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13:39:28

야마다 야스오

<colbgcolor=#5C5C5C><colcolor=#fff,#fff> 야마다 야스오
[ruby(山, ruby=やま)][ruby(田, ruby=だ)][ruby(康, ruby=やす)][ruby(雄, ruby=お)] | Yasuo Yamada
파일:enn2110200001-p1.jpg
출생 1932년 9월 10일
일본 제국 도쿄시 오모리구 미나미유키타니
(現 도쿄도 오타구 미나미유키타니)
사망 1995년 3월 19일 (향년 62세)
도쿄도 오타구 히가시유키야 도쿄도립 에바라 병원
국적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직업 성우, 배우, 사회자
신체 167cm, 55kg| A형
가족 양친, 배우자[1], 슬하 1남 1녀[2]
학력 와세다대학 (제1문학부 연극과 / 중퇴)
소속사 테아트르 에코 (최종 소속)
활동 시기 1953년 ~ 1995년 (배우)
1958년 ~ 1995년 (성우)
애칭 야스베에 (ヤスベエ)

1. 개요2. 생애
2.1. 초창기2.2. 루팡 3세2.3. 사망
3. 성격4. 출연작5. 기타6. 관련 문서7.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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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야마다 야스오.jpg
젊은 시절의 사진 중 하나. 루팡이랑 정말 닮았다.[3]
'루팡 3세'는 분명 내가 그린 만화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쇄된 책의 세계일 뿐이며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다. 그 점에서, 애니메이션화된 루팡 3세를 작품으로써 완성시켜 준 것은 야마다 야스오 씨다. 생기 넘치는 생명을 넣어주었다. 개성적인 성격, 움직임, 수다스러움, 그리고 강렬한 존재감은 야마다 씨가 없었다면 태어날 수 없었던 캐릭터다.
몽키 펀치 #
루팡은 야마다씨가 만든거니까요. 더 말하면 루팡의 80% 정도는 야마다 씨의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야마다씨가 술을 마시고 '후~자케가네~'라고 하던 그 가벼운 느낌이 루팡의 근원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걸 없앨 수는 없고 꼭 남겨 두고 싶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계속 존경합니다.
쿠리타 칸이치 #

일본 성우, 배우, TV 사회자.

TV 프로그램의 사회자로도 활동했으며 외화 더빙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더빙 전담 성우, 애니메이션으로는 ' 팬더와 친구들의 모험'이나 ' 우주의 기사 테카맨' 등의 작품에서 활동했으나, 무엇보다도 루팡 3세 루팡의 성우로써 가장 유명하다.

2. 생애

루팡 3세 야마다 야스오의 투쟁

2.1. 초창기

파일:EXc88YfWsAETDnT.jpg
데뷔 초창기의 야마다 야스오

1932년 9월 10일 도쿄 오타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영화를 즐겨 보았던 야마다는 오랫동안 희극 배우를 꿈꿔왔고, 1958년 극단 테어틀 에코에 입단한다. 그러나 당시 극단의 상황은 연극의 제작비를 배우들이 부업을 뛰며 벌어야 할 정도로 열악했으며, 당시 연극배우들이 가장 많이 하던 부업은 해외 드라마의 일본어 더빙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 성우라는 직업은 일반인들에게는 인지도가 매우 낮았으며, 배우들로부터는 성우가 아니라 "더빙 탤런트" 또는 "아테시(アテ師)"[4]라고 불리며 무시받기 일쑤였다. 이러한 경향이다 보니 야마다 본인도 "화면에 나오는 그림에 입을 맞춰서 일본어를 말하면 되는 거잖아?"라며 성우를 우습게 생각했고, 이러한 안이한 생각으로 외화 더빙 일을 하러 갔다가 리허설이 끝나자마자 '네 연기는 더빙에는 맞지 않는다'며 현장의 음향감독에게 해고당하고 만다.

야마다는 이에 충격을 받고, "성우도 연기를 한다는 점은 배우와 다를 것이 없다"고 자신의 안일했던 생각을 반성하며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배우와 성우를 겸업하며 꾸준히 활동하다가, 27살의 나이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더빙 역을 획득하여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야마다는 이후 사망하기 전까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일본어 전담 성우가 되었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본인이 일본에 방문했을 때 만남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인기를 끈 것과는 별개로 생활 사정은 굉장히 좋지 않았다. 당시 성우의 개런티는 굉장한 박봉이었으며, 나름 인기 성우로 자리잡은 야마다조차 월급 6000엔[5]밖에 받지 못하여 빵과 고로케만으로 연명하는 빈곤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래도 야마다는 성우를 그만두지 않았다.

2.2. 루팡 3세

파일:야마다 루팡.jpg
루팡 3세로 분장한 야마다 야스오

당시 루팡 3세의 성우는 파일럿 필름 제작 당시 루팡 역을 맡았던 히로카와 타이치로로 정해졌으나 그가 스케줄 문제로 하차를 선언한 이후, 1기 루팡의 감독을 맡았던 오오스미 마사아키가 우연히 한 연극 무대에서 야마다 야스오의 연기를 보고 루팡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다고 하며, 공연이 끝난 후 바로 야마다에게 가서 '루팡, 할래?' 라고 묻자 바로 '할래!'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야마다 또한 캐스팅 제의 전에 연기에 참고하기 위해 읽었던 루팡에 푹 빠져었었다고 한다.

야마다는 자신의 명함에 루팡의 얼굴을 새겨놓고 다녔을 정도로 루팡 3세 역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1기 시리즈 초반 시절의 하드보일드한 루팡의 이미지에 애착을 가져 간혹 스탭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었다. 1기와 칼리오스트로의 성 작화를 맡았던 오오츠카 야스오에 의하면, 칼리오스트로의 성 녹음을 진행할 당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작중 루팡의 연기에 대해 "이번 루팡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약간 쿨한 이미지로 부탁합니다"라고 지시하자 "이제와서 이러쿵저러쿵 잔소리 듣고 싶지 않아! 루팡은 내가 정한다고!"라고 거세게 반발했다가, 시사용 영상의 퀄리티에 감동하고 미야자키에게 머리를 숙이며 "방금 전엔 무례한 소리를 해서 죄송합니다. 뭐든 말씀해주세요. 몇번이고 다시 하겠습니다."라고 사과했다고 한다. 또한 자신에게 변고가 생기면 쿠리타 칸이치에게 차기 루팡의 성우를 맡긴다고 했다는 소문에 대해 아예 자기가 죽으면 루팡 3세란 캐릭터 자체를 묻어달라고 했다는 설이 반박으로 붙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루팡 3세를 자기의 분신으로 삼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

그러나 루팡 3세 풍마일족의 음모에서는 주역들의 성우가 전원 교체되면서 루팡 역에서 하차하게 되었는데, 이는 당시 제작사였던 도쿄 무비가 예산 부족으로 주역 성우들의 개런티를 지불할 수 없었기에 내린 결정이라고 한다. 원작자 몽키 펀치는 물론 반대했지만, "성우 본인들의 승낙을 받는다면 좋다"는 조건으로 이를 승낙했다. 그러나 성우 교체에 대해 야마다를 포함한 성우 5명은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으며,[6] 작품 발매 1년 후에야 이 작품에서 루팡을 연기한 후루카와 토시오에게서 진실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격노한 야마다는 그날 밤 술에 잔뜩 취해 몽키펀치에게 새벽 1시에 전화를 걸어 "이건 당신이 허가한 일이잖아!"라며 30분동안 분노를 쏟아내었고, 몽키펀치 본인은 이미 시간이 한참 지난 일이었기 때문에 어안이 벙벙했다고 한다. 다음날 진상규명을 위해 몽키펀치는 도쿄 무비를 찾아갔으나 당시의 관계자들은 이미 모두 도쿄 무비에서 퇴사한 상태였고, 이 사건 이후로 몽키 펀치는 애니업계를 불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성우교체 소동과 풍마일족의 음모가 흥행 및 평가에서 좋지 못한 성적을 기록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이후 제작된 TV 스페셜 시리즈부터는 원래대로 야마다가 루팡을 연기하게 된다. 몽키 펀치와 야마다는 이후 TV 프로그램에서 표면상의 화해를 했지만 이 사건은 야마다가 죽을 때까지 둘 사이의 미묘한 앙금이 되었다고 하며[7], 후에 몽키 펀치는 야마다의 부고 소식을 듣고 당시의 오해를 끝까지 풀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통곡했다고 한다.

훗날 후루카와가 밝히기로는, 당시 루팡 레코딩에 대해서는 철저히 입막음을 당했으며 사실은 (부담감에) 정말 루팡을 연기하기 싫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성우진이 교체된 것은 개런티의 문제도 있었지만, 애니메이션의 그림에 대해서 대단히 까다롭고 스스로가 감독인 양 현장을 지휘하려 하는 야마다의 깐깐한 성격을 스탭들이 부담스러워했다는 것이 더욱 큰 이유였다고 한다.

평소에도 루팡과 같이 익살스러운 성격이었다고 한다. 술자리에서 취해서는 갑자기 " 지겐과 통화시켜주마"라고 하더니 한밤 중에 코바야시 키요시에게 전화를 걸었던 적도 있다고.

야마다는 루팡 3세 Part III 종료 후에도 루팡이 계속해서 만들어질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Part III 최종화 수록 당시 제작진들이 작별의 메시지를 부탁하자 "어차피 그래놓고 새로운 걸 만들 거잖아? 그런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아."라는 말을 남긴 채 스튜디오를 떠났다고 한다. 결국 이 작별 메시지는 여성 아나운서가 방송 종료 소식과 함께 다시 만날 기회를 바란다는 내용의 방송 종료 때 흔히 붙는 형식적인 코멘트를 남기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2.3. 사망

파일:FOJRLdCaUAAwviF.jpg
사망 당시의 신문 기사
"루팡 3세 죽다 - 야마다 야스오 씨"[8]
" 잘 있으셔!! 제니가타 아재~!, 후지코 짱~!(좌)/ 성우라는 직업 개척 - 이스트우드 역 30년"(우)이다.]
영원한 루팡 3세 야마다 야스오 씨 고마워요
루팡 3세 뒈져라! 노스트라다무스 본편 종료 후 추모의 텔롭레터

1993년이 되자 건강이 악화되어 같은 해에 방송된 TV스페셜 루팡 3세 루팡암살지령에서는 체력 문제로 녹음이 끝난 후 휴식시간 때마다 너무나 지친 모습을 보여줬고, 도중부터는 결국 스스로의 요청으로 의자에 앉아 녹음을 진행했다. 평소 성우 일에 있어 "녹음은 서서 하는 법이다. 그러다 쓰러진다 하더라도 더할 나위가 없다." 라는 본인의 지론을 계속 고수하던 야마다였기에 그만큼 위화감이 더욱 컸다.

이때 야마다는 이미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내심 눈치챈 것인지, 루팡 암살지령의 녹음이 끝난 후에 감독이었던 오오스미 마사아키가 "다시 건강을 되찾아서 내가 만든 무대에 나왔으면 한다" 라고 제안해 왔을 때 평소에는 연기 제안이라면 무슨 일이든 기쁘게 받아들였음에도 그날만큼은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 채 돌아갔다고 하며, 같은 해 발매된 본인의 앨범 <루팡 3세・Tokyo Transit〜featuring YASUO YAMADA>를 제작한 후엔 앨범 제작자이자 루팡 3세 2기 TVA부터 계속 음악 담당을 맡아왔던 오노 유지에게 "빨리 다음 앨범을 만들자. 안 그러면 나 죽을 거 같아" 라고 가끔씩 전화를 해왔다고 한다. 이때 오노는 다른 작품의 음악 작업 등으로 많이 바쁜 상태여서 또 농담을 한다고 별로 신경쓰지 않고 넘어갔지만, 정말로 얼마 지나지 않아 야마다가 세상을 떠나자 야마다를 위해 다음 앨범을 제작해 주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1995년 1월 극장판 루팡 3세 뒈져라! 노스트라다무스 예고편과 당시 루팡을 이미지 캐릭터로 사용 중이던 ESSO 석유 CM의 녹음을 맡았고 이것이 야마다가 루팡을 연기한 마지막 작품들이 되었다. 한 달 후인 2월 17일, 야마다는 뇌출혈로 쓰러져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고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한 채 한 달 뒤인 3월 19일에 향년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직후 야마다를 추모하는 특집 방송이 루팡 3세의 방송국이었던 닛폰 테레비를 비롯한 각 방송사에서 진행되었으나, 하필 사망한 다음 날인 3월 20일에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 터지면서 대다수 방송사들이 곧바로 사린 사건 특종 보도에 들어갔기 때문에 야마다의 죽음은 그다지 크게 보도되지 않아서 며칠이 지나서야 그의 죽음을 알고 깜짝 놀란 팬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사후 나흘 뒤인 3월 23일 장례식이 치러졌고, 유해는 화장되어 도쿄의 타마레이엔에 봉안되었다. 당시 장례식에서 제니가타 코이치 역을 맡았던 나야 고로는 제니가타가 루팡을 야단 치듯 "어이, 루팡! 난 이제부터 누굴 계속 쫓아야 하느냐! 네가 죽으면 난 누굴 쫒아야 한단 말이냐?!" 라며 울면서 조서를 읽었고, 루팡 시리즈의 음악 담당이었던 오노 유지는 "야마다 씨가 아니면 루팡이 아니다." 라며 야마다가 죽은 이듬해인 1996년에 잠시 음악 담당에서 하차하기도 했다.

야마다가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고서부터 당시 루팡 3세의 원작자 몽키 펀치와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은 누구나 루팡 애니는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다고 하며 특히 몽키 펀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루팡을 맡으면 이미지가 달라지니 이대로 끝나도 좋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루팡 성대모사를 하기로 유명했고 생전부터 야마다 야스오와 교류가 있던 쿠리타 칸이치가 야마다의 후임으로 루팡을 이어 연기하게 되면서 루팡 시리즈는 야마다가 죽고 [age(1995-03-19)]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지게 된다.

3. 성격

여러가지 일화를 보면 루팡과도 같이 밝고 명랑한 성격이었지만, 동시에 자존심이 강하고 굉장히 성격이 불같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후배 성우 중 누군가가 더빙 중에 실수하기라도 하면 "이러니까 실력 없는 것들하고는 하고 싶지 않다니깐" 라며 투덜거리기도 했다고 하는 등, 후배들에게도 용서가 없었다. 같은 극단 소속 후배였던 카미야 아키라 역시 "무서웠던 선배"라고 회고했다.

유명한 일화로는 녹음 중에 화를 내고 스튜디오를 나가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애니메이션 더빙 시에는 스케줄 상 작화 제작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더빙을 먼저 할 때가 많았는데, 화면에 숫자만 나오고 그 타이밍에 맞추어 성우가 대사를 녹음하는 식이었다. 야마다는 이런 식의 더빙 작업이 이루어 질 때면 "그림이 없으면 난 그냥 가겠다"며 화를 내며 정말로 돌아가버리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일화에 대해서 루팡 3세에서 오랫동안 함께 공연한 나야 고로는 스탭에게 항의한 것은 사실이지만 "야스베에[9]가 진짜 돌아가버린 적은 한 번도 없다"며 부정했다. 또한 혼자 항의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항상 나야 고로에게 "그렇지? 고로상. (그림 없이는 연기) 못하겠지?"라며 동의를 구하곤 해서 나야 고로 역시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항의를 한 이유는 자신들은 그림이 없어도 녹음이 가능하긴 하지만 게스트로 온 성우에게 실례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인이 연기자라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성우로 호칭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한 인터뷰에서 본인을 성우라고 칭하자 "내가 슈퍼냐?"[10]며 빈정대기도 했다. 한 번은 젊은 신인 성우가 "루팡을 보고 성우를 꿈꿨습니다"라고 야마다에게 말하자, 야마다는 버럭 화를 내어 주변을 당황시켰다.

야마다 본인은 성우에 대해 "성우라는 직업은 존재하지 않으며, 연기자라는 카테고리 안에 성우 일이 있을 뿐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제니가타 코이치 역의 나야 고로 역시 마찬가지이며, 그 당시의 연극 배우 출신 성우들의 자부심 비슷한 것이었다고 한다. [11] 지금도 연극 배우 출신 성우들이 신인 성우들과 마찰을 빚는다는 이야기가 종종 들려오는 것 역시 이런 인식 차이가 가장 크다.

그러나 야마다 자신이 성우의 일을 멸시한다거나 했던 것은 전혀 아니다. 상술한 후배에게 화를 낸 건에 대해서도 "성우를 꿈꾸는 건 그만두도록 해. 하지만 연기자를 목표로 해서 그 일 중의 하나로 성우를 경험해본다면 괜찮겠지"라고 말했으며, "자신이 목소리로만 연기하는 직업이라는 편협적인 시각을 갖지 말고 온 몸으로 연기하는 연기자라는 인식을 잊지 말도록 해라"" 성우 일이라는 연기의 한 부분만 노려서는 연기자로써 성공할 수가 없다"라는 의도에서 화를 낸 것이었다. 위의 일화에서 보듯, 앞에서 언급한 본인의 지론에 따라 야마다는 늘 신인 연기자들을 지도할 때 " 성우를 지향하지 말고 연기자를 지향해라. 연기란 온 몸으로 하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성우의 일 또한 살아날 수 있는 길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비록 그 자신은 성우라 불리는 것을 싫어했지만, 야마다 야스오는 당시 똑같은 녹음 일을 해도 배우들에 비해 한참 낮은 급여를 받는 불평등한 처우에 놓여 있던 성우들의 출연료 협상에 가장 먼저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서는 등 성우로서는 거의 처음으로 성우업계의 처우 개선에 적극적으로 행동했던 인물이었으며, 이러한 행적으로 일본에서는 성우 업계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

또한 스스로에게도 엄격한 성격이었기에, 동료이자 친구였던 나야 고로에 의하면 평소에는 의외로 소극적이고 일을 하기 싫어하는 등 의욕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일단 녹음을 시작하면 단 한 번의 실수 없이 완벽하게 녹음을 끝냈다고 한다. 말년에 건강이 나빠져서 장시간 선 채로 녹음을 하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 되자 루팡암살지령 녹음 당시 스탭들이 야마다를 배려하여 앉아서 녹음을 하도록 권했으나, "더빙은 서서 해야지"라며 몸이 버티지 못할 때까지 계속 서서 녹음을 했다고 한다.

4. 출연작

5. 기타

  • 본 영상의 영화는 더티 해리다. 그 유명한 명대사 "운에 맡겨라, 이 양아치 자식아!"는 "운이 좋으면 말이지. 자, 어쩔 거냐?(運がよけりゃな。さぁ、どうする?)"로 번역되었다.

  • 1979년 성우 올스타즈에 출연한 모습.

  • 그가 부른 루팡 3세의 테마곡. Memory of Smile.
  • 야마다 사후에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타다노 요헤이가 전담으로 더빙하고 있는데, 쿠리타 칸이치의 루팡3세가 '루팡을 연기하는 야마다의 연기 톤'과 거의 똑같다면 타다노의 이스트우드 연기는 '야마다의 평소 음성 톤'과 굉장히 비슷하게 들린다. 비교해서 들어보면 야마다와 타다노의 이스트우드 연기는 거의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이다.
  • 세계에서 최초로 CD게임의 성우를 담당했고 기네스북에도 등재가 되어있다.

6. 관련 문서

7. 외부 링크



[1] 1965년 결혼 [2] 장남 야마다 히로야스는 연예계 작가로 활동중이다. [3] 야마다는 풍모나 행동까지 루팡과 비슷해, 항상 캐릭터와 일심동체의 이미지로 안방에 알려져 있던 예의 하나이다. 생애 자체가 메소드 연기 [4] 일본어로 (영상에) 목소리를 '입히다'라는 표현을 アテる(아테루)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아테시'라는 표현은 성우를 배우가 아니라 영상에 목소리를 입히는 잡일을 하는 장사꾼마냥 멸시하는 의미를 담은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성우가 아니라 변사 취급을 한 것. [5] 참고로 당시 일반 신입회사원의 평균 월급이 12000엔이었다. [6] 특히 야마다는 본인이 자신 이외의 루팡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연락을 하지 않았을지도. [7] 몽키 펀치는 몽키 펀치 나름대로 명백한 제조사의 잘못인 일을 가지고 자신한테만 분노를 쏟아내는 야마다에게 기분이 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8] 아래의 서브 타이틀은 각각 [9] 나야 고로가 종종 부르던 야마다 야스오의 애칭. [10] 월마트의 일본 자회사 세이유와 성우의 일본어 발음이 동일한 것을 이용한 말장난성 조롱. [11] 사실 1대 루팡 3세 성우진 대다수가 연극 배우 출신이라, 성우라는 직업에 대한 인식이 비슷한 편이다. 다만 야마다 같은 경우, 이들 중에서도 기가 세고 불같은 편이라 대놓고 저렇게 비꼬았을 뿐. [12] 몬티 파이튼의 비행 서커스부터 라이프 오브 브라이언까지. 이후 비행 서커스 VHS판에도 그의 음성이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