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순중(舜仲) / 수파(守坡) |
본관 | 탐진 안씨[1] |
출생 | 1850년 3월 3일 |
경상도 의령현 부산면 입산동 (현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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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16년 12월 17일 |
만주 안동현 접리수[3]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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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안창제는 그의 이복 동생이다.
2. 생애
안효제는 1850년 3월 3일 경상도 의령현 부산면 입산동(현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아버지 안흠(安欽)과 어머니 인천 이씨 이민의(李敏儀)의 딸 사이의 7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4] 1883년( 고종 20) 식년시 문과에 병과 19위로 급제하였다. #그는 정6품 사간원 정언(正言)을 지냈으며, 명성황후의 총애를 등에 업고 막대한 부를 축적하던 무당 진령군을 탄핵했다가 추자도로 귀양갔고, 3년 후 유배가 풀린 뒤 벼슬이 내려졌지만 사양하고 낙향했다. 1896년 8월 을미사변 소식을 접한 그는 즉시 상경하여 당시 참판을 역임하고 있던 최익현과 만나 국권을 회복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임금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다며 의병을 거부하고 자택에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세상에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입산했다. 그해 11월 일제가 은사금을 줘 그를 회유하려 하자, 그는 대한의 신하로서 나라가 망하였는데도 죽지 못한 것이 죄스럽다 하고 거부했다가 창령경찰서에 구금되어 고초를 겪었다. 1912년 이복 동생인 안창제의 뒤를 이어 만주 안동현 접리수로 망명하여 노상익, 신백우 등과 함께 접리수에 한인촌을 조성하고 이주 한인들의 권익 보호 및 생활 향상을 위해 노력하다가 1916년 12월 17일에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안효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24세 제(濟) 항렬.
[2]
탐진 안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안창제·
안희제와 제헌 국회의원
안준상,
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도 이 마을 출신이다.
[3]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단둥시 전싱(振興)구 핑허다(平鶴大)선 제리수(接梨樹)촌.
[4]
아버지 안흠에게는 세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정실 부인이자 생모인
인천 이씨 이민의(李敏儀)의 딸로부터 안효제 자신과 친동생 안필제(安弼濟), 안영제(安英濟)가 태어났고, 둘째 부인인
안동 김씨 김진락(金鎭洛)의 딸로부터 이복 동생인 안윤제(安潤濟)와
안창제가 태어났다. 이후 셋째 부인인
광산 김씨로부터 또 다른 이복 동생인 안신제(安信濟)와 안달제(安達濟)가 태어났다. 이는
안효제의 문과방목의 안항(雁行) 기록과도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