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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트베르펜/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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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
1.1. 안트베르펜의 성립1.2. 안트베르펜의 발전과 부상1.3. 스페인의 지배와 해방1.4. 현대 안트베르펜의 성립

1. 역사

1.1. 안트베르펜의 성립

안트베르펜이 처음에 발전을 시작했을 시기에는 플란데런 지역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해 있던 플란데런 지역은 해양과 인접한 저지대 지역에서도 가장 도시가 발전하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이렇게 발전한 도시 중에서도 가장 인구가 많았던 대표적인 도시는 상대적으로 해양에 가깝던 겐트, 브뤼헤였고 해양에서 조금 떨어져 있던 안트베르펜, 브뤼셀도 대표적인 도시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런 도시의 발전을 바탕으로 플란데런 지역은 엄청난 가치를 가진 지역으로 부상했고 독립적인 영향력도 행사하기 시작했다. 당시 브뤼셀을 지배하고 있던 브뤼셀 백국은 1200년 무렵에 브라반트 공국을 선포하고 림부르크 공국을 병합하면서 세력을 늘려 나갔는데 이런 상황에서 안트베르펜 브라반트 공국에 속하게 되었다. 룩셈부르크 공국 브라반트 공국과 동군 연합을 결성하자 당시 강력한 도시였던 겐트, 브뤼헤를 지배하고 있던 플란데런 백국이 영향력이 커져가는 브뤼셀을 저지하기 위해 브라반트 공국을 침공했다. 안트베르펜 브라반트 공국 플란데런 백국의 전쟁으로 서로가 점령하는 상황을 반복하게 되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갈등이 지속적으로 일어났고 브라반트 공국은 당시 영토를 확대해 영향력을 늘렸던 부르고뉴 공국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이것을 기회로 부르고뉴 공국은 오히려 브라반트 공국을 점령해 버렸고 1450년 무렵에는 다른 지역과 합쳐버렸다. 부르고뉴 공국 플란데런 지역을 비롯한 저지대 지역을 대부분 점령하지만 이후 부르고뉴 공국이 없어졌고 저지대 지역이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넘어가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가 될 때 안트베르펜도 같이 지배를 받게 되었다.

1.2. 안트베르펜의 발전과 부상

안트베르펜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기 전부터 플란데런의 다른 대표적인 도시처럼 이미 수만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 번영하는 도시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저지대 지역을 모두 점령하고 영토를 새로 개편하면서 안트베르펜은 독립된 지역으로 분리되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를 강화하자 안트베르펜은 다른 플란데런 지역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과거 서로 경쟁하는 관계였던 플란데런 지역의 대표적인 도시들은 같은 입장이 되었다.

이어서 저지대 지역을 지배하게 된 합스부르크 가문의 스페인령 네덜란드가 저지대 지역을 모두 합치고 직접 지배를 할 것을 선포하자 네덜란드 지역의 여러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플란데런 지역은 처음에는 개입을 하지 않았지만 스페인에게 지속적으로 침탈을 당하자 결국 겐트, 브뤼헤가 있는 플란데런, 안트베르펜이 있는 안트베르펜, 브뤼셀이 있는 브라반트가 반란에 가담해 버렸다. 저지대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들이 가담했지만 플란데런 지역은 제압을 당해 다시 스페인의 지배에 들어가게 되었다.

반란이 끝나고 해양에 가까웠던 겐트, 브뤼헤는 인구가 조금 줄어들어 버렸지만 안트베르펜, 브뤼셀은 인구가 조금 늘어나 플란데런 지역의 핵심 지역이 안트베르펜 등으로 바뀌게 되었다. 네덜란드 지역과의 전쟁이 끝난 1609년 안트베르펜의 인구는 50,000명으로 여전히 많은 인구를 보유했다.

1.3. 스페인의 지배와 해방

다시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된 안트베르펜 플란데런 지역의 대표적인 도시로 영향력이 떨어진 플란데런 지역을 안정시키는 일에 참여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종결되고 플란데런 지역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계속 받았는데 전쟁이 시작된 1700년에 안트베르펜의 인구는 70,000명으로 증가했다.

유럽에서 혁명이 시작되자 벨기에 지역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고 이후 잠시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가 네덜란드에 편입되었다. 당시 플란데런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안트베르펜도 인구가 조금 감소되는 타격을 받았다. 벨기에 네덜란드의 지배에서 다시 벗어났는데 당시 벨기에 지역의 도시들은 여전히 인구가 많았지만 네덜란드의 도시에는 미치지 못했다.

1.4. 현대 안트베르펜의 성립

벨기에가 독립했을 시기에는 유럽의 도시에서 엄청난 성장이 일어나기 시작해서 안트베르펜도 엄청난 인구 성장이 진행되었다. 원래부터 안트베르펜 벨기에에서 인구가 많은 편인 상당한 규모를 가진 도시였지만 이 시기에 안트베르펜은 인구 수십만명에 달하는 도시로 성장했다.

안트베르펜의 인구가 어느 정도 확립되고 나서는 증가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다. 안트베르펜의 인구는 50만명이고 안트베르펜 도시 광역권의 인구는 120만명에 달한다.

오래 전부터 벨기에에서 대도시라는 말은 브뤼셀이 아닌 안트베르펜을 의미했다. 그래서 아직도 네덜란드어로 자신이 도시로 간다(Ik ga naar t’stad)는 말은 안트베르펜으로 간다는 의미다. 자신들을 지칭하는 안트베르펜 시민(Antwerpenaar)이라는 표현을 굉장히 강조하기도 한다.

심지어 브뤼셀을 제치고 플란데런의 실질적인 수도로 여겨지기도 할 정도다. 플란데런의 법적인 수도는 브뤼셀이고 모든 정부 기관이 브뤼셀에 모여 있지만 안트베르펜에는 산업 전반과 관련된 기관들이 많이 분산되어 있다.

벨기에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이 있는 도시 중 하나로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의 출신들이 모여서 살아가고 있다. 항구 도시면서 동시에 상업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벨기에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 빠른 편이다. 동시에 주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지역의 다른 국가들의 침략 등의 영향으로 안트베르펜 시민들 사이에서 서로 단결하기도 하는 등의 배타성도 가지고 있다. 인종 등보다도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안트베르펜 말(Antwarps)을 구사하는지가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정치적으로 왈롱과 대척점에 있는 도시로 플란데런 민족을 우선시하는 활동이 활발한 지역 중 하나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플란데런 민족을 강조하는 경우에는 인종을 중심으로 하는 것에 비해 안트베르펜은 인종보다는 출신 도시나 고향을 기준으로 나누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이런 집단에서는 플란데런에서 태어나서 벨기에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신 플란데런인(Nieuwe Vlaaming)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고 서로 싸우다가도 벨기에 연방 정부나 프랑스어 사용 지역에 대해서는 정당을 가리지 않고 네덜란드어 사용 지역을 중심으로 단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