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키아 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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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키아 Principatus Antioche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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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 |||||
수도 | |||||
안티오키아 (1098–1268) | |||||
국토 | |||||
1098년 ~ 126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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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안티오키아 | ||||
정치 | |||||
정치 체제 | 봉건 군주제[1] | ||||
국가 원수 | 공작 | ||||
주요 공작 |
보에몽 1세 (1098–1111) 레몽 (1136–11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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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환경 | |||||
종교 |
국교
로마 가톨릭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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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
이탈리아인, 프랑스인, 그리스인, 아랍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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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 DEUS VOLT [2] | ||||
공용어 |
라틴어, 중세
이탈리아어, 중세 프랑스어, 중세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아람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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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용 문자 | 로마자 | ||||
통화 | 데니르, 디나르[3], 베잔트[4] | ||||
인구 |
1098년 성 내외 4~5만 13세기 말 성내 4만, 성외 총합 10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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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사건 | |||||
1098년
제1차 십자군 원정 중 건국 1119년 아제르 상귀니스(피의 들판) 전투 1126년 보두앵 2세의 섭정 1138년 요안니스 2세의 정벌 1146년 마누일 1세의 친정 1191년 누르 앗 딘의 침공 1268년 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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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 이전 |
동로마 제국 셀주크 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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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 이후 | 맘루크 왕조 |
언어별 명칭 | ||
라틴어 | Principatus Antiochenus | |
프랑스어 | Principauté d'Antioche | |
중세 그리스어 | Κύριο Αντιόχεια | |
아랍어 | إمارة أنطاكي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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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티오키아 공국은 십자군들이 서아시아 지역에 세운 국가 중 하나로, 오늘날 시리아 이들리브 주와 라타키아 주, 터키 하타이 도 지역에 위치했던 국가였다.2. 공국의 성립
2.1. 배경
1097년, 제1차 십자군 원정으로 구성된 4만의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출발하여 니케아를 점령, 도릴라이온에서 룸 술탄국 군대를 궤멸시키고 계속해서 남하하기 시작했다. 안티오키아의 이슬람 제후 야기 시안과 다마스커스의 영주가 이끄는 2만여의 지원군이 안티오키아의 십자군을 역포위했지만, 십자군은 이를 물리쳤다. 1098년이 되자, 안티오키아를 포위하는 십자군의 병력은 2만 남짓만이 남게 되었다. 장기적인 포위공격으로 기아와 가난에 시달리던 십자군은 조금씩 이탈을 시작하여, 동쪽으로는 보두앵 1세가 에데사 백작령을 건설하였고, 시칠리아의 탕크레드는 킬리키아의 타르수스를 점령하게 된다.십자군이 하나둘씩 동방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십자군의 지도자 중 하나였던 타란토 공작 보에몽은 안티오키아를 자신의 영지로 만들 야망을 가지기 시작하였다.[5] 이를 위해서 그는 적과 아군을 향해 거대한 야망을 키우기 시작했다.
2.2. 보에몽, 큰 그림을 그리다
보에몽 1세 |
첫 번째 상대 레몽 4세는 십자군에서 가장 큰 병력을 지원한 최대주주였으며, 경건한 고드프루아 드 부용에 비해 영토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교황 대리인 아데마르 주교와 교황군을 호송한 실질적인 십자군의 리더였으며, 안티오키아 공방전에도 전력을 다하는 중이었다.
두 번째 상대 알렉시오스 1세는 안티오키아의 원 소유주로서, 안티오키아에 대한 정당한 소유권을 가진 군주였다. 명목상으로 모든 십자군은 동방의 황제인 알렉시오스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점령 영토를 돌려주기로 서약한 바가 있었다. 알렉시오스 또한 예루살렘과 그 일대의 지방은 십자군에게 양도할 생각이 있었으나, 거대하고 부유한 상업도시인데다가 겨우 십수년 전까지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안티오키아는 서방 십자군에게 내 줄 생각이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알렉시오스 1세가 니케아를 수복하면서 항복한 룸 술탄국 병사들과 신민들을 돌려보내주고 약탈을 금지한 것을 시작으로, 그와 서방 십자군의 사이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십자군 전사들은 알렉시오스와의 약조를 지킬 생각이 없었고, 그들과의 조약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은 동로마 해군이 지원하는 약간의 식량과 타티키오스가 이끄는 2000여 명의 정예군뿐이었다.
1098년 1월, 보에몽은 안티오키아의 성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얻게 되었다.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믿는 기독교인 수비대장 피루스가 그에게 귀순하여 문을 열어주기로 한 것이었다. 이로서 안티오키아 점령은 확정된 것이었으나, 보에몽에게는 안티오키아가 그의 영지가 되어야 한다는 보상이 필요했다. 그는 신중하게 피루스의 귀순을 숨기고, 다른 십자군 영주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첫 번째로 그가 공략한 상대는 타티키오스였다. 이미 불신의 대상이 되었던 동로마군은 같은 십자군 영주들을 매우 경계하고 있었는데, 보에몽은 그러한 타티키오스의 심리를 노렸다. 그는 타티키오스의 군영으로 찾아가 레몽을 비롯한 십자군 영주들이 그를 살해하려 한다는 모략을 거짓으로 꾸며 전달했다. 이미 십자군을 의심하고 있었던 타티키오스는 그 길로 동로마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치듯 떠났다.
타티키오스의 퇴각은 십자군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되었다. 영주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떠나버린 동로마군을 비난했다. 안티오키아 포위가 무산될 위기에 처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 보에몽은 영주들에게 마지막 일제 공격을 제안했다. 대부분의 십자군 영주들은 그의 제안을 반대했지만, 자신과 자신의 병력이 선봉에 서겠다고 주장한 보에몽을 한번 믿어 보자는 의견이 조금씩 대두되기 시작했다. 보에몽은 그 엄청난 리스크를 떠안는 대신 레몽과 다른 십자군 영주들에게 이번 돌격이 승리하면 안티오키아의 소유권을 이양해달라는 조건을 걸었다. 레몽과 일부 십자군은 알렉시오스 황제와의 조약을 상기시키며 거부했으나, 이미 떠나버린 동로마군에 대한 책임론이 비화되며 묵살되었다.
2.3. 롱기누스의 창
5월경, 모술의 영주 카르부카와 메소포타미아, 시리아의 제후들이 연합한 이슬람 군대는, 십자군을 집어 삼킬 기세로 이미 에데사 백국의 보두엥의 성채를 두드리고 있었다. 상황은 절망적이었고, 블루아의 스테판과 같은 영주들은 무슬림 대군이 오기 전에 탈주를 결정하기까지 한 상황이었다. 결국 대부분의 영주들은 보에몽의 조건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보두엥이 버티는 동안 안티오키아를 점령하지 못하면, 십자군은 전멸할 판이었다.6월 2일, 이미 준비를 마친 수비대장 피루즈는 '두 처녀의 탑' 이라고 이름붙여진 수비탑의 문을 열어 보에몽의 군대를 맞이했다. 수만의 십자군이 잔뜩 독이 올라 야기 시안의 군대를 박살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수천의 안티오키아 주민들은 굶주린 십자군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어 학살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기독교도였던 안티오키아의 주민들은 십자군을 우호적으로 생각했다. 심지어 안티오키아의 기독교도 주민들은 도망치는 야기 시안의 목을 베어 보에몽에게 헌상하기까지 하였다. 3일이 되자, 성 내의 무슬림들은 거의 전멸하고, 오직 중앙 모스크에서 농성하는 수비군 잔당만이 남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십자군에게는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데사를 공성하고 있던 카르부카의 병력이 안티오키아의 함략 소식을 듣고 수복을 위해 에데사를 포기하고 바로 안티오키아로 향한 것이다. 오랜 포위 덕에 안티오키아 내에도 식량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십자군은 식량도 없는 채로 시체를 먹어가며 포위를 견뎌야만 했다.
하지만 6월 10일경, 기적이 일어났다. 민중 십자군의 지도자 - 혹은 다른 인물인 피에르 바르톨로메라고도 하는 - 은자 피에르가 안티오키아의 옛 성당에서 롱기누스의 창을 찾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보에몽은 진위 여부에 대해 회의적이긴 했지만, 이 창으로 인해 사기가 충천한 기사들을 최대한 이용해보기로 했다. 6월 28일, 수백명의 십자군 기사들은 성창을 앞세우고 안티오키아를 포위하고 있던 카르부카의 진지를 향해 돌격했다. 여러 제후들이 연합하여 지휘체계가 불확실했던 무슬림 군대는 갑자기 튀어나온 십자군 기병대의 기습에 무방비로 노출되었고, 수천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하였다. 패배한 무슬림 제후들은 실질적인 십자군의 지도자였던 레몽이 아닌, 안티오키아의 영주인 보에몽에게만 항복 문서를 보내왔고, 이는 십자군 내에서 보에몽이 안티오키아의 영주로서 공인되는 효과를 낳았다. 레몽은 전승의 공으로 야기 시안의 궁전을 가져갔지만, 궁전을 제외한 모든 지역은 보에몽의 것이었다.
그 사이 안티오키아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간 블루아의 스테판은 전후상황도 듣지 못한 채로 십자군이 거대한 숫자의 무슬림에게 역포위되었으며, 아마 전멸하였을 것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알렉시오스 1세에게 전달했다. 타티키오스의 후퇴 이후, 친정하여 안티오키아 포위를 주도하려고 하였던 알렉시오스는 블루아의 스테판이 전달한 틀린 서신으로 인해 자신의 계획을 단념하게 되었다.
안티오키아가 안정화되자 고드프루아와 레몽을 따라온 프랑스의 프랑크인들은 십자군을 이어나가 예루살렘으로 향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남이탈리아에서 온 노르만족 출신의 기사들은 그들의 지위를 보전해 줄 보에몽을 따라 계속 안티오키아에 남기를 바랐다. 결국 고드프루아와 레몽이 이끄는 1만 2천여 명의 십자군은 남하하였고, 1099년 3월에 그들이 떠나자, 보에몽은 안티오키아의 공작을 자처했다. 바야흐로 안티오키아 공국이 성립된 것이다.
2.4. 보에몽의 몰락
하지만 신생 공국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안티오키아 북쪽에는 다니슈멘드 왕조가, 동쪽에는 모술과 알레포의 무슬림 제후들이 십자군 국가를 노리고 있었던 데다가, 주변의 동맹국인 예루살렘 왕국과 에데사 백국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힘이 벅찼고, 그나마 그들을 도울 여력이 되는 동로마 제국은 안티오키아를 제국 땅에 반환하라고 꾸준히 주장하고 있는 중이었다.거기에 더해, 안티오키아 공국의 인구는 무슬림들까지 전부 모아 봐야 4만~5만여에 지나지 않았고,[6] 기독교도들도 대다수가 십자군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거나, 동로마 제국에 호의적인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시리아 정교회, 동방 정교회 출신이었다.[7] 가톨릭을 믿는 인구는 지배층인 십자군 병사들 소수에 불과했다.
내우외환을 타개하기 위해 보에몽은 최대한 많은 노르만족들과 프랑크인을 안티오키아 공국으로 불러들이기로 했다. 이 당시 보에몽의 명령 하에 그의 연대기를 담은 '게스타 프랑코룸'이 작성되어 낭만주의에 빠진 많은 십자군들을 안티오키아에 정착하도록 유혹하였다. 또한 정통 기독교의 수호자를 자처한 보에몽은 당시까지 정교회의 관할이었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직을 빼앗아 라틴 총대주교좌를 설립하였다. 이렇듯 조금씩 공국이 안정되고 주변의 이슬람 세력들이 정리되자, 안티오키아 공국의 인구수와 병력은 늘어나기 시작했다. 겨우 수천의 노르만 기사들로 유지되던 공국의 병력은, 나중에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만 수천여 명의 병력을 부릴 수 있을 정도로 올라갔고, 인구수도 동로마 제국 시기의 전성기 수준은 아니었지만, 10만가량으로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8]
상황이 호전되자 보에몽이 처음으로 노린 지역은 아르메니아 왕국이 들어설 킬리키아 지역이었다. 그곳은 당시 다니슈멘드 왕조와 동로마 제국의 잔당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두 거대 세력의 경합 아래에서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믿는 소영주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1100년, 보에몽의 조카 탕크레드가 점령한 안티오키아 공작령 타르수스 지방에 아르메니아인들의 구원 요청이 들어왔다. 다니슈멘드 왕조의 병력들이 타우루스 산맥의 전술적 요충지 멜리테네의 영주를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멜리테네는 타우루스 산맥을 통제할 수 있는 주요 관문이었고, 만일 이곳을 차지한다면 킬리키아 내부에서 겨우 몇 개 도시와 항구만을 가지고 있었던 보에몽의 영향력을 늘릴 수 있는 기회였다. 보에몽은 겨우 수백의 기사대와 천여 명이 갓 넘는 보병대만을 이끌고 무모하게 멜리테네를 구원하러 갔다. 멜리테네에 거의 도착한 상황에서 다니슈멘드 왕조의 대군이 그들을 덮쳤고, 1100년 8월 그는 포로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유명한 보에몽 경매가 시작되었다. 주요 입찰자는 총 3명. 즉위하자마자 그에게 털리고 충성서약에 대해 배반까지 당했던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 니케아를 눈뜨고 빼앗기고 도릴레온에서 보에몽의 침착한 지휘에 대패하고 물러났던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그리고 사로잡힌 보에몽 본인(...)이었다. 각 군주들의 입찰가는 다음과 같다.
알렉시오스 1세: 현찰박치기로 26만 디나르
킬리지 아르슬란: 13만 디나르와 휴전 협약[9]
보에몽: 13만 디나르와 군사적 협력[10]
다니슈멘드 술탄은 보에몽의 제안을 채택하였고, 보에몽은 석방되자마자 즉시 안티오키아로 돌아가 자신이 없는 사이 안티오키아의 공작 노릇을 하며 자신의 석방을 방해하던 조카 탕크레드를 축출하고 10만 디나르를 신민들에게 짜내 납부하여 다시 레반트의 주요 영주로 복귀하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세력이 커졌다고 생각한 보에몽은 커다란 오판을 하고 말았다. 1081년에 그랬던 것처럼,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약탈하여 영토를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만 것이다. 그는 1104년에 자신의 고향이었던 남이탈리아에서 노르만 기사들을 모아 안티오키아에 귀속시켜 병력을 증편하고, 1081년에 황제 알렉시오스 1세를 이겼었던 디라히온에서 다시금 그와 맞닥뜨렸다. 하지만 30년만에 제국은 지중해 최강 타이틀을 회복한 상태였고, 보에몽은 잘 훈련된 동로마 제국의 군대를 이길 수 없었다.
1108년 보에몽은 디라히온에서 동로마군에게 대패, 동로마에게 안티오키아를 이양하겠다는 데볼 조약을 맺고 남이탈리아로 도피했다. 비록 안티오키아는 탕크레드의 술수 덕분에 동로마에게 빼앗기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잃은 보에몽은 실의에 빠져 1111년에 죽었다.
3. 루지에로의 섭정기
3.1. 보에몽의 사후
보에몽이 패배하고 실권을 잃은 1108년, 탕크레드는 이제서야 염원하던 공작위를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에데사 백국의 보두앵 2세가 포로로 잡혀 있는 상황을 십분 활용하여 살레르노의 루지에로를 백국의 섭정으로 앉히고 에데사를 안티오키아의 봉신국으로 만들려 하였다. 그러나 1108년 말에 보두앵이 복귀하자 두 십자군 국가의 상황은 전쟁까지도 불사할 지경으로 치닫았다. 탕크레드의 상승세를 막아내려는 가톨릭 교회와 동로마 제국의 견제로 안티오키아 공국은 결국 에데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11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주변의 아르메니아 영주들과 십자군, 동로마 제국을 막론하고 모든 세력을 건드리며 안티오키아의 세를 꾸역꾸역 불려나갔다.공국의 행방은 보에몽의 어린 아들이자 남이탈리아 타란토의 공작인 보에몽 2세에게 넘어갔다. 아직 4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공작을 대신해, 탕크레드의 조카인 살레르노의 루지에로(Roger of Salerno)가 안티오키아 공국을 섭정으로서 다스렸다.
3.2. 살민 전투
1114년 말, 강진이 안티오키아를 덮치고 공국을 지켜주던 성벽들이 붕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가 막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는 바그다드의 셀주크 튀르크 술탄들에게 약점을 보이는 상황이 되었다. 이미 1115년대 들어서 부르수크라는 장군이 이끄는 투르크군이 안티오키아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셀주크 튀르크에게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루지에로는 선제 공격을 감행하기로 한다. 먼저 그는 셀주크 튀르크와 주변 무슬림 영주들을 이간질하여 그의 원정을 지원하게 하거나 최소한 묵인하게 만들었다. 알레포의 이슬람 영주 루루는 그와 암묵적 평화조약을 맺었고, 셀주크 튀르크와 척을 지고 있던 다마스쿠스의 영주와 아미르 일 가지는 수백 명의 이슬람 전사들을 그에게 지원하기까지 했다. 2,000명의 보병-기병 혼성편제된 군대와 이슬람 지원군, 거기에 수천에 이르는 예루살렘 왕국 지원군까지 등에 업은 그의 군대의 숫자는 정확히 1만 700명이었다고 기록된다.수십 킬로미터의 강행군 속에 그들은 북시리아의 샤이자르, 하마 등의 셀주크 튀르크 촌락을 기습해 약탈하였고, 요격차 등장한 부르수크의 대군이 물을 찾으러 시리아의 살민 지역으로 이동하자, 연합군은 20km에 가까운 완벽한 기동을 통해 그들을 격멸했다. 좌익의 기병대의 돌격과, 이슬람 동맹군의 궁병 카운터로 2,000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낸 셀주크군은 최소한 몇 년간 십자군 국가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안티오키아는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
3.3.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
1117년 안티오키아 공국은 주변의 이슬람 소영주들을 흡수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루지에로는 아자즈 지방을 점령하고 주변 토착 기독교 촌락을 선무했다. 아직까지 알레포 영주 일 가지와의 동맹은 유효했지만 결국 1119년에 루지에로와 라틴 총대주교 베르나르도는 알레포로 향하는 관문인 아르타 성채를 점령하며 동맹국 알레포 영주 일 가지를 통수치고 말았다. 자신의 동맹자가 배신을 때리고 알레포를 습격할 것이 확실시되자, 일 가지는 다마스쿠스의 아미르 토그테긴을 위시한 영주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라틴 총대주교 베르나르도는 튼튼한 성채인 아르타를 거점으로 다가오는 예루살렘 왕국의 대규모 지원군을 기다리자고 주장했지만, 루지에로는 통수를 치고 싶은 마음에 신중한 전략을 포기하고 알레포를 향한 강행군을 시작했다. 결국 두 군대는 쌍방 지원군을 받지 못하는 상태로 맞붙게 되었다.
안티오키아 공국의 병력은 700여 명의 노르만인 기사와 500여 명의 아르메니아 왕국 중기병 3,000여 명의 중보병, 거기에 상당한 수의 투르코폴레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일 가지의 병력은 추산하기 힘들다. 기록상으로는 4만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 그러했다면 겨우 5~6천에 불과한 안티오키아 군을 상대로 지원군까지 요청하며 후퇴하고있는 절박한 상황이었을 리가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역사가들은 실제 병력이 1만~8천 남짓한 병력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119년 6월 23일, 밤이 되자 루지에로는 주변으로 진입하는 통로가 적어 포위하기 어려운 사르마다 지역에 진지를 구축했다. 하지만 일 가지는 현지 양치기들이 알려준 옛 길로 루지에로의 부대를 포위했다. 하지만 안티오키아의 장궁병들과 이슬람 용병 궁기병대의 화살비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진짜 비극은 다음 날인 24일 벌어졌다.
24일 아침, 두 군대는 회전을 벌였다. 전투 초반, 안티오키아 장궁병들의 탄막과 노르만 기사대, 이슬람 경기병들의 좌익 돌파로 전투는 쉽게 루지에로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일 가지의 알레포군은 돌파당한 상태로도 전열을 유지해 역습을 가할 타이밍을 벌었다. 일 가지의 궁기병들이 적의 후미로 기동해 피해를 입히며 혼란을 주자, 전투의 행방은 알 수 없어졌다.
전투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이슬람군도 십자군도 아닌 바로 모래바람이었다. 강력한 북풍이 안티오키아군을 덮쳤고, 기사들과 보병대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모래가 그들을 휘감았다. 보병 진열이 흐트러지자, 일 가지의 군대는 일제히 돌격해 안티오키아군을 섬멸했다. 루지에로와 안티오키아군은 말 그대로 전멸. 단 2명의 기사만이 탈출해 비보를 전할 수 있었다.
4. 보에몽 2세의 치세
4.1. 즉위 이전
아르타에 있던 라틴 총대주교는 안티오키아로 복귀해 방어전을 준비했다. 성안의 병력은 겨우 수백에 불과했고 기사는 이전 전투에서 살아남은 두 명뿐이었다. 하지만 일 가지는 안티오키아를 공성하지 않았다. 승전 축하주가 과한 나머지, 앓게 된 일 가지는 보두앵 2세가 이끄는 대군이 안티오키아를 구원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8월 초, 보두앵 2세의 예루살렘 왕국군은 일 가지의 이슬람군과 안티오키아 근교에서 맞붙어 대승을 거둔다.당장 안티오키아 공국의 작위가 공석인 상황에서,[11] 라틴 총대주교 베르나르도는 보두앵 2세를 안티오키아의 섭정으로 임명해 공국의 안정을 꾀했다. 예루살렘 왕국의 지원하에 공국은 안정을 되찾았고, 보두앵 2세는 주둔시킨 700명의 기사와 수천의 보병을 진주시켜 안티오키아의 전력을 강화했다.
4.2. 에데사 백국과의 불화
1126년, 19살이 된 보에몽 2세는 수천의 노르만 병사들과 함께 우르트메르로 돌아왔다. 보두앵 2세는 장성한 보에몽에게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기 위해 딸 알리스를 보에몽에게 시집보냈다. 둘은 콩스탕스라는 딸을 낳았다. 타란토와 안티오키아를 지배하는 이 대공은 아버지와 똑같은 성미를 이어받아 주변 이슬람 토후, 동로마 제국과 아르메니아 왕국 다니슈멘드, 심지어는 인근 기독교 촌락까지 약탈하며 악명을 쌓았다. 그는 고국에 도착한 그해에 샤이자르와 카푸르텝의 많은 촌락을 빼앗고, 이듬해인 1127년, 에데사 백작 조슬랭의 영토 아자즈를 점령했다. 라틴 총대주교의 중재와 조슬랭의 와병을 이용해 에데사의 땅을 굳힌 보에몽 2세에게도 악재가 찾아왔다. 그의 사촌인 시칠리아의 루지에로[12]가 보에몽의 남이탈리아 영토를 공략, 타란토와 브란디시 등 그의 알토란땅을 모두 점령한 것이다.4.3. 연이은 통수가 죽음을 부르다
여기서 겪은 피해를 만회하기 위해, 그는 아르메니아 왕국과 다니슈멘드, 동로마 제국이 삼파전을 벌이는 킬리키아를 공격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1129년에 동로마[13] 다섯 도시와 수십개 촌락을 빼앗았다. 분노한 요안니스는 노장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와 함께 안티오키아의 만행을 멈추러 진격하였다. 마침내 보에몽은 1130년 2월 동로마의 요안니스 2세에게 패배하여 평화조약에 서명했지만, 조약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다시 킬리키아를 침공했다. 결국 아르메니아 영주들은 다니슈멘드 토후국의 에미르 가지와 결탁, 수천의 병력을 끌고 다시금 약탈을 일삼던 보에몽 2세를 타우루스 산맥의 험준한 지역으로 유인해 전사시킨다.그의 목은 은도금되어 술잔으로 만들어져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바쳐졌다. 에미르 가지는 곧 풍토병으로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그의 분투 덕분에 그의 후손들은 안티오키아 공작을 전사시키고, 영토를 크게 확장시킨 공적으로 칼리프에게 '왕'의 칭호에 해당하는 말리크의 작위를 받았다. 강성해진 다니슈멘드 토후국은 훗날 요안니스 2세의 친정으로 강그라, 카이사레아 등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아나톨리아의 맹주중 하나로 떠오르게 된다.
5. 동로마 제국의 1차 지배
5.1. 비어버린 공작위
보에몽 2세가 죽자 공작위를 이어갈 사람은 그의 어린 딸 콩스탕스 뿐이었다. 보두앵 2세는 다시 손녀를 대신해 섭정을 했지만 그마저도 1131년에 사망했다. 그의 딸 알리스는 안티오키아를 섭정인 아버지에게서 갈취하기 위해서 음모를 꾸미다가 추방당했다가, 멜리장드와 풀크가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 되자 알리스는 다시 자기가 공작이 되려는 음모를 꾸몄다. 바로 프랑스 푸아티에에서 온 귀족 레몽과 결혼하여 공작위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안티오키아 귀족들은 보에몽의 직계인 콩스탕스를 지지했고, 결국 라틴 총대주교의 주례 하에 콩스탕스가 어머니 알리스 대신 레몽과 결혼하였고, 알리스는 다시 유폐되었다.5.2. 동로마 제국과의 분쟁
레몽이 통치하던 시기의 레반트 판도, 녹색 빗금이 안티오키아 공국이 점령한 동로마 제국의 영토 킬리키아이다. |
동방의 에데사 백작령이 약체화되고 알레포에서 장기 왕조가 발흥해 십자군을 위기에 밀어넣는 상황에서, 새 안티오키아 공작, 푸아티에의 레몽은 확장의 방향을 킬리키아로 잡았다. 당시 킬리키아의 패권은 동로마 제국에게 있었다. 아르메니아 왕국의 레오 1세는 제국의 요안니스 2세에게 대패하고 타우루스 산맥의 요새 속에 숨어들었고, 다니슈멘드 왕조는 5차례의 대회전 끝에 결국 중서부 아나톨리아의 영토를 동로마에게 토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타르수스, 아다나, 시스 등의 대도시와 요새지역을 제외하고, 동로마의 지배는 아직 불안정했다. 지역의 아르메니아 소영주들은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기꺼이 받아들였으나 산지와 농촌에는 아르메니아 왕국 게릴라가 판을 치고, 북부의 안티타우루스 관문으로는 다니슈멘드가 계속해서 킬리키아를 노렸다. 수천의 상비군이 킬리키아에 배치되어 있었지만 분산되어 있어 효율적일 수가 없었다.
1136년 4월에 공작이 된 푸아티에의 레몽은 이 기회를 십분 활용, 시스와 타르수스를 포함한 대도시 5곳과 수십 개의 촌락을 기습 점령하고, 산지에서 농성하던 아르메니아 왕국의 레오 1세와 동맹했다. 요안니스 2세는 안티오키아 공국이 3번씩이나 통수를 치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1138년, 바랑기안 가드, 카타프락토이중앙군, 페체네그 정예 용병으로 구성된 4만 8천의 대군이 킬리키아를 휩쓸었다. 해봐야 1만명도 안되는 공국군은 한 주도 채 버틸 수가 없었다. 동맹군 아르메니아도 다시 산속으로 숨어버리자, 안티오키아는 그대로 동로마 제국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요안니스 2세는 징벌의 차원으로 안티오키아 근교 5개 도시와 수십개의 촌락을 약탈했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장기 왕조의 군대도 동로마 제국의 거병 소식을 듣고 시리아 인근으로 진격해왔고, 안티오키아는 그 둘 중 어느 것도 막을 수 없었다. 레몽은 결국 동로마에 항복했다. 요안니스 황제는 즉각 안티오키아를 동로마에 반환하고, 이번 전쟁의 군비를 안티오키아 공작이 지불하며, 라틴 총대주교구를 포기하고 정교회 총대주교를 복위시킬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레몽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고, 이곳 귀족들이 아직 자신의 편임을 알고 있던 레몽은 황제가 새 영지를 준다면 그 조건으로 항복할 것임을 단언했다. 노르만 귀족들을 선무하기 위해, 황제는 그의 요구를 수락했다.
5.3. 샤이자르 공방전
우리는 안티오키아가 투르크에게 14년 동안 빼앗기기 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 황제의 영토였다는 것, 그리고
우리 선조들이 맺은 조약에 관한 황제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우리 조상들에게서 들어 잘 알고 있소, 그런데도 레몽 당신은 진실을 부정하고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거부해야겠소? (
예루살렘 왕국의
풀크 왕, 오데리쿠스 바이탈리스 XII 34p.)
레몽이 새로 원한 지역은 모술과 알레포 주변의 샤이자르라는 지역이었다. 튼튼한 성채로 둘러싸인 이곳은 메소포타미아 유역의 주요 요충지였다. 1138년 동로마군을 중심으로 한 4만 8천의 군대와 성전 기사단까지 동원된 안티오키아 연합군은 샤이자르를 두들겼지만, 외성을 파괴하는 것 외에는 성과가 더뎠다. 레몽은 에데사 백작 조슬랭 2세와 짜고 황제의 공성을 의도적으로 방해함으로써, 안티오키아를 가질 명분을 주지 않으려 한 것이다. 황제군이 피로가 쌓이는 동안 조슬랭과 레몽을 위시한 라틴 기사들은 주사위 놀이나 하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외벽이 날아간 샤이자르 수비군으로서도 더이상 시간을 버티기엔 어려웠다. 결국 샤이자르 영주는 정교회 인구와 성 십자가의 조각을 넘기고 제국에 조공을 바치는 대가로 성을 온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샤이자르를 레몽에게 할양하지 못하게 되는 사태 속에서, 라틴, 노르만 귀족들은 요안니스 2세가 조약을 위반하였다고 안티오키아의 주민들을 선동하였다. 결국 황제가 안티오키아 성내에 소규모 주둔군과 함께 휴식하는 동안, 조슬랭 2세와 레몽의 주도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난데다, 제국의 대장군이자 황제의 매형인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는 시리아 풍토병으로 생사가 위중한 상황이었다. 황제는 라틴 귀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태업과 폭동을 통하여 레몽은 사실상 독립세력으로서의 명맥을 지켜낼 수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샤이자르 공방전 참조
5.4. 동로마 제국의 재점령
하지만 안티오키아 공국의 패악질은 멈추지 않았다. 1142년, 이제는 안정적으로 동로마 영토에 편입된 아다나와 모프수에스티아 사이의 아르메니아 왕국 영토를 계속해서 약탈한데다, 동로마 영토인 키프로스섬 주변에서 해적질을 자행한다는 보고까지 입수된 상황이었다. 요안니스 황제는 친서를 보내 약탈을 중지할 것을 명했으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그리스 황제를 운운하는 모욕적인 괴서들뿐이었다. 결국 황제는 셋째 황자인 이사키오스에게 제국의 친정을 맡기고, 다시금 프랑크인들의 땅 우르트메르로 진격했다. 이번 원정에는 그의 세 아들인 황태자 알렉시오스, 둘째 황자 안드로니코스, 넷째 황자 마누일까지 대동한 5만의 대군이 참가했다. 이번에는 공국의 신민들마저 동로마 제국쪽에 가 있었다. 그들의 기독교 신민들은 원래 정교회 신자들이었던데다, 레몽의 지속된 실정으로 라틴 귀족들마저 황제의 친정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었다. 레몽은 완전히 고립 무원의 상태였다. 저번 원정 때처럼 반 제국 폭동을 일으킬 만한 여론 자체가 조성될 수 없는 상태였다.[14] 그러나 이번에는 하느님이 레몽의 편이었다. 진격중인 동로마군의 군영에서 황태자 알렉시오스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망했고, 그를 운구하기 위해 배편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던 안드로니코스마저 시체에서 감염된 같은 병으로 사망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요안니스는 아랑곳 않고 킬리키아를 통과하기 시작했지만, 킬리키아 지방에서 황제는 숲속에서 별안간 날아온 화살을 맞아 낙마했고, 상처에서 생긴 패혈증으로 사망하면서, 막내 아들 마누일을 후계로 지명했다. 성지 안티오키아를 수복하겠다는 그의 염원은 그의 막내아들에게 넘어갔고, 요안니스 악수흐를 위시한 동로마군은 제위 계승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회군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레몽의 목숨은 다시 연장되었다.2년의 시간이 지났다. 안티오키아 주변의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이마드 앗 딘 장기는 수만의 군세를 이끌고 에데사 백국을 멸할 기세로 진격하고 있었고, 십자군 전체에게는 장기를 막을 수 있는 군세가 없었다. 그러한 와중에 젊은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 치하의 동로마는 마지막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젊은 황제는 서쪽으로 헝가리, 동쪽으로 조지아를 국경으로 넓히며 분주했지만, 재작년 겪은 아버지와 형들의 비극적인 죽음과 레몽에게 당한 치욕을 잊지 않고 있었다. 황제는 다시금 4만 5천의 대군을 이끌고 안티오키아로 향했다. 서쪽에서는 동로마 제국, 동쪽으로는 장기 왕조가 들이닥치는 상황에서 레몽에게는 아무런 카드가 없었다. 1144년,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조하여 마누일 황제에게 장기 왕조를 막을 병력과 금전 지원만 해 준다면 무조건적으로 공국을 넘기겠다고 선언했다. 마침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축제 기간에 동로마에 입조한 그는 숱한 수모를 겪으며 황제를 겨우 만날 수 있었다.[15] 결국 공국에는 명목상으로나마 정교회 총대주교가 들어섰으며,[16] 동로마 육군과 해군, 징세관들이 상시로 공국에 주둔하게 되었다. 70년 만에 지중해 최강의 세력을 되찾은 마누일 1세 앞에서 서방과 십자군 세력 중 누구도 안티오키아가 동로마의 지배 하에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굴욕 외교 이후, 레몽은 찬밥신세가 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서방과 연대하여 동로마의 위신을 깎아내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예루살렘 왕국도 안보상황 유지를 위해 동로마가 필요한 상황에서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기회는 1148년에 찾아왔다. 1145년, 에데사 백국이 장기 왕조의 손에 떨어졌고, 예루살렘 왕국은 안보 공백을 매꾸기 위해 새로운 십자군의 수혈을 원했다. 성 베르나르도의 호소 아래 동방 제국에 부정적이던 프랑스의 루이 7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콘라트 3세가 십자군에 참전한다는 사실을 안 레몽은 그들과 접촉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루이 7세의 아내인 엘레오노르는 레몽의 조카딸이었기에, 그는 프랑스군과의 연대를 바랬다. 그러나 콘라트 3세의 독일군은 룸 술탄국의 영토에서 격파당해 잔당만이 안티오키아에 도착한데다, 콘라트 3세는 와병하여 동로마 제국의 보호 아래 있게 되었다. 프랑스군도 동방 제국의 영토 내에서 튀르크군에게 요격당해 큰 피해를 입은 채로 안티오키아로 터덜터덜 도착하고, 십자군 원정 중의 불화로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의 사이까지 멀어지게 되었다. 엘레오노르는 삼촌인 레몽의 편을 들며 동로마 제국과 알레포의 장기 왕조를 공격하자고 주장했지만, 루이 7세는 하루 빨리 예루살렘 왕국으로 가고싶을 뿐이었다. 결국 이 문제로[17] 프랑스 왕가는 때아닌 이혼 소송에 휘말려 안티오키아 공국을 지원할 수 없게 되었다. 최후의 희망이었던 콘라트 3세마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요양하는 도중 동방 황제 마누일 1세와 친분을 쌓고 동맹을 선언하기까지 해버렸다. 고립된 레몽은 장기 왕조가 누르 앗 딘의 집권으로 혼란한 상황을 틈타 상황 타개를 위해 알레포를 공격하였지만, 결국 누르 앗 딘의 군대에게 산화해버렸다. 살라흐 앗 딘과 그의 삼촌 시르쿠는 레몽의 목을 베었고, 은 술잔으로 만들어 그의 목을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바쳤다.
6. 르노 드 샤티용의 치세
레몽은 보에몽 2세의 딸 콩스탕스와 결혼하여 아들인 보에몽 3세와 딸 마리아를 낳았다. 슬프게도 보에몽 3세는 안티오키아를 지배하기엔 너무 어렸고, 주변국은 콩스탕스의 새 남편감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첫 번째 신랑감은, 안티오키아 공국의 상위군주인 동로마 제국의 마누일 1세가 추천한 존 로저 - 또는 요안니스 로자리오스라는 그리스식 이름으로 알려진 - 라는 노르만계 동로마인이었다. 하지만 공국의 독립성이 더이상 훼손되기를 원치 않았던 안티오키아의 프랑크 귀족들을 필두로 그를 반대하였다. 안티오키아 공국을 보호하기 위해 3차례나 방어 원정을 감행했던 보두앵 3세도 여러 명의 귀족들을 그녀에게 소개시켜주었지만, 그녀는 모두 거부하였다. 사실 그녀는 이미 2차 십자군의 패잔병이자 남프랑스의 한미한 기사인 르노 드 샤티용과 밀월관계에 있었다. 그들은 1151년경에 몰래 약혼했고, 1153년경에는 르노가 비공식적인 안티오키아 공작으로써 외교 전면에 등장했고 1153년, 보두앵 3세는 르노에게 안티오키아의 공작위를 정식으로 허가했다.하지만 라틴 총대주교 에메리는 이 대관식에 반대했다. 그가 보기에 이 사태는 안티오키아의 고귀한 공주가 르노의 외모만 보고 사랑에 빠져 공국을 통째로 용병 나부랭이에게 공국을 넘겨주는 꼴이었다. 거기에 더해 그들의 결혼 관계는 교회법에 적합하지도 않았으며, 상위 군주인 동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전혀 인정받지도 못한 대관이었다. 라틴 총대주교가 그를 인정하지 않자, 르노는 라틴 총대주교좌를 기습하여 에메리를 붙잡았다. 그는 매질당한 채로 안티오키아 대성당의 첨탑에 꿀이 발린 채로 묶여져 고통받았고, 보두앵 3세가 개입하여 에메리를 풀어줄 것을 지시하기 전까자 고문은 계속되었다. 결국 라틴 총대주교는 르노의 대관과 결혼을 인정했지만, 그를 축복하기를 거부하고 예루살렘 총대주교에게로 도망쳤다.
승리자로서 입성하는 동로마 황제 마누일과, 그의 말을 끄는 르노 |
1158년, 서방의 문제가 대강 정리되자 마누일 황제는 복속된 세르비아인, 튀르크멘을 포함한 5만 대군을 끌고 안티오키아로 향했다. 르노의 우방이였던 아르메니아의 토로스 2세는 며칠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다시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동로마의 드로몬들이 안티오키아로 향하는 상선들과 상인들을 약탈했고, 육군은 안티오키아 근교의 다섯 요새와 촌락을 불태워 빼앗은 재물을 분배하였다. 르노는 예루살렘 왕국을 위시한 십자군 국가들에게 동로마 제국에 대항한 공동행동을 벌이자고 주장했지만, 이미 그의 상위군주인 보두앵 3세는 마누일 1세의 조카딸 테오도라 콤니니와 결혼하고 오히려 동로마 제국과 동맹하고 나선 상태였다. 결국 르노는 이전의 안티오키아 공작들과 마찬가지로 거친 베옷을 입고 마미스트라에서 마누일 황제에게 항복해야만 했다. 황제는 승리자의 복장으로 안티오키아에 입성했고, 노르만 귀족들과 르노는 맨발로 마누일의 백마를 끄는 마부 역할을 맞는 치욕을 겪었다. 다시금 정교회 총대주교의 성찬예배가 안티오키아 대성당에서 집전되기로 합의되고, 동로마의 징세관들이 안티오키아를 드나들었다. 르노는 주변 이슬람 상인들을 약탈하는 것으로 소일하다가 1160년에 유프라테스 계곡 근처를 약탈하고 돌아가던 와중에 알레포의 에미르에게 공격을 당하고 포로가 되었다. 그는 그 후 무려 16년간 이슬람의 포로로 있게 되기 때문에, 더 이상 안티오키아를 통치할 수 없었다.
이 이후의 르노의 이야기는 르노 드 샤티용 문서를 참고.
7. 동로마 제국의 2차 지배
마누일 황제는
룸 술탄국에 대한 응징 원정을 가하기 전, 교황청,
신성 로마 제국을 비롯한 여러 서유럽 국가들에게 서신을 보내 동방 로마 제국이 나서는 소위 '성전'의 위용에 대해서 자랑하였다. 독일 사신들의 설명에 따르면, 그의 전열은 10마일에 걸쳐 뻗쳐나갔고, 그리스인들은 물론 복속된 헝가리인, 세르비아인, 안티오키아에서까지 병력이 모였다. 이 지원군의 수는 대략 5,000여명정도 되었다. 그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들은 대개 젊고 혈기넘치는 청년들이었는데, 그중에는 안티오키아 공작의 친척인 안티오키아의 보두앵과 헝가리의 왕자, 세르비아의 족장들이 끼어 있었다. 그 숫자는 4만 5천, 외국인 병력까지 과장해서 말하면 10만에 달했다고 그리스 역사가들은 기록했다. (짐 브레드베리, 『 The Routledge companion to medieval warfare』 중에서)
콤니노스 왕조의 통치 아래, 마지막 번영을 맞은 동로마 제국은 아직까지 충분히 레반트 지역의 장기 왕조를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다. 안티오키아 공국 뿐만 아니라 모든 십자군 공국들이 생존을 위해서 로마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다. 안티오키아의 섭정이 된 라틴 총대주교는 이제 결혼할 수 있는 나이까지 자란 콩스탕스의 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와, 베르타 황후와 사별하고 홀몸이 된 마누일 1세의 결혼을 주선했다. 둘의 결혼으로 인해 동로마의 안티오키아 지배는 더욱 확고해졌다. 콩스탕스와 푸아티에의 레몽 사이의 아들인 보에몽 3세가 장성하기 전까지 안티오키아는 동로마의 관리들과 라틴 총대주교의 공동 섭정을 받았다. 보에몽 3세가 장성하고 나서도 안티오키아는 로마의 영향을 무시하지 못하고 봉신으로 남았다.
8. 보에몽 3세의 치세
보에몽 3세가 공국을 직접 통치할 나이가 된 1163년, 마누일은 그를 안티오키아의 공작으로 추대해주었다. 보에몽 3세는 다른 공작들과 다르게 로마의 지배를 기꺼히 받았다. 1164년 하렝크에서 누르 앗 딘에게 포로가 되었을 때 콤니노스 가문의 도움을 받아 몸값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19] 동로마의 지원을 받은 대가로 보에몽 3세는 동로마 제국의 통제를 확실히 따랐다. 그는 동방정교회 총대주교 아타나시오스를 다시 안티오키아에 착좌시켰고, 1170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총대주교가 사망하기 전까지 그 어떤 라틴 총대주교도 서임하지 않았다. 그 뿐 아니라 아르메니아 왕국이 준동하는 킬리키아 지역을 선무하여 토로스 왕이 산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게 막기도 하였다.1170년대 말, 성지의 정세는 급박해지기 시작했다. 살라흐 앗 딘의 군세는 십자군 국가뿐만 아니라 이슬람 파티마 왕조를 포함, 기존 레반트의 이슬람 영주들을 하나 하나 집어삼키기 시작했고, 연로해가는 마누일 1세의 동로마 제국은 아직 번영을 구가하고 있기는 했지만, 징세관들의 폭정, 라틴 인사들의 부정 부패로 그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안티오키아 공국은 로마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1177년, 보에몽 3세는 동로마 황제의 조카딸인 테오도라 콤니니와 결혼하여 충성을 더 돈독히 했다. 그해 그는 플랑드르의 필립공과 합세하여 알레포 지역을 공격했다. 그러자 알레포와 다마스쿠스의 아미르인 이스마일 말리크는 수천 디나르의 협상금과 함께, 살라흐 앗 딘과 맞설 동맹을 제안했다. 그들은 이를 수락하고,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였다. 당시 살라흐 앗 딘을 포함한 이슬람 세력들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시도하던 성군 보두앵 4세의 병환은 심해져 더이상 예루살렘 왕국을 확실히 제어할 수 없게 되었고, 이로 인해 기 드 뤼지냥을 위시한 과격파 십자군들이 득세하여 살라흐 앗 딘을 자극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기름을 부은 것은 바로 보두앵 4세의 여동생 시빌라 왕녀였다. 트리폴리 백작 레몽과 보에몽 3세는 시빌라가 다른 기사와 결혼하기를 간청했으나, 그녀의 선택은 하필이면 얼굴만 잘생긴 기 드 뤼지냥이었고, 결국 다음 예루살렘 왕국의 왕은 기 드 뤼지냥으로 확정되고 말았다. 예루살렘 왕국의 귀족들은 기 드 뤼지냥, 성전 기사단, 르노 드 샤티용으로 대표되는 강경파와, 발리앙 디블랭, 트리폴리의 레몽, 보에몽 3세를 위시한 온건파들로 나뉘게 되었다. 십자군은 점점 하틴 전투의 예정된 멸망으로 걸어들어가기 시작했다.
8.1.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 와해
1180년, 미리오케팔론 전투 이후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던 대제 마누일은 결국 임종을 맞았다. 1176년의 패배 이후 안티오키아 공작 자신이 보낸 병력 또한 미리오케팔론에서 궤멸되어 이를 이끌던 장군 보두앵도 전사하기까지 하자, 주변국들은 동방 로마의 실력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병중에서도 히엘리온과 리모키르, 마이안데르 강에서 룸 술탄국에게 패배를 안기며 자신이 겪은 치욕을 만회하려 노력했고, 콤니노스 왕조의 중흥기 100년간 건실하게 다져온 중앙군은 아직 건재하였지만, 그의 어린 후계자 알렉시오스 2세는 너무나도 위태로운 기반 위에 서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안티오키아의 정치 지반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새 동로마 황제인 알렉시오스 2세와 그의 섭정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는 보에몽 3세의 강력한 지지자였기에 더 이상 그는 로마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것은 바로 안티오키아의 시빌라라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행실이 안 좋기로 유명했지만 고혹적이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역사가 기욤 드 티레에 따르면 그녀는 살라흐 앗 딘이 안티오키아 공국을 동로마와 멀어지게끔 만들려 보낸 미인계였다고 한다. 그는 조강지처 테오도라를 버리고 시빌라와 결혼했다. 총대주교 에메리는 이 결혼을 반대하며 그를 파문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보에몽은 이미 시빌라에게 푹 빠진 상태였다. 결국 총대주교는 그를 파문했다. 보에몽은 파문장을 접수하자 마자 군대를 이끌고 총대주교의 집무실을 공격했다.하지만 이미 선대 공작들에게 수십 년 동안 시달렸던 총대주교 에메리는 녹록지 않았다. 이미 사병을 거느리고 자신의 영지인 요새로 도피한 총대주교는 수성전을 치를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가 에메리의 성채를 공성하는 동안 안티오키아의 세력이 약해지길 바란 기 드 뤼지냥과 르노 드 샤티용의 군대, 그리고 동방 제국의 관리들, 독실한 프랑크인 기사들이 보에몽을 비난하고 나섰다. 결국 그는 예루살렘 총대주교의 중재하에 에메리와 화해해야 했다. 수십 년에 걸친 동로마와의 관계는 이 결혼과 함께 단절되기 시작했고, 1182년, 안드로니코스 1세가 사주한 폭동으로 그의 누나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가 죽고 수만 명의 라틴인들이 동로마인들에게 학살당하자 동로마와 안티오키아의 관계는 완전히 끝났다.
8.2. 쇠퇴의 시작
안드로니코스 1세는 킬리키아와 안티오키아의 상황을 그대로 방치했다. 킬리키아는 루벤 3세와 헤툼 3세가 이끄는 두 아르메니아 왕국으로 나뉘어 개판이 되었고, 명목상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었던 보두앵 4세는 병상에 누워 기 드 뤼지냥 하나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살라흐 앗 딘이 진격해오는 동안 안티오키아 공국과 연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세력은 기껏해야 장기 왕조 정도 뿐이었다. 장기 2세는 보에몽 3세와 동맹을 맺고 살라흐 앗 딘과 싸웠지만 그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알레포마저 1183년경 살라흐 앗 딘에게 함락되었다. 보에몽은 방어할 지역을 줄이기로 생각하고 타르수스 지방과 킬리키아에 있던 공국의 영토를 루벤 3세에게 팔아넘기고 돈과 용병을 받아내었다. 보두앵 4세도 그에게 300여 명의 정예 기사들과 병력을 지원했으나, 그 정도로는 다가올 살라흐 앗 딘의 전방위적인 공격에 살아남기 힘들었다. 결국 수천에 이르는 투르크멘 약탈자들이 동로마 제국이 붕괴되며 무주공산이 된 아나톨리아를 통해 북쪽에서부터 안티오키아 공국을 불태우기 시작했고, 1186년에는 보두앵 4세마저도 사망하고 말았다. 왕이 된 기 드 뤼지냥은 바로 십자군의 칼끝을 살라흐 앗 딘에게로 향했지만, 병력도 식량도 부족한 상황이었다.1186년에 보에몽은 병력을 2갈래로 나누어 자신의 아들인 레몽에게 수백의 기병대를 이끌고 기 왕에게 합류하라고 명했다. 그 자신은 북방으로 향하며 동방 로마가 붕괴된 타르수스 산맥 쪽으로 향해 룸 술탄국의 침탈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기 드 뤼지냥이 크레송 전투에서 안티오키아가 빌려준 병력을 모두 날려먹었을뿐만 아니라 그의 영토였던 라타키아 마저도 투르크 약탈자들의 손에 떨어져 안티오키아 성벽까지 적이 들이닥친 상황이었다. 주변의 수도원들과 기독교인 영주들이 학살당하는 상황에서 보에몽은 겨우 겨우 1187년 초에 안티오키아 근교의 산지에 있는 적 주둔지를 기습해 그들을 아나톨리아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그는 아들 레몽에게 지원군을 더 붙여 보내 예루살렘으로 가게 하였다. 예루살렘 왕국은 이미 백척간두에 서 있었다. 기 드 뤼지냥이 살라흐 앗 딘과의 협정을 어길 대로 어기고, 심지어는 르노 드 샤티용과 성전 기사단원들이 살라흐 앗 딘의 누이들까지 죽이자, 그는 대군을 끌고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기 드 뤼지냥의 소집령에 소집을 거부한 트리폴리와 발리앙 디블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제후들이 모였다. 십자군의 가용 병력을 모두 끌어모은 거대한 군대는 어쩌면 예루살렘을 수비했다면 승산이나마 있었을 상황을 뒤집어 하틴의 뿔 지역으로 진격했다. 결국 하틴 전투가 벌어졌고, 예루살렘에 모인 모든 십자군은 그대로 전멸했다. 안티오키아 군대도 그들과 운명을 같이했다. 겨우 50명의 기사와 보에몽의 아들 레몽만이 탈출하여 안티오키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안티오키아와 트리폴리 백국 일대, 아크레를 제외한 예루살렘 전지역이 살라흐 앗 딘의 손에 들어섰다. 트리폴리 백작 레몽은 자신을 방어할 수 있었지만, 중병에 걸려 트리폴리를 더이상 통치할 수 없었다.
그는 그가 믿고 의지하던 보에몽에게 트리폴리 백국을 맡겼고, 그는 살아남은 그의 아들 레몽에게 백작령을 수여했다. 예루살렘 왕국에서 기 드 뤼지냥에 반대했던 양심적인 기사들과 곳곳에서 패배해 도망쳐온 병력이 안티오키아와 트리폴리에 속속 도착하자, 안티오키아 공국은 살아남은 십자군 세력 중 가장 강대한 곳이 되었다. 그는 아르메니아 왕국의 레오와 동맹을 맺고 살라흐 앗 딘의 진격을 막을 준비했다. 기 드 뤼지냥이 1188년에 그에게 찾아와 병력을 요구했지만, 그는 단호히 거부했다.
1190년 초, 유래없는 규모의 십자군이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황제와 그의 아들 슈바벤 공작 하인리히 6세의 지도 하에 아나톨리아를 지났다. 서유럽 군대에게 편집증적으로 적대하던 동방 로마제국의 황제 이사키오스 2세는 그들을 박대했으나, 아드리아노폴리스를 공략당하자 자존심을 굽히고 해군과 식량을 지원해주었다. 그들은 4월 경 콘야를 공성하고 룸 술탄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 승리는 안티오키아가 원하는 십자군의 최종 승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해 6월,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는 살레르 강을 건너다 물에 빠져 죽고 말았고, 남은 독일 십자군은 안티오키아 대성당에 그들의 황제를 장사지내고 대부분 독일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거기에 더해, 프랑스와 영국에서 오는 십자군들조차 예루살렘 근교의 수복만을 생각할 뿐,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안티오키아의 강화에는 안중이 없었다. 독일에서 온 게르만 기사들조차도 모두 티레, 아크레등으로 남하해버렸으니, 보에몽 3세는 외교력으로 버틸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의 편이었던 몬페라토의 코라도는 아직 티레에 굳건한 거점을 가지고 있었던 데다, 라틴인들을 혐오하던 동로마 황제 이사키오스 2세에게 유일하게 신뢰받고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이탈리아의 후작이었다.[20] 또한 전왕 아모리 1세의 딸을 아내로 맞아 강력한 왕위 계승자였기에, 만일 그가 왕이 된다면 세력을 조금이나마 찾은 예루살렘 왕국이 그를 도와줄 가능성이 있었으나, 독일과 영국 십자군은 기 드 뤼지냥을 왕위에 추대하려 노력했다. 특히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가 각각 기와 코라도를 밀었기에 왕위의 행방은 묘연하게 되고 말았다. 예루살렘 왕국 본토 토박이던 발리앙 디블랭을 비롯한 다수의 기사들과 프랑스 귀족들은 코라도를 지지해 단독으로 대관식을 올리려 하였으나, 여기서 느닷없이 코라도가 아사신파에게 암살당해버리고 말았다. 보에몽 3세는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을 찾아가 레오 1세를 설득하려 하기도 하고, 아크레로 찾아가 리처드 1세, 필리프 2세를 만나기도 했지만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했다.
8.3. 말년
3차 십자군은 예루살렘 왕국의 생명을 연장시켜주고 떠났지만, 안티오키아의 안정과는 전혀 무관한 원정이 되어버렸다. 그는 결국 베이루트의 살라흐 앗 딘을 찾아가 보호를 청할 수 밖에 없었다. 대인배 살라흐 앗 딘은 그와 그의 아들이 지배하는 안티오키아와 트리폴리 지역을 10년간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해 주었지만, 그 조약에는 보에몽이 가진 킬리키아와 시리아 지역의 땅은 전혀 포함되어있지 않았으므로, 아르메니아 왕 레오와 사라센 군대는 그 지역을 마구 약탈하고 다녔다.그가 쇠약해지자, 그의 아내인 요부 시빌라는 정실 부인 테오도라가 낳은 아들 레몽이 안티오키아를 차지하게 놔두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아르메니아 왕국의 왕 레오와 먼 혈연관계에 있었으므로, 그녀는 레오와 결탁해 안티오키아를 빼앗을 계략을 세웠다. 아르메니아 왕은 보에몽 3세에게 성전 기사단과 안티오키아 공국에게서 빼앗은 땅을 돌려줄테니 협상하자는 제안을 해 왔고, 킬리키아의 항구도시 시스로 그를 초대했다. 그러나 성전 기사단과 보에몽을 기다리는 것은 아르메니아의 매복군이었고, 그는 사로잡힌 채로 안티오키아의 종주권을 아르메니아 왕국에게 넘길 수 밖에 없었다. 아르메니아군은 안티오키아를 유린했고, 성내에서 약탈과 잔악한 짓을 거행했다.
안티오키아 주민들의 다수를 차지한 정교회 신자들과 노르만, 라틴인 십자군 시민들은 아르메니아인들의 만행을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정교회 주민들과 라틴인들을 잘 중재해 다스렸던 라틴 총대주교 에메리의 주도하에 봉기를 일으켰고, 수만의 시민들이 시민군이 되어 아르메니아인들과 시빌라를 쫓아내고 자유를 찾았다. 이들은 보에몽 3세의 두 아들인 레몽과 보에몽 4세가 안티오키아를 다스리길 원했기에 트리폴리 백작으로 있던 그들을 불러들였다.[21] 예루살렘 왕 앙리 1세와 십자군의 등장에 아르메니아인들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레오는 보에몽 3세를 풀어주는 대신 킬리키아에 있던 성전 기사단원들과 안티오키아 공국의 요새를 자신의 것으로 하고, 후계자 레몽을 자신의 딸 알리스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1197년, 그의 맏아들 레몽은 죽고 말았다. 그 짧은 결혼기간 동안 그는 아르메니아의 알리스와 레몽 루벤이라는 아이를 낳았다. 1201년, 보에몽 3세가 죽자. 공국의 새 주인은 이제 보에몽 4세와 레몽 루벤으로 나뉘게 된다.
9. 안티오키아- 아르메니아 전쟁
9.1. 배경
12~13세기경의 안티오키아와 아르메니아의 세력 판도 |
늙은 동방제국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그 잿더미 속에서 룸 술탄국과 아르메니아 왕국이 들어서 세력을 키워갔다. 안티오키아의 후계구도에 아르메니아 왕조가 개입하면서 안 그래도 위태로워지기 시작한 레반트 정세는 더더욱 혼란에 빠지게 된다.
9.2. 1차 안티오키아 계승전쟁
보에몽 4세는 트리폴리에서 뛰쳐나와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1201년 새 안티오키아 공작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교황의 특사와, 몇몇 프랑크 귀족들은 그를 피해 킬리키아로 도망친 어린 레몽 루벤이야말로 진짜 공작위의 계승자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22] 보에몽 4세는 트리폴리 백국의 병력과 구호기사단에서 임대한 기사단원들을 가지고 자신의 권리에 대항하는 레몽 루벤이 이끄는 안티오키아군과 싸워 이겼다. 여러 차례의 전투가 킬리키아 주변에서 벌어졌고, 안티오키아의 주인은 몇 차례씩이나 바뀌었다. 레몽 루벤은 외할아버지이자 아르메니아 왕국의 군주인 레오를 등에 업고, 보에몽 4세는 구호기사단과, 아르메니아인들의 숙적 룸 술탄국의 지원을 받으며 동족상잔을 계속했다. 1201년 7월 말에 결국 보에몽 4세의 군대가 우세를 점하자, 아르메니아 왕국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안티오키아 공국과 구호기사단이 이교도 룸 술탄국과 연대했다고 고발하였다. 이로 인해 전쟁은 소강에 들어갔다. 1202년, 레오 왕은 다시 군대를 끌고 안티오키아를 기습했으나, 교황의 사절단과 예루살렘 왕의 군대가 이를 중재했다. 보에몽 4세는 이들에게 항의하기 위해 잠시 안티오키아를 비웠고, 레오 왕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안티오키아 공국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198년에 사망한 라틴 총대주교 에메리가 만들어놓은 시민군과 성전 기사단은 내성에서 버티며 항복을 거부했다.이들이 벌어준 시간 덕분에 보에몽은 군대를 이끌고 안티오키아를 탈환하러 올 수 있었으며, 그의 동맹인 룸 술탄국과 이슬람군이 킬리키아 본토를 공격하자 레오 왕은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레오 왕은 트리폴리의 라틴 귀족들을 사주해 반란을 일으켜 시야를 돌리고 1204년에 다시 공격해왔지만 이마저도 격퇴되고, 1205년에는 양군이 킬리키아와 안티오키아 국경에서 대치했으나, 또다시 룸 술탄국이 적절히 뒤치기를 시전하여 전쟁은 보에몽 4세의 승리로 끝났다.
9.3. 2차 안티오키아 계승전쟁
1198년에 라틴 총대주교 에메리가 사망하자 교황청은 앙굴렘의 페트로를 새 라틴 총대주교로 세웠다. 그러나 그는 레몽 루벤의 지지자였고, 전임 총대주교와 다르게 정교회 인구를 핍박하고 시민군을 해체하려 했다. 보에몽은 이를 가만히 둘 수 없었고, 1207년 초에 동방 정교회 총대주교를 다시 불러들여 세우고 페트로를 쫓아내었다. 시민 대다수가 정교회 교도였기에 새 총대주교 시메온 2세는 금방 지지를 받으며 착좌할 수 있었다. 분노한 앙굴렘의 페트로는 보에몽 4세와 시민군들을 이끄는 민회를 파문하고, 새 공작으로 레몽 루벤을 세웠다. 미처 보에몽이 대응할 새도 없이 페트로는 그와 레몽 루벤을 지지하는 기사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보에몽은 자신을 따르는 소수의 성전 기사단원들을 이끌고 내성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고, 페트로는 즉시 아르메니아 왕 레오를 안티오키아로 불러들였다. 레오는 외성까지 무혈입성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내성에서 버티고 있는 보에몽과 성전 기사단원들은 포기하지 않고 저항했다. 마침내 보에몽에 충성하는 군대와 안티오키아의 민회가 다시금 시민군을 조직, 안티오키아 성벽 내부에서 대규모 시가전이 벌어졌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황한 레오 왕은 군대를 안티오키아 밖으로 빼내어 재공성을 계획했지만, 트리폴리에서 오는 지원군들과 성전 기사단 본대가 안티오키아를 구원하러 달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라틴 총대주교 페트로를 버려두고 도망쳤다. 페트로는 안티오키아군에게 잡혀 지하감옥에 갇혔다가 탈수로 사망하고 말았다.하지만 다시금 아르메니아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아딜이 트리폴리 백국을 공격했기 때문에 안티오키아 군은 소수의 방어군만을 남겨둔 채 트리폴리로 떠나야 했다. 레오가 이끄는 아르메니아군은 안티오키아를 수비하는 성전 기사단의 성채 바그라스를 빼앗고 1208년에 다시 안티오키아를 공성했다. 아이유브 왕조와의 싸움을 대충 정리한 보에몽 4세는 한달음에 바그라스로 향하는 한편, 자신의 옛 동맹이었던 룸 술탄국에게 다시금 도움을 청해 레오의 아르메니아군은 성전 기사단-안티오키아- 룸 술탄국 연합의 삼면 공격에 직면했다.
레오는 겁을 잔뜩 집어먹고 가톨릭 교회의 도움을 요청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예루살렘 총대주교인 아보가드로를 안티오키아에 사절단으로 보내 두 국가 사이의 전쟁을 중재했으나 아보가드로는 성전 기사단에 큰 호감을 가진 총대주교였으므로 결국 평화협상은 성전 기사단원들과 보에몽 4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레오는 결국 성전 기사단원들과 안티오키아 공국에게서 빼앗은 영토를 모두 토해내기로 하고 전쟁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그는 금방 약속을 깨고 성전 기사단과 안티오키아 공국의 영토를 자신(과 레몽 루벤)이 소유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는 키프로스의 공주와 레몽 루벤을 결혼시키고, 성전 기사단과 경쟁관계인 프랑크, 독일인들에게 동맹을 요청한 후 요새와 금전을 지원해 안티오키아의 성전 기사단원들과 경쟁시켰다. 그 중에는 정교회 총대주교, 이슬람 아사신파, 심지어 성전 기사단원들의 오랜 라이벌인 튜튼 기사단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211년, 안티오키아의 기사단 요새에 식량을 지원하러 가던 성전 기사단 단장이 아르메니아군에게 기습당해 생사를 오가는 사태가 발생했고, 인노첸시오 3세는 예루살렘 왕국의 장 드 브리엔 왕을 비롯한 프랑크 국가들에게 아르메니아를 벌하라고 명했다. 장 드 브리엔 왕은 50명의 프랑크 영주들과 수천 군대를 끌고 아르메니아 왕국에 육박했다. 이에 삐진 레오 왕은 킬리키아에서 가톨릭 신자들을 쫓아내고, 동방 정교회 신앙을 지원하며 교황에게 불만을 표했다. 하지만 레오의 안티오키아 공국에 대한 야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0. 아르메니아 왕국의 속국 시기
10.1. 레몽 루벤의 정복
그러나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결국 아르메니아 왕국에게 굽히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몇년 전에 있었던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이나 짓밟고 성지의 정세에 아무런 긍정적 영향을 끼치지 못했기 때문에 교황은 성지를 향한 새로운 십자군을 조직해야만 했는데, 그러기 위해선 성지의 입구에 서 있는 아르메니아 왕국의 지원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1213년경, 교황은 레오를 희사하고 성전 기사단원에게 바그라스를 제외한 다른 영지를 돌려준다면 정벌하겠다는 교서를 취소하겠다는 유화책을 펼쳤다. 그뿐만 아니라 1214년경 예루살렘 왕국의 장 드 브리엔은 레오의 딸과 결혼하면서 친 안티오키아적 외교 정책을 선회해 아르메니아를 우대하기 시작했다. 보에몽 4세의 입지는 약해지고 있었다. 아르메니아의 레오와 연대한 아사신파가 알레포 지역을 중심으로 안티오키아를 괴롭혔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원래 그와 동맹이었던 투르크 영주들과 갈등이 생겨 연대가 끊기고 말았다.레오에게는 최적의 기회였다. 이제 그와 레몽 루벤이 자력으로 제거해야 할 적은 단 둘 뿐이었다. 바로 안티오키아 민회의 시민군들과, 성전 기사단이었다. 보에몽이 계속 패배하면서도 안티오키아 민회의 지지를 얻어 자꾸만 왕좌를 탈환하였었다. 또한 성전 기사단원들은 잘 훈련된 기사단원들과 자금력을 뽐내면서 보에몽의 재기를 수도 없이 도왔었다. 두 수족을 끊어놓기 위해 레오는 먼저 안티오키아 민회의 시민군 대표 아카리에를 매수했다. 그리고 마지막 성전 기사단을 견제하기 위해 그들의 오랜 숙적이자 라이벌인 구호 기사단을 끌어들였다. 레오는 안티오키아를 점령하면 성전 기사단원들의 압류물품들과 성채들을 모두 구호 기사단에게 넘기겠다고 단언했고, 구호기사단은 앞장서서 안티오키아 함략을 도왔다. 결국 1216년, 보에몽이 군대를 이끌고 자리를 비운 사이 아르메니아군이 야음을 틈타 안티오키아 성벽을 넘었다. 일부 민회 시민군들과 성전 기사단은 결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병력 부족으로 거의 무혈에 가까운 입성을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레몽 루벤은 공작이 되었고, 안티오키아 공국은 아르메니아 왕국의 공작령으로 전락했다. 레오는 끝까지 저항했던 성전 기사단의 용기에 감탄해 바그라스 성채만은 성전 기사단원들에게 그대로 남겨두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것을 도왔다.
레몽 루벤은 그렇게도 원하는 안티오키아를 얻었으나, 그가 피흘려 얻은 안티오키아의 상태는 거의 공백에 가까웠다. 주력군은 보에몽 4세와 함께 예루살렘 왕국에 가 있었고, 공국의 방위를 담당하던 성전 기사단은 후퇴해서 공국 내에서는 해체 상태였던데다, 아르메니아 왕국의 외할아버지 레오 왕은 북방에서 쳐들어온 카이카우스 1세와 투르크인, 아르메니아 내의 반란을 진압하러 병력들과 함께 떠났고, 남은 재산마저 지원을 약속했던 구호 기사단에게 퍼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결국 안티오키아의 신민들을 쥐어짜 착취한다는 악수를 두었고, 1217년에는 민회의 반란에 직면하기도 할 정도로 민심도 최악이었다. 그러는 동안, 보에몽 4세는 예루살렘 전역을 돌아다니며 지원을 애타게 바랬다. 옛 동맹 성전 기사단이 그를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예루살렘 왕국 왕 장 드 브리엔도 보에몽을 정당한 안티오키아의 주인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보에몽의 힘은 미약했다. 그는 1219년까지 레반트 지역을 떠돌며 안티오키아 공국을 되찾기 위해 와신상담해야 했다.
몇 년이 지나, 레몽 루벤은 그럭저럭 구호 기사단과 백성들에게 갈취한 돈으로 건실한 군대를 건설했다. 형편이 펴자, 그는 본토인 아르메니아 왕국의 왕위 계승을 주장했다. 그는 늙은 레오 왕을 안티오키아로 초청한 뒤 납치했지만, 결국 그는 도망쳤다. 레몽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킬리키아를 향해 레오 왕을 쫓았고, 성의 방비는 구호 기사단에게 맞겼다. 한편 안티오키아의 민회는 매수되었던 것을 후회하며 지도자를 갈아치우고, 윌리엄 파라벨이라는 지도자를 세워 정당한 주인의 귀환을 위해 몰래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아르메니아인이 설치는걸 보고 싶어하지 않았던 라틴 귀족들도 이에 가담하여 결국 1219년 레몽이 킬리키아에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레몽과 구호기사단원들, 휘하의 아르메니아군은 내성에서 저항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아르메니아로 야반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11. 보에몽 4세의 치세
그뒤 떠돌이 상태의 보에몽이 다시 옹위됐지만, 안티오키아의 여러 지역이 적대적인 아르메니아군과 구호 기사단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심지어 안티오키아 내성 일부 지역은 아직도 루벤을 지지하는 구호 기사단이 지배하고 있을 정도였다. 보에몽은 복위했지만, 아르메니아의 영향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구호기사단과 레몽 루벤의 군대는 안티오키아 공국의 북부를 지배하면서 1220년경 결국 아르메니아 왕국을 삼킨다. 그러나 그는 왕위를 얻은지 2년만에 아르메니아의 왕족인 자벨이 이끄는 군대에게 패배해 감옥에서 처형당하고 만다. 자벨 여왕은 안티오키아와의 오랜 반목을 끝내기 위해, 보에몽 4세의 아들 필리프와 결혼해 아르메니아 왕국을 공동 통치하기로 했으며, 성전 기사단에게 빼앗은 영토도 다시 돌려주었다. 그러나 성전 기사단원들은 이미 안티오키아에 뿌리내린 구호 기사단이 자신들의 옛 영지를 차지한 사실을 깨달았다. 교황의 중재자 펠라기우스는 그들의 영토를 조정했으나, 성전 기사단원들과 보에몽은 만족하지 않았다. 두 성기사단의 반목은 보에몽이 구호 기사단에게 적대적이라는 이유로 파문당하고 나서야 끝났다.결혼 동맹으로 겨우 관계를 개선한 아르메니아와 안티오키아가 처음으로 나선 원정은 바로 룸 술탄국 정벌이었다. 보에몽의 아들 필립이 이끄는 아르메니아-안티오키아 연합군은 타르수스 산맥을 넘어오는 룸 술탄국 군대를 격파, 대승을 거두었다. 룸 술탄국은 안티오키아군이 아직까진 호락호락 하지 않음을 깨닫고 불리한 협정을 맺은 후 아나톨리아로 돌아갔다.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하던 두 나라의 동맹은, 종교 분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필리프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신봉하는 다수의 아르메니아 백성들과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그는 면전에서 사도 교회의 교리를 부정하고 가톨릭을 지지할 것을 백성들에게 권했으며, 아르메니아의 전통을 따르길 거부했다. 아르메니아 여왕 자벨은 백성들과 귀족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아르메니아 왕국의 단독 통치자가 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필리프 왕이 공국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고 소수의 기사들만 끌고 돌아오는 길에, 아르메니아 군이 그를 습격, 생포했다. 보에몽은 그의 아들을 되찾기 위해 애원도 해 보고, 압박도 해 보았지만, 아르메니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성전 기사단마저도 파문당한 보에몽을 군사적으로 지원해 줄 수 없었기에, 결국 필리프는 1224년, 아르메니아의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교황의 파문은 해제되지 않았다. 헝가리- 크로아티아, 신성 로마 제국이 주축이 되어 이끄는 십자군은 이미 1220년대 초부터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이집트의 여러 지역을 휩쓸며 어느 정도 선전을 거두고 있었지만, 일시적일 뿐이었다. 교황의 압박으로 어찌저찌 십자군에 참가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는 키프로스에서 대군주의 자격으로 십자군 공국들의 영주들을 소집했다.[23] 그곳에 나타난 보에몽은 거의 공기와 같은 비중밖에 가지지 못했다. 프리드리히는 파문당한 안티오키아 공작을 부정했으며, 그가 구호 기사단과의 원한 관계를 끝내지 않으면 파문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협박할 뿐이었다. 1229년, 프리드리히가 이끄는 십자군은 이집트의 술탄 알 카밀과 싸워 승리했으나, 십자군과 술탄의 평화 협정 조인식에 보에몽은 파문당했다는 이유로 서명하지 못했다. 1230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황 호노리우스가 파문을 갱신하였다. 구호 기사단이 레몽 루벤과 맺은 조약을 지켜 그들에게 영지를 내주지 않는다면 파문을 철회하지 않겠다는 요구는 덤이었다. 늙은 보에몽은 더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구호 기사단에게 상당수의 이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고령의 그는 프리드리히 2세와 십자군 국가들 사이의 이권 갈등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1233년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 보에몽 5세는 이어지는 지리멸렬한 십자군 전쟁에 별 역할을 하지 못했다. 구호 기사단은 공국에 계속해서 적대적이었고, 아르메니아도 공국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가 어찌저찌 1252년까지 공국을 이끄는 동안,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지원과 오랜 우방 성전 기사단의 도움만이 그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11.1. 몽골 일 칸국의 영향과 아인 잘루트 전투
1254년, 보에몽 5세가 사망하고 공작위를 이은 보에몽 6세는 15살이었다. 그는 공국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숙적 아르메니아의 공주 시빌라와 결혼했다. 마침내 안티오키아 공국은 아르메니아의 완전 속령이 되었다. 아르메니아의 헤툼 1세는 그의 공작위를 인정해주었고, 안티오키아에는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총대주교가 들어섰다. 어느정도 불만이 생겼으나. 힘이 없었던 안티오키아의 노르만 귀족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르메니아의 지배 하에 안티오키아는 안정되는 듯 싶었으나, 헤툼 왕의 치세 말년. 아르메니아 왕국도, 그 어떤 군대도 막지 못하는 폭풍이 레반트 지역에 드리우기 시작했다. 훌레구가 이끄는 대규모의 몽골 제국군이 서진을 시작하여,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소문이 십자군 귀족들에게 퍼지기 시작했다. 1258년에는 십자군을 지중해에 수장시킬 기세였던 아이유브 왕조의 시리아마저 내분으로 무너져 몽골의 말발굽에 짓밟혔다. 마침내 1260년, 훌라구의 첫 번째 선봉대가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 이미 몽골군의 위력을 알고 있었던 레반트의 십자군 국가들은 속속 몽골군에게 항복하고 연공을 바치는 대신 침탈에서 보호받기로 서약했다. 오직 예루살렘 왕국 본국만이 몽골군과의 친교를 거부하고 오히려 거대한 적 몽골을 상대하기 위해 맘루크 왕조를 지원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안티오키아의 상황은 훨씬 절망적이었다. 시리아는 이미 몽골 전초부대들이 휩쓸기 시작한 상태였다. 아르메니아와 안티오키아의 귀족들은 가망없는 옛 군주를 따르느니, 이슬람을 무너트릴 괴물과 손을 잡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1260년, 아르메니아 왕의 사절과 안티오키아 공작은 훌레구의 부관 키트부카[24]를 알현하고 알레포와 다마스커스의 맘루크 왕조를 공격하는 것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 해동안 몽골군은 레반트와 이집트 동부를 불태우며 십자군의 염원대로 이슬람을 멸절할 기세였다.그러나 그들의 서진은 레반트 지역에서 멈췄다. 키트부카는 감히 몽골군의 사신을 참수한 맘루크 왕조들을 토벌하기 위해 소집령을 내렸다. 최강의 몽골군이었지만, 주력은 바그다드 지역에서 새 체제를 굳히기 위해 선무중이었고, 전 군을 동원 할 수 없었기에 레반트 지역에서의 병력 차이는 맘루크군이 살짝 우세한 수준이었다. 소수의 안티오키아군도 키트부카의 소집령에 응해 아인 잘루트로 향했다. 그러나 무패의 몽골군은 핸드 캐논과 맘루크 중기병을 앞세운 이집트 술탄 쿠투즈와 바이바르스가 이끄는 맘루크군에게 패배, 지중해 주변에서 퇴각하고 손을 놓고 말았다. 일칸국의 몽골군 주력은 건재했고, 안티오키아 병력도 소수만 투입되었지만, 이 전투의 패배는 결국 안티오키아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12. 멸망
이후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의 대군은 안티오키아를 침공했다. 아르메니아는 전혀 도울 힘이 없었고, 시내에 살던 몇천 안 되는 십자군 기사들과 구호기사단원들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1268년, 맘루크는 성안으로 육박해 이 유서깊은 도시를 멸망시키고 불태웠다. 동로마 제국 이후로 번영하고, 공국의 손 아래서 마지막 불씨를 이어가던 고대 도시 안티오키아의 옛 모습은 바이바르스의 손에 사라졌다. 자비 없는 공격에 항복한 기사들은 모두 죽었고, 아녀자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공국이 세워진 지 정확히 170년 되던 해였다.13. 역대 군주
안티오키아 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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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성 우선 장자 상속제
[2]
라틴어로 '신께서 원하신다' 라는 뜻.
[3]
이슬람 제국 통화
[4]
동로마 제국 통화
[5]
그는 타란토의 영주를 자처했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영지도 가지고 있지 않은 빈털터리였다.
[6]
당시로 쳐도 대도시 수준의 인구였다.
[7]
십자군 전쟁 당시, 중동의 기독교도 그러니까 동방 기독교 신자들은 서방 가톨릭 교회를 믿는 십자군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십자군 측에서는 서방 가톨릭 교회를 동방 기독교보다 중시했기 때문에 동방 기독교 신자들은 십자군과 서방 가톨릭 교회측이 자신들을 홀대한다고 여겼던 탓이다. 다만 동방 기독교 종파들 중에서 마론파 교도들은 서방 가톨릭 교회와 그나마 사이가 온건한 편이었다.
[8]
안티오키아의 멸망이 목전에 있던 1263년에, 이미 전성기가 훌쩍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4만의 기독교인들과 10만의 비기독교인들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9]
보에몽을 다른 사람에게 팔면 자신이 공격하겠다고 했다. 협박에 가깝다(...)
[10]
돈에 더 가치를 두지 않는다면 가장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을 것이다. 어차피 룸 술탄국과는 휴전이고 뭐고 틈만 나면 싸워댔으므로.
[11]
보에몽 2세는 아직도 12살이어서 남이탈리아의 타란토에서 양육되는 중이었다.
[12]
피의 들판에서 죽은 섭정 루지에로와는 친척지간인 동명이인이다.
[13]
혹은 친 동로마파 아르메니아 영주들에게서
[14]
출처: 비잔티움 연대기 3권 -쇠퇴와 멸망- (존 줄리어스 노리치 저)
[15]
기록에 따르면 황제는 이슬람이었던
룸 술탄국의 사절보다도 레몽 공작을 하대하며, 초라한 행색을 비웃었다고 한다.
[16]
실제로는
정교회 총대주교는 아무 힘도 없었고 계속해서
라틴 총대주교가 실세로 라틴 전례를 퍼트리고 있었다.
[17]
거기에 더해 엘레오노르가 레몽과
근친을 한 정황까지 발견되기까지 했다.
[18]
동로마와 아르메니아인들은 그런 그를 두고 산 속의 왕이라고 조롱했다.
[19]
그는 상대적으로 쉽게 풀려날 수 있었는데, 누르 앗 딘이
마누일 1세의 거병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20]
그는 1179년
마누일 1세의 동로마와 동맹을 맺었던 데다,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내어
이사키오스 2세와 개인적 친분도 있었다.
알렉시오스 브라나스 형제가 이사키오스 2세에게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진압하여 큰 상을 받기도 했다.
[21]
이러한 봉기는 시민들이 만들어낸 중세적 공화주의 조직, 즉
코뮌이 주도하였는데, 코뮌 운동 자체는 비슷한 시기 서유럽
도시들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이 지역에서는 인접한
동로마 제국의 시민으로서 축적한 경험을 토대로 그들 공회에서 따온 방식으로 운영하였으리라 추정된다. 이들은 이후에도 계속 조직되어 안티오키아의 정계에 영향을 주었다.
[22]
1198년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는
가톨릭과의 일치를 천명하였다. 레오 왕은 교황의 특사에게 가톨릭에 귀의하는 대신 안티오키아 공작위를 요구했을 공산이 크다.
[23]
그는 예루살렘 여왕 이사벨 2세와 결혼해 명목상 예루살렘의 왕 칭호도 가지고 있었다.
[24]
그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신자였기에 기독교 영주들에게 긍정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