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1b><colcolor=#ffffff> Henri Ciriani 앙리 시리아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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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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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6년 12월 30일 ([age(1936-12-30)]세) |
페루 리마 | |
직업 | 건축가, 대학교수, 화가 |
영향 | 르 코르뷔지에 |
장르 | 모더니즘 |
분야 | 주거, 미술관,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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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리 시리아니(Henri Ciriani)는 페루 태생의 프랑스에서 활동한 건축가이자 교수이다. 당시 쇠퇴하던 모더니즘 건축의 르네상스를 이끈 건축 이론가이자 실무자이다[1].르 코르뷔지에의 모더니즘 건축의 궤를 이어가는 세계적인 건축가로 미국에 리처드 마이어가 있었다면, 유럽에는 앙리 시리아니가 있었다. 시리아니는 건축학교에서 수 많은 후배 건축가들을 양성했으며, 그에게 직접 지도를 받았거나 그의 제자에게서 지도를 받은 한국 건축가들[2]도 많다.
2. 생애
앙리 시리아니는 1936년 리마에서 태어나 1975년에 프랑스 국적을 얻고 건축가이자 교수로 활동하였다. 매우 어린 나이에 페루에서 성공적인 건축가로 시작했다. 수백 개의 사회주택을 건설한 공무원이자 건축회사에서의 활동으로 이름을 알렸다. 27세에 프랑스로 이주하였다.앙리 시리아니의 젊은 시절 모습
앙리 시리아니와 르 코르뷔지에
1968년부터 1982년까지 그는 Atelier d’Urbanisme et d’Architecture(AUA)의 구성원이었다. 이 시기에는 누아지 르 그랑(Noisy-le-Grand), 생 데니(Saint-Denis), 마른 라 발레(Marne-la-Vallée)에서의 사회주택 프로젝트, 생 안투안 병원의 부엌, 그리고 생 데니의 화덕 주변 유치원과 같은 프로젝트들이 진행되었다. 1983년 'Le Moniteur' 잡지가 수여하는 첫 번째 '은색 각도상(Silver Square)'을 받았으며, 같은 해 프랑스 문화부로부터 건축그랑프리(Grand Prix National d'Architecture)을 수상하였다.
80년대에는 아를 고대 박물관(Musée de l’Arles Antique;1983-1995), 페론 전쟁박물관(Historial de la Grande Guerre, Péronne; 1987-1992) 공모에서 우승하였고, 파리의 에브리(Evry), 로그네스(Lognes), 콜롱브(Colombes), 샤르코 거리(la rue Charcot), 베르시 공원(le Parc de Bercy), 크룰레바르브 거리(la rue Croulebarbe)에서 주택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였다. 페루에서는 라 빅토리아(La Victoria)와 산 미겔 데 피우라(San Miguel de Piura) 시내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리마 해변가의 주택 중 하나는 페루 건축가 협회에서 "El Héxagôno de oro"상을 받았다.
앙리 시리아니는 프랑스와 페루에서 건축을 가르쳤다. 1972년부터 1977년까지 파리 제7대학교의 시리아니-마로티 아뜰리에(Atelier Ciriani-Maroti)에서 가르쳤다. 그 후에는 파리 벨빌 국립건축학교의 전신인 파리 제8대학교에서 U.N.O 그룹을 창설했다(1977-2002). 그는 여러 학교와 대학에서 강사로 활동하며 수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강의하는 앙리 시리아니
1997년에는 미국예술과학학회(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에서 the Arnold W. Brunner Memorial Prize을 받았으며, 2000년에는 영국건축가협회에서 명예회원(honorary fellow)로 선정되었다. 그는 여러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출판되었으며, 그에 관한 여러 책들이 출판되었다.
2021년에 프랑스 건축계의 최고영예인 건축그랑프리(Grand Prix National d'Architecture)를 다시 한 번 수상하였다. #
2021년 두번째 프랑스 건축그랑프리를 수상한 앙리 시리아니
3. 평가
프랑스 건축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힘
"나는 앙리 시리아니를 알게 되어 기뻤던 기억이 있다. 당시 그는 젊었고, 지금도 젊으며, 그의 프로젝트는 언제나 젊다. 그는 공공주택 전문가이며 주택을 사랑했기에 그의 주요 작업은 공공 부문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현재 프랑스 건축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힘 중 하나로서, 최근 박물관 영역으로 그의 실무를 확장하였다.
그의 모든 건축에는 많은 영역에서 실험적인 시도를 하는 매우 진지한 남자의 흔적이 있다. 그의 형태와 기하학에 대한 관심은 프로그램의 기능과 관련이 있으며, 그의 동선 표현은 접근성과 유동성을 선호하는 모더니즘 원칙을 준수한다. 그의 작품의 대부분에는 중심이 있다. 그가 설계한 건축물에서 활동의 중심은 그의 건축의 핵심인 빛을 통해 입체적으로 그리고 서정적으로 표현된다. 그의 공간을 침투하는 흥미로운 색상들은 그의 작품의 개성을 높인다. 그의 건축언어의 구성은 땅과 하늘로부터 나오며, 공간에 대한 상징적 해석에서 나온다."
리처드 마이어 (Richard Meier)
『앙리 시리아니 (세계의 현대 건축가들)』 추천사 중에서
"나는 앙리 시리아니를 알게 되어 기뻤던 기억이 있다. 당시 그는 젊었고, 지금도 젊으며, 그의 프로젝트는 언제나 젊다. 그는 공공주택 전문가이며 주택을 사랑했기에 그의 주요 작업은 공공 부문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현재 프랑스 건축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힘 중 하나로서, 최근 박물관 영역으로 그의 실무를 확장하였다.
그의 모든 건축에는 많은 영역에서 실험적인 시도를 하는 매우 진지한 남자의 흔적이 있다. 그의 형태와 기하학에 대한 관심은 프로그램의 기능과 관련이 있으며, 그의 동선 표현은 접근성과 유동성을 선호하는 모더니즘 원칙을 준수한다. 그의 작품의 대부분에는 중심이 있다. 그가 설계한 건축물에서 활동의 중심은 그의 건축의 핵심인 빛을 통해 입체적으로 그리고 서정적으로 표현된다. 그의 공간을 침투하는 흥미로운 색상들은 그의 작품의 개성을 높인다. 그의 건축언어의 구성은 땅과 하늘로부터 나오며, 공간에 대한 상징적 해석에서 나온다."
리처드 마이어 (Richard Meier)
『앙리 시리아니 (세계의 현대 건축가들)』 추천사 중에서
오늘날 마지막 모더니스트
"나는 앙리 시리아니에게 진 빚이 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여유롭게) 건축학교에 입학했지만, 군인과 같은 수도승이 되어 나올 수 있었다. 사람들은 종종 앙리 시리아니가 도사(guru)였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는 강의가 아닌 설교를 했다. 1968년 5월 이후 그는 르 코르뷔지에의 모더니즘을 건축론에 다시 도입했는데, 당시는 르 코르뷔지에의 작품집이 할인된 가격으로 서점에 진열되어 있던 시기였다.[3]"
"앙리 시리아니는 사회주택을 위한 건축을 주장했다. 그의 사회주택은 기차역이나 오페라처럼 새로 지을 도시 중심에 있는 도시 풍경의 중요한 기념물이 되어야 했다."
"이론가, 실무자, 그리고 화가로서, 앙리 시리아니는 그의 시대에 큰 영향을 미친 완전한 인물이다. 그는 오늘날 마지막 모더니스트 중 한 명이다."
베르나르 데스물랭 (Bernard Desmoulin)
2021 건축그랑프리 비평 중에서
"나는 앙리 시리아니에게 진 빚이 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여유롭게) 건축학교에 입학했지만, 군인과 같은 수도승이 되어 나올 수 있었다. 사람들은 종종 앙리 시리아니가 도사(guru)였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는 강의가 아닌 설교를 했다. 1968년 5월 이후 그는 르 코르뷔지에의 모더니즘을 건축론에 다시 도입했는데, 당시는 르 코르뷔지에의 작품집이 할인된 가격으로 서점에 진열되어 있던 시기였다.[3]"
"앙리 시리아니는 사회주택을 위한 건축을 주장했다. 그의 사회주택은 기차역이나 오페라처럼 새로 지을 도시 중심에 있는 도시 풍경의 중요한 기념물이 되어야 했다."
"이론가, 실무자, 그리고 화가로서, 앙리 시리아니는 그의 시대에 큰 영향을 미친 완전한 인물이다. 그는 오늘날 마지막 모더니스트 중 한 명이다."
베르나르 데스물랭 (Bernard Desmoulin)
2021 건축그랑프리 비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