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22:14:16

안광천

파일:조선공산당 마크.png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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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안광천.png
본명 안효구(安孝駒)
이명 노정환(盧正煥), 사공표(司空杓), 임재일(林在一), 호우생(乎于生)
출생 1897년
경상남도 김해
사망 미상
사망지 미상
정당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항일운동가, 공산주의자.

2. 생애

1923년 1월 김해청년회를 조직하면서 독립운동에 뛰어 들기 시작했고, 8월에는 북성회 순회강연을 계기로 사회주의사상 연구를 위해 제사회를 조직하였다.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북성회에 가입하였고, 1925년 1월 하필원, 박낙종과 같은 동지들과 함께 함께 북성회를 해체한 뒤 일월회를 조직했다. 일월회의 상무집행위원으로 강령을 기초했고, 기관지 『사상운동』에 각종 논설을 기고했다. 1925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결성에 참여했고, 11월에는 재일본 각 부문 운동의 통일을 위한 관동조선무산계급단체협의회의 조직을 주도했다.

1926년 1월 파쟁 청산을 위해 북풍파의 사상운동 단체인 신성회를 해체하게 했다. 그해 2월 조선기근구제회에 수재의연금을 전달하기 위해 도쿄에서 귀국하였을 때 화요파와 서울파가 통합할 것을 권유했다. 3월에 다시 도쿄로 가서 내지운동연구회의 명의로 ‘분립으로부터 통일에’라는 리플릿을 발행하여 사회주의운동의 통일을 주장했다. 이 시기 박낙종, 하필원 등과 함께 허장환을 책임자로 하는 혁명사 도쿄지부를 조직했다. 허장환이 귀국한 후 책임자가 되었다. 그해 3월에는 『통속사회주의경제학』을 일월회의 권독사 팸플릿으로 발행했다.

1926년 여름 하필원과 함께 귀국하여 9월에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같은 해 10월 정우회에 가입했고, 상무집행위원과 서무부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경제 투쟁에서 정치 투쟁으로의 방향 전환과 민족협동전선 결성을 촉구하는 ‘정우회선언’을 기초해 11월 15일 발표했다. 12월 6일 조선공산당 제2차 당대회에서 책임비서가 되었다. 이후 정우회 해체와 신간회 결성을 주도했다.

하지만 조선공산당 내의 비 ML파의 비판과 함께 1927년 9월 영남친목회 사건으로 ML파 내부의 비판으로 책임비서직에서 물러나 선전부원으로 강등되었다.그해 11월 『조선지광』에 「신간회와 그에 대한 임무」를 발표하여 헤게모니 전취론을 당면 과제로 제시했다. 1928년 2월 조선공산당 정치부장이 되었고,「민족해방운동에 관한 논강」을 작성했다. 그해 5월 아내 이현경을 불법으로 복당하게 한 문제로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로부터 당규 문란을 이유로 해임되었다. 이후 상하이로 망명했다.

1929년 북경에서 김원봉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 레닌주의』를 발행하는 한편, 1930년부터 1931년까지 레닌주의정치학교에서 양성한 20여 명을 당 재건운동을 위해 국내에 파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