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17:36:16

시리오 베르나티

파일:Sirio Vernati.jpg
이름 시리오 베르나티
(Sirio Vernati)
생년월일 1907년 5월 12일
사망년월일 1993년 2월 22일 (향년 85세)
국적 파일:스위스 국기.svg 스위스
출신지 취리히
포지션 센터 하프백
신체조건 174cm | 74kg
소속팀 FC 취리히 (1928-1933)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1933-1940)
FC 루체른 (1940-1943)
SC 영 펠로우스 취리히 (1943-1946)
국가대표 34경기 (1936-1943)



1. 개요2. 생애
2.1. 선수 생활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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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위스의 전 축구 선수

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베르나티는 1920년대부터 축구를 시작했다.

그는 1928년부터 FC 취리히에서 본격적인 성인 선수로의 경력을 시작했지만 스위스 리그의 개혁 실패로 FC 취리히는 관중수 급감의 치명타를 맞았다. 이로 인해 FC 취리히는 과도한 부채에 시달렸고 나티오날리가가 새로 창설되면서 베르나티는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로 소속팀을 옮기게 되었다.

이적 첫 시즌에 그라스호퍼는 세르베트 FC와 리그 우승을 놓고 경쟁했지만 우승은 세르베트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컵 대회에서 그라스호퍼는 세르베트를 꺾었고 베르나티는 커리어 첫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1936-37 시즌에 그라스호퍼는 리그와 컵을 모두 우승해 더블을 달성했고 컵 결승전에서 FC 로잔 스포르를 10대0으로 박살내며 그들의 더블을 자축했다.

1937-38 시즌에 그라스호퍼는 리그 준우승과 컵 대회 우승, 1938-39 시즌에는 리그 우승의 성과를 거두었다. 1939-40 시즌 컵 대회의 결승전은 그라스호퍼와 FC 그렌첸의 시합이었고 그라스호퍼가 3대0으로 이김으로써 베르나티는 그라스호퍼를 떠날 때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

베르나티는 1946년까지 FC 루체른 SC 영 펠로우스 취리히에서 선수 생활을 더 했다.

2.1.2. 국가대표

베르나티는 1936년까지 이탈리아 국적을 유지해서 스위스 대표팀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러나 1936-37 시즌에 스위스 축구협회장까지 나서 베르나티의 스위스 귀화를 추진한 결과 1936년 11월 8일,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첫 A매치를 치를 수 있었다. 하지만 스위스는 오스트리아에 1대3으로 졌다.

1937년, 카를 라판이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대표팀의 전략이 수정되었다. 수비수들은 서로를 보호했고 윙어들은 상대 윙어들을 커버했으며 센터백은 자신들에게 할당된 지역을 커버하다가 그의 팀이 공을 소유했을 때 더 공격적으로 플레이하길 주문받았다. 이 전술의 키는 단연 주전 센터 하프백 베르나티였다. 그리고 스위스는 10월 31일, 제네바에서 이탈리아와 2대2 무승부를 거둬 다가오는 월드컵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1938년 5월 1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포르투갈과의 단판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스위스는 포르투갈을 2대1로 누르고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5월 21일 취리히에서 있었던 잉글랜드와의 친선 경기에서 스위스는 2대1로 잉글랜드를 이겼는데 베르나티의 활약이 스위스의 승리에 큰 지분을 차지했다.

스위스의 1938년 월드컵 첫 상대는 독일이었다. 독일은 해당 대회의 강력한 우승 후보였고 스위스는 독일의 8강 제물이 될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실제 독일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팀이었다. 스위스는 많은 축구팬들의 예상과 다르게 독일을 4대2로 꺾고 8강에 진출했다.

8강전 상대는 헝가리. 스위스는 헝가리에 0대2로 패했고 그렇게 프랑스에서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베르나티는 1943년 5월 16일에 1대3으로 패한 헝가리전을 끝으로 대표팀 경력을 마무리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왕성한 체력과 공격적인 성향을 갖춘 하프백이었다. 전성기 시절에는 유럽 무대에서 꽤 인정받는 실력의 소유자였다.

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