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중양(仲陽) / 송은(松隱) |
본관 | 탐진 안씨[1] |
출생 | 1866년 10월 1일 |
경상도 의령현 부산면 입산동 (현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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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1년 8월 13일 |
중국 지린성 장춘현 삼성보[3] |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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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진령군을 탄핵한 강직한 유학자이자 독립유공자인 안효제는 그의 이복 형이다.
2. 생애
안창제는 1886년 10월 1일 경상도 의령현 부산면 입산동(현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아버지 안흠(安欽)과 어머니 안동 김씨 김진락(金鎭洛)의 딸 사이의 7남 1녀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4] <순흥안씨대동보>에는 1883년( 고종 20) 9월 무과에 급제하여 1892년(고종 29)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사과(龍驤衛司果)에 제수되었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 다만, 매천야록에서 1894년 안창제가 청나라를 배반하고 개화파들을 처형하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릴 때 신분이 전 사과(前司果)인 것을 보면, 정6품 사과 벼슬을 지낸 것은 확실하다. #그는 1894년 갑오개혁이 발표되자, 그는 갑오개혁을 주도한 개화파들을 처형하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가 금부옥(禁府獄)에 감금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가자 3차례 상소를 올려 을사오적을 참수할 것을 청했지만 회답을 받지 못했다.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그는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단장 박장호와 협력하여 결사대를 파견해 일본 경찰과 밀정을 다수 사살했다. 1919년에는 중국에서 조직된 전국유교연맹의 동삼성 학회 분회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1931년 8월 13일 지린성 장춘현 삼성보에서 장쉐량의 봉천군벌 병사들에게 일가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안창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24세 제(濟) 항렬.
[2]
탐진 안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안효제·
안희제와 제헌 국회의원
안준상,
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도 이 마을 출신이다.
[3]
1931년 7월 1일
만보산 사건이 일어났던 그 마을이다. 현재는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창춘시 콴청(寬城)구 싼싱바오(三姓堡)로 남아 있다.
[4]
아버지 안흠에게는 세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정실 부인인
인천 이씨 이민의(李敏儀)의 딸로부터 이복 형
안효제와 안필제(安弼濟), 안영제(安英濟)가 태어났고, 둘째 부인이자 안창제의 생모인
안동 김씨 김진락(金鎭洛)의 딸로부터 친형인 안윤제(安潤濟)와 안창제 자신이 태어났다. 이후 셋째 부인인
광산 김씨로부터 이복 동생인 안신제(安信濟)와 안달제(安達濟)가 태어났다. 이는 1883년(고종 20)에 식년시 문과에 급제한 이복 형
안효제의 문과방목의 안항(雁行) 기록과도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