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33:04

아웅 산 수 치/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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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치 스타일
2.1. 독재적 성향의 지도자?
3. 로힝야 제노사이드에 대한 방조
3.1. 국제사법재판소에서 군부 옹호3.2. 로힝야족의 특수성3.3. 아웅 산 수 치에 대한 지지 양상의 특수성3.4. 현재 로힝야족이 걷는 행보의 문제점과 여론3.5. 사실상 욕받이였던 아웅 산 수 치
4.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중국 지지 논란5. 언론 탄압6. 반박: 정권 유지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

1. 개요

아웅 산 수 치 노벨평화상 수상자 중 가장 평판이 나쁜 인물로, 과거 민주화 운동가로서 주장했던 여러 철학과 비전들을 정작 고문이 되고 나서는 수 치 자신이 정면으로 어기고는 미얀마의 독재자들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실상 과거의 명성에 빛이 바랜 상태다. 오죽하면 권력을 잡자마자 제대로 타락했다는 비난을 받으며 수 치의 노벨평화상을 박탈하라는 이야기마저 자주 들릴 정도다.[1] 특히 국제앰네스티는 수 치한테 수여한 양심 대사상을 박탈하기도 했다.[2] #

한국에서는 이름인 아웅 산 수 치 수치라는 한국어 단어와 발음이 유사하다는 점 때문에 '아웅 산의 수치', '아웅 산 수치스러운 여사' 등의 이름을 이용한 별명으로 비난받기도 한다. 언론에서도 이름 장난으로 기사 제목을 뽑기도 했다. #[3]

2. 정치 스타일

2.1. 독재적 성향의 지도자?

수 치는 자신이 이끄는 NLD가 미얀마 총선과 대선에서 모두 승리한 후 대통령도 아닌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겠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는데 #, 이것이 권위주의적이고 헌법을 무시하는 발언이라는 비판이 있다. 수 치가 미얀마의 민주화 투쟁을 한 것은 실로 대단한 공적이지만 이러한 발언들은 그간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 수도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게다가 민주화 투쟁을 했었다고 해서 그것이 이제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자를 무너뜨리기 위해 민주화 투쟁을 한 수 치가 한 말 치고는 큰 문제를 주는 말이다.

사실 독재와 억압에 저항했던 민주 투사나 저항 운동가들이 막상 독재를 무너뜨리고 기성 정치인이 된 후에 타락하거나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는 많았는데, 군부가 물러선 후 정권을 잡은 수 치도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투쟁 시에는 비타협과 굽히지 않는 고집이 미덕으로 작용하지만 민주주의 정치는 타협의 산물이기 때문에 운동가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능력과 품성이 요구되는데, 많은 독립 투사나 민주화 영웅들이 이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단적인 예로 아프리카의 악명 높은 독재자들 상당수가 2차 대전이나 내전 시기에 저항 세력을 이끌었던 인물들이었다.

아웅 산 수 치의 경우도 정치에 참여한 2년 동안 미얀마 시민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4] 정치가는 아무리 처신을 잘해도 100%의 지지를 얻을 수 없는 직업이기 때문에 정치인이 된 아웅 산 수 치에게 불만을 갖는 국민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지만, 저항 운동가 시절의 개혁 성향이 사라지고 기성 정치판에 물든 노회한 정치꾼이 되어 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아웅 산 수 치에 대한 비판자들은 군부와의 애매한 공존을 유지하려 한다거나 너무 권력집중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다.

이미 수 치는 전술한 NLD 의장 시절에도 운영에 다소 독단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미얀마가 민주화가 된 후 그녀의 이런 단점은 더욱 부각되고 있어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불통 정치인이라는 평을 받고 있으며, 군사 독재 시절 저질러진 군부와 기업들의 부정부패 청산에도 눈을 감고 있어서 개혁 정치가가 아니라 또 한 명의 기득권 정치인이 되어버렸다는 비아냥도 듣고 있다. #

여타 서방의 언론들과 함께 아웅 산 수 치를 찬양하던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2017년 10월 31일 '아웅 산 수 치에게 세계가 잘못했나' 라는 제하의 해설기사를 통해 수 치가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 수준은 아니더라도 독재자들의 성향을 노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수 치가 미얀마의 자유 민주화를 위한 투사라는 이미지 자체가 세계가 수 치를 확증편향적으로 해석하며 수 치의 긍정적인 면만을 취사선택한 결과라는 것이다. 수 치가 집권하는 과정에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상황이 자주 있었으나 서방은 이를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대니엘 루프턴 콜게이트대 정치학 교수는 수 치를 사례로 거론하며 "우리가 자꾸 외국 지도자들을 이상화하거나 악마화하는 상황에 빠진다"고 규정하며 "자신의 믿음을 강화하는 정보만 무의식적으로 골라 수용하고 어긋나는 정보는 배척하게 된다는 정치 심리학의 개념인 '확증편향'"이 수 치와 그 지지자들에게 강하게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또한 뉴욕타임즈는 수 치가 권력을 얻는 과정에서 자신을 지원한 시민 사회단체의 활동가들을 재빨리 배척하며 자신 주위에 예스맨으로 통칭되는 무비판적인 측근들만을 기용했으며, 군부통치 때 반체제 인사들이 투옥된 것과 똑같이 수십 명이 수 치 정권 하에서 정부의 비판을 제약하는 법 때문에 기소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들며 수 치의 '배신'을 보도했다. 호주 시드니의 로위연구소 연구원인 애런 코넬리 역시 수 치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통치 성향을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굳이 로힝야족 문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수 치라는 인물이 원래 자유 민주적인 지도자는 아니었다고 분석한 점 역시 거론되며 아웅 산 수 치라는 정치 지도자의 이미지가 확증편향의 전형적인 산물이라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2017년 11월 1일 네이버-연합뉴스 '세계가 아웅 산 수 치에 속았나'…NYT 독재기질 안봤나못봤나 지적

3. 로힝야 제노사이드에 대한 방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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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힝야 족이 거주하고 있는 마을에 불을 질러 주민 전원을 살해하는 장면.

인구 대다수가 불자인 미얀마는 군사 독재 시절부터 불교를 믿지 않는 소수민족들, 특히 로힝야 족의 시민권을 무효로 하고 방글라데시에서 온 불법 거주자로 규정해 국제적 감시망과 국제법의 빈틈에서 소수민족들을 학살해 왔다.[5] 이 과정에서 수만 명의 소수 민족들이 끔찍한 인권 탄압(살해, 강간, 폭행)을 당하고 있고, 많은 소수 민족들이 탄압을 피해 방글라데시로 피난을 가는 상황이다. 유엔은 이 심각한 인권 침해에 대해 전부터 우려를 표해 왔으며, 국제인권감시기구는 로힝야 족에 대한 탄압을 제노사이드로 보고 있다. 미얀마 정부는 전부터 학살 자체를 부인해 왔으며 현장에 대한 언론과 국제 기구의 접근을 제한하고 정보를 차단해 왔다.

군부 독재가 끝나고 민주 정권이 들어서면서 제노사이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으나, 아웅 산 수 치는 이 문제에 대해 비정상적일 정도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제노사이드에 관한 질문이 나올 때마다 수 치는 단순한 조작, 루머일 뿐이라는 식으로 질문을 웃어넘기고 있다. # 다른 언론 인터뷰에서는 외신이 조작한다는 말을 했다. #

유엔은 아웅 산 수 치를 향해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라고 주문했고, 미얀마 주재 서방 외교관리들은 사실확인과 피해자인 로힝야 족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위한 현장 접근을 요구하고 나섰다. # 결국 아웅 산 수 치는 아세안 회의에 참석해 해명을 했다. # 또한 이슬람 국가에서도 이에 대한 비판이 강한데, 로힝야 족은 이슬람교도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아웅 산 수 치의 노벨평화상을 박탈해야 한다는 시위도 일어났다. 군부에 대항하던 아웅 산 수 치의 든든한 조력자였던 서방언론에서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수 치에 매우 비판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BBC-왜 아웅 산 수 치는 행동하지 않는가? 워싱턴 포스트-아웅 산 수 치의 수치스러운 침묵 뉴욕타임즈-노벨평화상의 굴욕 유엔 또한 "미얀마의 학살은 교과서적인 제노사이드" #로 규정하였다.
다만 이 문제는 미얀마 내의 굉장한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아래의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이것이 왜 일어났는지를 면밀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이유를 두고서도 학살이라는 행위 자체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부분인 만큼 무조건적인 긍정도, 맥락없는 부정도 경계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아웅 산 수 치는 이후에도 로힝야 족 탄압을 지지하고 제노사이드를 방조해 국제 사회는 결국 아웅 산 수 치도 공범자로 보고 있다. 2018년에는 아웅 산 수 치가 수상했던 많은 상과 명예 시민권이 박탈당했고, 노벨평화상은 위원회가 박탈이 불가능하다고 밝혔지만 국제사회는 아웅 산 수 치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 중에는 국제엠네스티의 '양심대사상(Ambassador of Conscience Award)'을 철회했다. #

3.1. 국제사법재판소에서 군부 옹호

2019년 11월 11일에 무슬림 국가인 감비아 이슬람협력기구(OIC)를 대신해 미얀마를 로힝야족 집단학살 혐의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였다. 동년 12월 11일에 아웅 산수 치는 미얀마 정부 대표 대리인자격으로 재판에 피고로 출석하였다.

결과만 말하면 아웅 산 수 치는 군부의 행위를 옹호했고 이번 사건을 계기로 과거부터 로힝야 족 탄압과 학살에 대해 방조와 묵인, 미얀마군의 '인종청소' 보도와 주장을 가짜 뉴스라고 비방하면서 조금씩 상실해오던 국제사회의 아웅 산수 치에 대한 지지와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이자 인권 수호자라는 명성을 누리며 가지고 있던 위상을 상실한다.

아웅 산 수 치는 재판에서 미얀마 군부를 옹호하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늘여놓는다. #
  • 미얀마군이 로힝야 반군의 공격에 대응한 것
  • 인종학살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없다.

로힝야족 탄압과 학살은 아무리 역사적 배경과 미얀마인들의 미움에는 이유가 있다고 미사여구를 붙여도 이미 도를 넘을때로 넘은 상황이다. 오죽하면 유엔 안보리에서 만장일치로 로힝야족 사태에 대해 공식 규탄을 했을 정도. 그 중국조차도 동참할 정도였다. #

국제사법재판소는 아웅 산수 치의 로힝야족 학살에 대한 미얀마 군부에 대한 변명을 인정하지 않고 미얀마에서 로잉야족에 대한 집단 학살을 벌여왔으며 미얀마 정부에 소수민족 로힝야족 집단학살을 막기 위해 권한 내의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명령했다

3.2. 로힝야족의 특수성

우선 이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로힝야족의 역사적 특성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로힝야란 말의 첫 언급은 아라칸의 영국 식민지화 이전인 1799년 Francis Buchanan-Hamilton의 "Burma Empire"란 책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 책에서 로힝야를 언급하는 부분은 "아라칸에 오랫동안 정착한 무슬림들은 자신들을 루잉아(rooinga) 혹은 아라칸의 원주민이라고 부른다."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것이 대중화된 표현은 아니었고, 데렉 토킨의 경우 해밀턴이 이후 출판물에서 루잉아란 표현을 아라칸의 무슬림들에게 쓴 적이 없다고 말하며 이때 로힝야족이 정말 있었느냐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로힝야 자신들도 쓰는 표현이 두개에다가 로힝야란 표현을 해밀턴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만들어내기도 힘들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그리피스 대학의 앤드류 셀스 교수처럼 일부 로힝야는 토착민이지만 대부분의 로힝야가 영국 식민지 시기 이주한 벵골 출신 이주민이라고 보고 있다.

어쨌든, 현재의 로힝야족의 대부분은 영국 식민지 시절 이주 노동자로 버마에 온 인도계 벵골인들, 즉 무슬림들이다. 실제로 1990년대까지 미얀마인들은 로힝야족을 벵골인이라고 불렀으며, 이들의 언어 또한 미얀마어와 전혀 관계가 없어서 미얀마인과는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이들의 언어는 치타공어와 단어 몇 개가 다른 수준일 뿐 억양마저 동일하여, 벵골어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언론기사에서 종종 다루는 바와 같이 로힝야 난민과 방글라데시, 인도 서벵골 주의 사람들은 자유롭게 의사소통이 된다.

역사적으로 로힝야족, 미얀마인들이 벵골인이라 불리는 이들 집단은 영국 식민지 시절 영국과 결탁하여 스스로의 기득권을 키우려 했던 집단이었으며, 이들의 이주 과정에서 미얀마인들은 자신의 땅을 이들에게 빼앗겼다고 인식하였다(그리고 이건 엄연한 사실이다.). 또 영국은 자신들의 편에 있던 로힝야족을 무장시켰고, 이들을 활용하여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정작 일본인과 싸운 게 아니라 미얀마인들을 학살하였고, 자신들과 종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불교 사원을 부수고 승려를 학살하는 등 종교 갈등을 일으켰다. 즉 일제 강점기 시대를 기준으로 보면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과 일제의 식민지였던 대만에서 살던 중국인 한족 친일파들이 일본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한국으로 이주해와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한국인을 학살, 착취하며 지배권을 행사한 것과 비슷한 상황으로 볼 수 있다.

현재는 라카인 주에만 로힝야족이 존재하지만 식민지 시대 당시에는 미얀마 전토에 이런 뱅갈인들의 농장이 널려있었고 따라서 미얀마 일대에 거주하는 모든 민족들에게 자기땅을 빼앗은 원수로 받아들여졌다. 시작부터 이들은 농민에게 농경지를 빼앗는 "불구대천의 원수"의 조건을 가지고 시작했고 끊임없이 문화/종교적 갈등을 일으키던 찰나에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인이 일본과 항전하라고 로힝야인들을 무장시키자 이들이 싸우라는 일본인과는 안 싸우고 불교사원을 부수고 불교도를 미얀마 전토에서 25,000명을 학살해 모든 소수민족에게 제대로 원한을 남겼다. 미얀마 독립 이후에 이 벵골인들을 전부 추방시키려고 방글라데시 국경지대로 강제 이주시켰고 그게 현재 라카인 주에 집중되어 살고 있는 로힝야족의 시작이 되었다.

따라서 로힝야족에 대한 증오도는 미얀마 정부에 의한 것보다도 오히려 미얀마인들 내부의 증오가 더 큰 부분이며, 미얀마인들은 로힝야족을 아예 미얀마 내의 소수민족으로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애초에 로힝야란 단어를 거부하고 벵골인이라고 여전히 이들을 지칭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리고 오히려 이 관계에서, 중심 민족인 버마족은 열외로 빠져 있다. 로힝야족의 현 거주 지역이 버마족 거주 지역과 상관이 없는 아라칸 지역이기 때문.

실제로 현 시점에서 로힝야족과 직접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것은 라카인 주의 원주민인 아라칸족들과 카미족 등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인 1942년 로힝야족에 의한 아라칸인 2만명 학살이 오히려 선행 사건이고, 그 이후 동파키스탄, 지금의 방글라데시에 2차례에 걸쳐 아라칸 합병을 청원하기도 하였다. 즉 IS에 협조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사건이지만, 그전부터 분리주의를 주장하고 미얀마인들을 공격한 집단은 어쨌든 로힝야족이 먼저인 것이 사실이며, 차별을 받았던 게 아니라 차별을 시켰던 쪽이 로힝야족이다.

미얀마 전토의 벵골인들을 모두 모으면 미얀마 전체 인구의 2% 미만의 비중을 차지하지만, 라카인 주[6]에 한해서는 30% 이상을 차지했고, 현재는 전체 인구의 약 40% 넘게 차지하여 절반을 살짝 넘기는 아라칸족의 뒤를 바짝 쫓고 있는 모양새다.[7] 이에 라카인 주에 살고 있었던 원주민인 아라칸족과 카미족이 로힝야에 매우 강경한 입장을 보이며 우리에게 짐더미를 떠넘겼다고 버마족 및 다른 소수민족들을 원망하고 있고 버마족과 다른 소수민족들은 이런 원망에 일정부분 책임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런 측면 때문에 소수민족들끼리 연대하여 버마족을 경계하는 미얀마의 정치상황에도 불구하고 로힝야족은 모든 소수민족 + 버마족의 혐오와 경멸을 사고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로힝야 문서 참조.

3.3. 아웅 산 수 치에 대한 지지 양상의 특수성

이 사건의 문제를 버마족의 민족주의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로힝야족의 특수성 항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절대적으로 오류이다. 애초에 로힝야족을 가장 증오하는 이들은 버마족이 아닌 아라칸, 카미 등 로힝야족들이 살고 있는 미얀마 남서부 라카인 주의 소수민족들이다. 그리고 정말 의외로, 이 소수민족 세력들이 아웅 산 수 치에 대한 가장 큰 지지층이다.

동남아시아 지역은 열대우림 지역이라 교통이 편리하지 못해 현재까지도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존재한다. 아프가니스탄과 마찬가지로 고립된 환경으로 인한 부족적 전통이 강해서 소수민족의 반중앙정부 정서, 나아가 분리독립 문제가 심각하여 미얀마 내에서만 해도 소수민족들은 독자적 반군 활동을 하며 수십년간 미얀마 군부에게 저항해왔다. 이들의 10년이 넘친 오랜 분쟁끝에 반군의 지역주도권을 어느정도 인정한채로 이들을 미얀마군으로 끌어들여 평화협정을 맺은게 현재 미얀마의 정치적 상황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중요한 인물이 아웅 산 수 치가 된다.

애초에 이것은 아웅 산 장군부터 따지고 들어가야 하는데, 아웅 산 장군은 2차대전중 미얀마 독립을 이끌어내기 위해 소수민족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들의 지지와 미얀마로의 합류를 얻어내기 위해 노력하였던 인물이다. 그 과정에서 소수민족들에 대한 우호적 여론은 물론 그들을 평등하게 대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던 것도 그였다. 그러나 아웅 산 장군의 사망 이후 군부 독재 시기를 거치면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소수민족들의 독립 운동도 이에 대한 불만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니까 즉 버마족 중심주의를 상징하는 세력은 오히려 군부이며, 아웅 산 장군의 딸로서 버마족과 소수민족들의 공존이라는 그 유지를 잇는 인물이 되는 아웅 산 수 치는 소수민족과 버마족 통합의 대변자로서 미얀마 국내에서 위치하고 있었다. 실제로 미얀마의 민주화는 국회의석의 25%를 군부가 지정하는 식의 불안정한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민주 정부는 버마족의 표도 우세했지만 카렌, 카친, 샨, 아라칸 등 미얀마내 소수민족들의 몰표에 힘입어 이루어진 면이 크다. 즉 아웅 산 수 치가 가진 미얀마 내에서의 정통성은 아웅 산 장군의 후손이라는 특수성과 함께, 사실상 유일하게 버마족과 소수민족들간의 통합을 이끌수 있는 유일한 구심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웅 산 수 치는 자신을 지지해준 소수민족들을 외면할 수 없으며, 그들이 가장 증오하는 대상인 로힝야족을 옹호하는 행위는 바로 실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중대 문제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 정부가 온정적으로 대처한다면 기껏 이룩해놓은 민주주의 정부의 지지율이 바닥을 뚫고 내려가고 군부가 재집권할지도 모른다. 로힝야족에 대한 온정적인 발언 한마디면 누구라도 소수민족들의 공적이 됨과 동시에 매국노로 몰릴 수 있는 상황이라, 미얀마 정치인 중에서 로힝야에 대해 온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발언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버마 민족주의가 그간 나타내온 행보 또한 문제가 된다. 다른 민족을 앞세워서 또 다른 소수민족을 탄압하는 미얀마 정부의 이이제이는 실제로 네윈 군사독재정부 시대에 흔히 시행된 방법이었다. 버마족이 주도하는 미얀마 중앙정부가 로힝야 족에 대한 포용정책을 펼치기 어려운 것은, 아라칸족과 카미족 등의 라카인 주의 토착 소수민족 입장에서는 "버마족 이 개자식들! 로힝야족을 이용하여 원주민인 우리 부족을 몰살한 후에 버마족을 이주시키려 하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주장을 통해 반군활동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카인 주의 로힝야족을 버마족들의 중앙정부가 보호한다면 최소한 카미족은 평화협정을 파기하고 다시금 무장투쟁에 나설 것이다. 이 경우 또 다시 전국적 내전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8] 카친족, 카렌족, 샨족 반군을 진압하는데 20년이 넘게 걸렸는데 카친족 반군이 봉기한 주 원인 중 하나가 카렌족 반군의 봉기로 인한 버마족 군 역량 저하였다. 소수민족의 봉기는 이렇게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미얀마 군부는 더 경계하는 것이다.

즉 로힝야족 부분에서는 군부든 아웅 산 수 치 측이든 이해 관계가 일치하고 있는 상황이며, 로힝야족을 제외한 모든 미얀마 민족, 즉 버마족이든 아라칸족이든 카렌족이든 모두가 로힝야족을 증오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어느 정도 로힝야족이 자초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이것도 본질적으로는 영국의 디바이드 앤 룰이 남긴 잔재라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더욱 어려워진다.

더구나 아웅 산 수 치 본인의 개인사적 문제도 있다. 로힝야 문제의 국제적 스폰서는 그들을 식민시기 이옹해먹었던 영국이다. 로힝야족 난민 문제가 안보리 의제로 올라가게 된 것도 스웨덴과 영국의 제안 때문이다. 즉 로힝야족을 미얀마에 데려다놓은 영국이 그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문제는 미얀마의 반영감정은 한국의 반일감정 이상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로힝야를 앞잡이로 부려 미얀마를 식민지배하며 로힝야라는 문제 덩어리를 안겨놓은게 영국인데, 지금에 와서 로힝야 문제로 미얀마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데 나서고 있으니 미얀마인은 영국을 좋아할 수가 없다. 그런데 아웅 산 수 치의 남편은 영국인이고 아들들 또한 영국 혼혈에 영국국적자이다. 이것은 노벨평화상을 받고 서방사회의 주목을 받는데는 유리했어도, 미얀마의 통치자로서는 심각한 결격사유가 되는 것이다. 미얀마 내의 아웅 산 수 치 반대세력인 군부도 이 부분을 집요하게 걸고 넘어가고 있고, 실제로 이 문제 때문에 아웅 산 수 치는 미얀마의 대통령이 되지 못하고 막후 실력자로서만 활동하는데 그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웅 산 수 치가 로힝야족을 옹호하는 발언을 한다는 것은, 미얀마인을 위한 정치인이 아닌 영국인의 꼭두각시로 정치인으로 행동한다는 비난에 정면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이 말을 아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웅 산 수 치 또한 로힝야족에 대한 증오심을 어느 정도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일도 있었다. 수 치는 2013년 영국 BBC방송 인터뷰에서 로힝야족을 향한 폭력이 증가하는 상황에 관한 질문을 묵살했다. 스스로 이에 대한 답변을 피하는데 그치지 않고 "불교도들이 무슬림 때문에 거주지를 잃었다고 항변하며, 무슬림 피해자가 왜 더 많냐는 질문에는 불교도들이 세계적인 무슬림들의 힘 때문에 공포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답변한 바 있다. 군부와의 타협이 아니라, 버마족만이 아닌 소수민족들까지 포함한 현대의 모든 미얀마인이 국제적으로는 미얀마인인 로힝야족을 미얀마인으로 아예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3.4. 현재 로힝야족이 걷는 행보의 문제점과 여론

로힝야족 문제가 있었던 것도 하루이틀 일도 아니지만, 로힝야족 거주지가 버마족의 거주지역과 겹치지 않기 때문에 과거 미얀마 중앙정부는 로힝야족 문제에 대해 거의 방관자적 입장을 취해왔다. 그러나 로힝야족이 이슬람 극단주의 사상에 경도된 테러조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악화되었다. 노골적으로 IS에 충성맹세를 하기도 하면서 미얀마 정부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라카인 주에서 승려를 참수한 후 로힝야족 시장에 1주일 넘게 걸어둔 사건으로[9] 전국적 조직을 가진 미얀마 불교종단의 어그로를 끌었고 비로소 전국적 문제가 되었다. 단순히 승려참살 수준이 아니라 이들이 집단적으로 불교도 마을을 습격하고 방화와 살해를 저지르는 것도 빈발하면서 타지역 불교도들의 불만도 크게 상승했다. 결국 미얀마 정부가 이에 대응조치를 하지 않을 방법이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미얀마 정부는 절대 정당화할 수 없는 제노사이드라는 방식을 택했으며 이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범죄이다. 애초에 학살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여성과 어린이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이들도 IS라고 우길 셈인가?

다만 로힝야족이 IS와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와 연계되어 있으며 이들 역시도 미얀마인을 상대로 범죄를 저질러왔기 때문에 미얀마 군부의 조직적 제노사이드를 옹호해줄 순 없는 일이지만, 미얀마 내부의 여론과 로힝야족의 송환 문제에 아주 중대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애초에 로힝야가 미얀마에 남게 된 이유 자체가 영국이 미얀마의 영토를 정하는 과정에서 로힝야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을 조건으로 이들의 독립을 승인했기 때문이며 이덕에 초기 미얀마 정부에선 로힝야족의 입김이 거셌다. 법적인 정당성과 국제 조약의 중요성은 차치하고 미얀마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냥 내정간섭 + 불평등 조약이요, 국토를 지키기 위해 굴욕적으로 "영국의 앞잡이"이자 자신들을 괴롭힌 로힝야족에게 완장을 채워준 채로 독립을 하게 된 것이다.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들어선 새 정부는 미얀마를 탄압한 서방 세계와의 모든 조약을 무효로 돌리고 현재 우리가 아는 로힝야 탄압 정책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즉 미얀마에게 이들은 과격하게 말하면 죽을 만큼 미운 민족의 원수이자 우리나라로 치자면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한반도로 이주해 한국인을 탄압했던 재한 일본인들이 광복 후에도 안나가고 버티면서 반정부 활동을 하는 정도인 셈.[10] 이 상황에서 현세대 로힝야족이 선조의 원죄를 자신들이 치르는 것에 대한 반발감으로 테러와 IS 가담이란 과격 방식으로 대응 + 고전적인 종교 갈등에 괘씸죄까지 추가되니, 과격한 민족주의적 여론과 종교적인 반발감까지 더해져 대대적 학살에 이르게 된 것이다.[11]

또한 이들이 로힝야를 다시 데려가기 힘들어진 문제에도 기여를 했다. 물론 학살당한 모든 로힝야족을 잠재적 IS 가해자라고 지목하는 건 무리수겠지만 이들 중 IS의 잠재적 지지자가 얼마나 숨어있을지는 이제 알 수 없다. 애초에 로힝야족은 자기들 내부에 IS 지지자가 생겨난 이유로 미얀마가 자기들에게 선조의 원죄를 문 것에 대한 복수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미얀마 군부는 그 반발감에 대해 유례없는 학살로 보복을 한 상황. 원한만 더 커진 상태에서 이들이 귀환했을 시 로힝야족 쪽에서 얼마나 더 큰 사고를 칠지는 알 수 없으니 미얀마 군부 측에서도 골치아픈 것이다. 한마디로 복수의 굴레, 즉 악순환의 반복만이 남아있는 셈.[12] 설사 로힝야족의 원죄에 대한 미얀마인들의 국민감정이 가라앉는다 해도 치안에 불안요소가 되는데다 종교 갈등까지 존재하고, 되레 보복을 당해 이슬람 극단주의의 희생양이 될수도 있는 문제까지 더해진 이상 현세대 로힝야족에 대한 여론은 오히려 더 악화될 수 밖에 없어진 것이다. 즉 수치의 입장에서는 역사적 원죄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국민 치안과 난민 수용 문제 특유의 난항까지 더해진 로힝야족을 옹호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진 셈이다.

3.5. 사실상 욕받이였던 아웅 산 수 치

아웅 산 수 치가 국제사회의 압력을 통해 미얀마의 군사정권을 끝내긴 했지만, 헌법상 완전한 민주주의를 이룰 수는 없었고, 군부는 언제든지 다시 쿠데타로 뒤엎을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미얀마는 헌법상 군통수권자가 현직 군인이기 때문에 총리나 대통령은 군부에 명령할 권한이 없었다. 특히 로힝야족 제노사이드의 실질적인 주범은 군부 지도자인 민 아웅 흘라잉으로, 아웅 산 수 치가 대신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게 하여 서구의 지원을 차단시킨 뒤 2021년에 2021년 미얀마 쿠데타를 일으킨 것을 보아, 어느정도 계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중국 지지 논란

미얀마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의 영향을 받고 있다. 미얀마의 청년들은 홍콩 시위대를 지지하며 미얀마에서도 시위를 이어 나가고 있다.

그런데 정작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던 아웅 산 수 치가 이끄는 미얀마 정부는 중국공산당 및 홍콩 정부를 지지해서 물의를 빚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사

5. 언론 탄압

수치는 현재 미얀마에서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과 기자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며 그들을 탄압하는 행태를 보이는데 # 2018년 9월 19일 전 정권 당시 국영 언론사에서 칼럼니스트로 일했던 '응아 민 스웨'에 대해 전날 선동 혐의를 적용해 7년형을 선고했다. 응아 민 스웨는 수 치 여사와 그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집권 전인 테인 세인 준군사정부 당시 관영 언론 칼럼니스트로 일하며 수 치 여사에 대한 비판적 글을 게시해왔다. 미얀마에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이러한 글을 본인의 페이스북에 게시해왔던 그는 지난 7월 페이스북에 수 치 여사에 대해 성차별적인 발언을 포함한 비판을 내놔 체포됐다. '아웅 산 수 치 모욕' 페북 포스팅했다가…'징역 7년'

게다가 수 치는 현지 언론들과 인터뷰를 거부하며 필요할때 일부 외신이나 관영 언론하고만 인터뷰하며 # 수치의 측근이었다가 그녀와 갈등하여 자진사퇴한 빌 리처드슨 전 유엔주재 미국 대사가 말하길 수치와 대면했을때 체포된 미얀마 기자들에 대한 석방을 요구하자 오히려 분노에 가득찬 시선으로 보며 그들을 반역자라고 비난했다고 전했다. #

특히 2018년 10월 11일 미얀마 최대 민영언론 소속의 언론인 3명이 아웅 산 수 치 여사의 측근을 비판했다는 혐의로 구속되면서 미얀마에서 수 치가 언론을 탄압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이번에 구속된 언론인은 일레븐 미디어 그룹의 주필인 초 조 린과 나이민, 수석 기자 표 와이 윈으로 현지 경찰은 이들이 형법 505조 b항를 위반했다고 밝혔는데 문제는 이 형법 505조 b항은 대중의 공포나 불안을 유발하거나 공공의 안녕을 해칠 수 있는 출판물이나 소문 등을 막는 내용의 악법이다. '언론까지 탄압' …미얀마, 수 치측근 비판 언론인 구속

6. 반박: 정권 유지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

그러나 위의 비판은 미얀마의 정치적 상황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높은 잣대를 들이대는 이상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미얀마는 이제 막 민주화가 되었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 자체가 부족하고 한편으로 급격한 과거청산은 또 다른 피를 부를 수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급진적인 정책을 기대하는 것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려는 아기(미얀마)에게 전력질주를 기대하는 무잭임한 낙관론이라 볼 수 있다. 아랍의 봄때 독재정권을 축출한 북아프리카 국가들의 현실이 어떠한가? 국민이 준비되어있지 않으면 어떤 정치제도도 공염불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가인 김영삼 김대중도 3김 시절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추구하기보다는 당 총재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권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집권 후에도 군사독재 시절의 유산을 급격하게 청산하기보다는 점진적인 개선을 추구했듯이, 현재 미얀마 정치의 혼란상은 민주주의로 이행되는 과도기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혼란은 불가피하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며 얼마나 빨리 혼란을 추스르는지가 관건인 셈이다. 또한 군부가 권력을 내려놓긴 했으나 여전히 미얀마 내에서 막강한 위상을 갖고 있는 집단이며 군사독재 20여년간 미얀마의 엘리트들이 출세를 위해 대거 군부에 가담하거나 그들과 손을 잡고 있기 때문에 이들과 급격하게 단절을 선언할 경우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가 태부족해지게 될 우려가 있다. 반군부 입장에서도 우려스러운 것이, 당장 아웅 산 수 치가 완전히 정치적 실각에 이를 경우, 아웅 산 수 치의 후계자가 없는 민주화 진영에서 더이상 소수민족을 통합할 명분이 없다. 그렇게 되면 완전히 미얀마가 분열이 되어 군부와 나머지 소수민족들간의 내전 재발은 기정사실이 될 것이다.

미얀마의 민주화는 군부를 쓰러뜨려서 이룩한게 아니고, 군부가 외부의 눈치로 그냥 물러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기존의 기득권들이 새파랗게 살아있다. 실제로, 그녀가 지도자로 집권하는걸 막기 위해 외국 국적의 자녀를 둔 사람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법을 제정하고[13], 개헌저지선에 해당하는 국회의석을 군부가 가진다는 것,[14] 그리고 군부의 수장은 군부가 사실상 임명한다는 것 등 여러가지 장애물들을 만들어놓은 상태이다. 그리고 아웅 산 수 치는 총리가 된 이후에도 이를 넘기 위해 싸워왔다. 2020년 총선 이전에도 어떻게든 헌법을 개헌하기위해 계속 시도했다.

로힝야족 학살의 주체 또한 아웅 산 수 치가 아니라 미얀마군이며 그 수장은 이번 쿠데타의 주역이다. # 미얀마 헌법에 따라 대통령도, 총리도 군을 장악할 법적인 근거가 없으며 군은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한다.[15]

결국,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그제서야 서구 세계는 아웅 산 수 치를 비판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녀를 석방할 것을 요구했지만, 미얀마 군부는 수 치를 향한 서구의 비판을 그대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으로 그 대답을 대신했다. # #

아웅 산 수 치의 입장에서 본인이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군부가 저지른 일들의 외부적인 방패가 되며 서구 세계의 비판을 받았지만 내부적인 미얀마의 시선에서 이해를 받고 있는 정황으로 보인다는 점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수 치의 재연금이 일어난 2021 미얀마 쿠데타 이후 군부 독재로 다시 회귀하여 철권 통치가 일어날 확률을 높게 본 서구의 예상과 다르게 카렌족 해방군, 키친 독립군 등 기존에도 작게는 군부, 크게는 미얀마 자체에 적대적이었던 반군들은 수 치에 대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특히 로힝야족 사태를 통해서 외부에서 보기에는 적대적이어야하는 소수민족 반군들이 아웅 산 수 치를 지지하며 조직적인 군대를 조직하여 군부와 전면전을 진행 중이며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다고 의심되던 시민들이나 군부의 지지 세력이 되어야할 군 내부 인사들이 오히려 시민군을 조직하여 군부의 미얀마 장악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미약해져가는 중이다. 특히 시민군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버마족 청년들이나 군부 출신 인사들이 수 치에 대해 강력한 지지를 보내고 있고[16] 소수민족 반군도 그 동안의 갈등은 잠시 접어두고 공통된 적인 군부를 먼저 몰아내는 것에 동참하여 공동 전선을 펴고 있기에[17] 군부를 몰아낸다면 수 치에게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수 치가 진정으로 원하던 미얀마가 될 수 있는 기대감이 올라가는 상황이다.



[1] 비슷하게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팔레스타인 야세르 아라파트 역시 후반에는 권위주의를 연상시키는 독재정치, 그리고 말년에 본인과 측근들의 부정부패, 무능함으로 인해 팔레스타인인들한테서 반감을 크게 샀으며 국제사회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2] 이후 미얀마 군부는 수 치의 구금을 비판한 엠네스티에게 당신들을 대신해 독재자를 심판했다는 취지의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3] 다만 이는 수 치 여사를 옹호하는 취지의 기사이다. 미얀마 정세에 대해 낙관적으로 쓴 건 덤. [4] 다만 기자의 시점이 다소 편향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는데, 처음부터 기자가 아웅 산 수 치의 중도주의 노선에 대해서 매우 강한 반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여럿 있기 때문. [5] 힌두교 기독교를 믿는 소수 부족에 대한 차별 또한 마찬가지이다. 카렌 족도 그 대표적. 그런데 카렌 족은 불교도가 다수임에도 차별해왔고, 오랜 저항과 탄압 속에 그나마 불교도 카렌 족은 이전과 다르게 자치도 허락하는 편이지만 기독교가 다수이던 카렌 민족해방군은 불교도 카렌 민병대와 손잡고는 무자비하게 뭉개버렸다. 영화 람보 4에 나오던 소수민족 차별 및 학살 장면을 봐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로힝야 족은 무슬림이 대다수임에도 대다수의 국민이 이슬람을 믿는 방글라데시에게 버려져 차별받던 이들이다. [6] 벵골 바로 옆에 있으며 미얀마 영토 중 가장 먼저 영국의 식민지로 편입된 곳이기에 벵골인들이 많이 정착했다. [7] 특히 방글라데시 국경지역은 인구의 96%가 로힝야족으로 전부 로힝야족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미얀마의 다른 민족과의 분쟁으로 100만여 명의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로 도망친 가운데 도망친 이들까지 포함하면 라카인 주 인구의 60% 넘게 차지하는 최대민족이 된다. 참고로 이 수치는 미얀마 정부가 로힝야족에 대해서만 1가구 2자녀라는 산아 제한 정책을 실시했는데도 이렇다. [8] 이 문제는 심지어, 군부가 사라지고 민주화가 진행 된다고 해도 똑같이 벌어질 문제다. [9] 그걸 보는 일반 로힝야족들은 참수된 승려의 목을 끌어내리거나 신고하지 않았고 오히려 환호했다. [10] 실제 역사에선 광복과 함께 거의 대부분이 일본으로 돌아갔고 그들의 재산은 적산이 되어 한국인들에게 불하되었다. [11] 군부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미얀마인들은 로힝야족의 학살에 대해 오히려 옹호하는 입장이며, "로힝야는 미얀마인이 아니다"에 대해선 한 치의 이견도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12] 만악의 근원인 영국과 서방 국가들 역시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수치와 미얀마를 비난하지만 아무도 로힝야족을 자신들이 데려가겠다는 말은 꺼내지 않는다. 전세계가 IS와 전쟁을 치르느라 야단법석인 상황에서 학살의 피해자가 된 탓에 오히려 IS와 연계되어 있다고 사방팔방에 소문이 난 민족을 데려갈 사람은 아무데도 없다. [13] 현재 대한민국 대통령 피선거권 조건 중 하나인 5년 거주 의무는 80년대 당시 5공 정권이 김대중의 대통령 출마를 막기 위해 개정한 헌법의 흔적이다. 독재국가에서 특정 인물이 대통령이 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14] 25%를 의석을 군부가 차지하는데 개헌을 위해서 의회 75%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 [15] 미얀마의 헌법에 의해 정부는 군을 장악할 수 없다. 미얀마에서 군은 외형만 국군일 뿐 사실상 하나의 거대하고 독자적인 정치집단이자 반정부군으로 보아야 한다. [16] 이들은 어린 시절 수 치를 어머니로 따르던 미얀마의 80~00년대 출생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17] 대다수의 소수민족 반군은 수 치의 경우 버마족 출신이었으나 소수민족에 관용적이었고 팡롱협약을 맺어 자치와 권익을 보장해주려 노력하던 국부 아웅 산의 자식으로 타협을 할 수 있는 인사로 평가하나 군부 세력은 지난 수 십년 미얀마에서 소수민족을 탄압하던 자들로 절대 권력을 허용해서는 안되는 이들로 생각한다. 버마족 출신의 시민군들보다도 군부에 더 적대적인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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