가 도쿄여대 국문과 학생 유지
메이지대학 교가 <白雲なびく> 코다마 카가이(児玉花外)
니혼대학 교가 소마 교후(相馬御風)
간사이대학 학가 핫토리 요시카(服部嘉香)
류코쿠대학 학가 학가제작위원회
이와테의학전문학교 교가 도이 반스이(土井晩翠) 現 이와테의과대학

4.8. 군가&전시가요

앞서 생애 부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시 일본 제국이 일으킨 전쟁에 대해 협력을 장려하거나 찬양하는 곡을 제작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한 업적으로 일본 군부로부터 한때는 장교급 대우도 받았다. 현재는 '전범'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의 큰 과오 중 하나로 평가되는 편.
<rowcolor=#fff> 제목 작사 비고
米英撃滅の歌 노구치 요네지로(野口米次郎) 영화 <撃滅の歌> 삽입곡
燃ゆる大空 사토 소노스케(佐藤惣之助) 영화 <燃ゆる大空> 삽입곡
翼の凱歌 사토 소노스케 영화 <翼の凱歌> 삽입곡, 핫토리 료이치(服部良一) 편곡
サイパン殉国の歌 오기 아츠오(大木惇夫) 전시가요
曙に立つ 오기 아츠오 전시가요
何だ空襲 오기 아츠오 전시가요
小国民決意の歌 오기 아츠오 전시가요

5. 여담

  • 상술했듯, 그는 1930년 12월, 이름을 耕'作'에서 '대나무'를 뜻하는 부수 ⺮(대죽머리, 또는 대죽변이라고 부른다.)을 추가한 耕'筰'로 변경했다[17]. 또한, 호적상에는 오랜 기간 '耕作'로 남아 있었으나,1956년 츠지 테루코와의 재혼을 계기로 호적상에서도 耕筰로 변경하게 되었다. 1948년 발표한 에세이 <竹かんむりの由来, 대죽머리의 유래>[18]에서 밝히기를, 본래 이름이었던 야마다 코사쿠(山田耕作)와 동성동명의 인물이 많아(당시 일본 전국에만 100명 이상이 있었다고 한다.), 행정상. 기록상의 문제 등이 빈번히 발생했던 것이 그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또 하나는, 야마다가 지휘하는 모습을 본 음성학자 삿타 코토지(颯田琴次)로부터 뒷머리가 보기 흉하다며 가발을 쓰는 게 어떻겠냐는 지적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발을 쓰는 게 싫었던 야마다는 이후 아예 삭발을 단행했지만, 그 모습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결국 이름 위에 "가발을 얹는 것"을 생각해 냈다고 한다. '⺮(대죽머리) = 毛毛(머리털이 여러 개)'라는 이야기다. 참고로 '筰'라는 글자는 본래 '대나무 막대'라는 의미로, 이름은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거의 쓰지 않는 한자다. 야마다 역시 강희자전에서 이를 찾았다고 한다.
  • 야마다는 1913년 이후, 자신의 이름 표기를 'Kósçak Yamada'로 표기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에세이 「竹かんむりの由来, 대죽머리의 유래」에 따르면, 베를린의 한 출판사에서 야마다의 가곡집을 출판하게 되었을 당시, 출판사 사람이 본래 표기 방식이었던 'Kosaku'라는 이름을 보더니 웃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코자(이탈리아어로 '물건', '무엇')의 쿠(암소를 의미한다고 한다)라고 들렸기 때문인데, 이를 들은 야마다는 충격을 받고 알파벳 표기를 고쳤다고.
  • 일본의 유명 음료회사 칼피스의 상품명 및 회사명은 칼피스의 창업자인 미시마 카이운(三島海雲)으로부터 상담을 받은 야마다가 "입에 착 달라붙어 부르기 쉬우니, 분명 크게 번성할 것이다."라고 조언하자 이름을 현재의 칼피스로 정했다고 한다.
  • 한편, 여성관계에 있어 굉장히 개방적인 편이었다. 연회 자리에서의 음담패설이나 춘가(春歌)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제자인 타카기 토로쿠[19]의 이야기에 따르면, "연회 자리에서의 그의 이야기중 3분의 2는 음담패설이었다고 들었다"고 전하며, 또 다른 제자 단 이쿠마[20]는 "요즘같았으면 이미 성희롱(セクハラ)로 사회에서 매장당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야마다의 말재주가 뛰어난 것도 있어, 그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도중에는 그다지 저속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21]

[1] 외래어표기법에 따르면 '야마다 고사쿠' [2] 독일 유학 시절인 1913년부터 쓰기 시작한 표기 방식이다. 본래 표기는 Kosaku Yamada. 철자를 바꾸된 계기는 본 문서 5번 항목 참조. [3] 도쿄예술대학 [4] 베를린 예술대학교 [5] 후쿠시마번의 번사(藩士) 출신의 의사이자 목사였다. [6] 영국인 음악가이자 일본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던 에드워드 건틀릿과의 결혼으로 성을 바꾸었다. 본래 이름은 야마다 츠네(山田恒, 1873~1953) [7] 현재의 도쿄도 도시마구 미나미오츠카(南大塚)에 해당 [8] 이후 일본기독교단 스가모교회로 발전 [9] 제34, 38, 39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고노에 후미마로의 이복동생이다. [10] 일본의 유명 배우 쿠로야나기 테츠코의 부친이다. [11] 훗날 일본을 대표하는 원로 국민 여배우 쿠로야나기 테츠코의 부친이다. [주소] 도쿄도 미나토구 시로카네다이 1-2-37 (東京都港区白金台1-2-37) [13] 深尾須磨子(1888-1974), 일본의 시인이자 작가, 번역가. 본명은 오기노 시게노(荻野しげの) [14] 三木露風(1889~1964), 일본의 시인이자 비평가, 수필가이다. 미키 로후는 필명이며 본명은 미키 미사오(三木操). [15] 교가인 게이오기주쿠숙가(慶應義塾塾歌)와는 다르다. [16] 도쿄대학 및 대학원 동창회 유지 [17] 筰, 作 두 한자 모두 발음은 사쿠(さく)로 동일하다 [18] 「山田耕筰書作全集 3」이와나미 서점(岩波書店) 수록. [19] 高木東六(1904-2006), 쇼와시대에 활약했던 일본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본명은 토바 슌조(鳥羽俊三) [20] 團伊玖磨(1924-2001), 오페라와 교향곡, 가곡 등, 야마다 코사쿠의 뒤를 이어 현대 일본의 클래식 음악의 발전에 일조했다. [21] 츠지다 마사노리(辻田真佐憲), 2020년 5월 1일, “朝ドラ「エール」に初登場 志村けんと山田耕筰の“意外な共通点”「아침드라마 '옐(エール, Yell)' 첫 등장 시무라 켄씨와 야마다 코사쿠 씨의 '의외의 공통점'」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