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01:18:09

F. 스콧 피츠제럴드

스콧 피츠제럴드에서 넘어옴

파일:나무위키+유도.png  
프랜시스 스콧 키 피츠제럴드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문호 스트레이독스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프랜시스 스콧 키 피츠제럴드(문호 스트레이독스)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colbgcolor=#404040><colcolor=#fff>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F. Scott Fitzgerald
파일:a6d4ae16d73e9ef0237f5a7b8b998819.jpg
본명 프랜시스 스콧 키 피츠제럴드
Francis Scott Key Fitzgerald
가명 폴 엘긴
Paul Elgin
출생 1896년 9월 24일
미국 미네소타주 세인트폴
사망 1940년 12월 21일 (향년 44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할리우드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소설가
활동 1920년 ~ 1940년
학력 프린스턴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 중퇴)
배우자 젤다 피츠제럴드 (1920년 결혼)
자녀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F_Scott_Fitzgerald_Signature.png
1. 개요2. 생애
2.1. 여자관계
3. 이야기거리4. 작품 목록5. 매체에서6. 다른 작가들에게 준 영향

[clearfix]

1. 개요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와 함께 잃어버린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 그의 작품인 《 위대한 개츠비》는 보통 영미권에서 20세기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일순간의 영광을 맛보았지만 불행한 삶을 살다 간 대문호.

2. 생애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다. 정확히는 노르만계 아일랜드인일 듯 하다. 피츠(Fitz)라는 이름은 원래 노르만어로 '~의 아들' 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스콧 키란 이름은 미국의 국가인 " 성조기"를 작곡한 프랜시스 스콧 키에게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피츠제럴드가 그의 9촌 증손자이기도 하다.

1896년 9월 24일 아버지 에드워드 피츠제럴드와 어머니 몰리 매퀼런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네소타 세인트폴에서 태어났고 집안은 가톨릭을 믿는 상류층이었다. 주로 스콧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프랜시스 스콧 키에서 따온 것도 있고 죽은 손윗누이의 이름이 스콧이라 다시 붙인 것도 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엔 주로 뉴욕의 버펄로에서 살았고 2년 정도 시라큐스에서 살기도 했다. 그러다가 10살 때 아버지가 P&G에서 실직당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이런 가난은 훗날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네소타로 다시 이주해 고향인 세인트폴의 세인트폴 아카데미를 다니며 대부분의 작가가 그렇듯이 학교 신문에 글을 기고하거나 하는 식으로 13살부터 작가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렇지만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는지 16살 때 퇴학당하고 뉴저지의 예비학교[1]인 뉴먼스쿨에 입학했다. 1913년엔 프린스턴 대학교에 입학했다. 프린스턴에서 여러 동아리나 학회 같은 활동을 하며 글을 썼고 유니버시티 코티지 클럽이란 곳은 아직도 스콧이 썼던 책상을 전시해놓았다고 한다. 1917년 졸업했는데 가난했던 탓에 미군에 입대했다. 그러나 입대한지 얼마 안 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

이 와중에 컨트리클럽에서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출신의 젤다 세이어를 만나게 되는데 돈이 없단 이유로 약혼이 파토가 난다. 그러다가 〈로맨틱 에고이스트〉란 작품을 개작해 《낙원의 이쪽》을 썼고 1919년 가을에 스크리브너에서 출판하기로 결정하자 다시 약혼한다. 1920년 3월 26일 소설은 출판되고 히트를 친다. 젤다와 스콧은 결혼한다.

1920년대 미국의 황금시대인 재즈 시대가 열린다. 재즈 시대의 사교적이고 강한 주체성을 보이는 여성들인 플래퍼를 다룬 소설을 써낸 스콧은 공전의 인기를 누린다. 당시 그의 단편소설들은 잡지들에 연재됐다. 1925년에 쓴 《 위대한 개츠비》는 플래퍼나 재즈 시대를 다룬 작품 중에 최고로 친다. 스콧은 젤다와 파리로 건너가 여러 문화적인 활동을 벌이는데 이때 사귄 사람들 중 하나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다. 헤밍웨이는 젤다한테선 그다지 좋은 인상을 못 받은 것 같은데 젤다가 스콧에게 술이나 왕창 먹여 글을 못 쓰게 한다고 생각했고 정신 나갔다(insane)고 평가했다. 그리고 스콧을 딱하게 생각하면서 정신적으로 건강한 정상인으로는 여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파일:external/2.bp.blogspot.com/Scott%2BAnd%2BZelda%2BFitzgerald.png
1920년대의 스콧과 젤다 부부.

그의 단편들이 연재된 잡지들은 당시 최고로 잘 나갔던 잡지였던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The Saturday Evening Post), 에스콰이어(Esquire)[2], 콜리어스 위클리(Collier's Weekly) 등이었다. 〈 벤저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의 후기에 따르면 고급손목시계 하나를 사려고 하루 만에 써내려 간 소설도 있다. (이는 낙타 혹등이란한 소설인데 진짜 낙타 혹등에 대한 얘기다)

무수히 많은 단편소설을 써냈지만 뉴욕의 명사로서 부부가 써낸 돈이나 젤다의 치료 비용 등에 돈이 많이 들어 스콧은 경제적으로 굉장히 쪼들리게 된다. 당시 부부의 기행을 들어보면 미국의 재즈 시대가 어땠는지 감이 올 법도 하다.

1920년대 말이 되자 장편 소설을 쓰려고 했지만 재정적인 여건으로 계속 단편소설을 써야 했고 1930년에는 젤다가 정신병에 걸리면서 사정은 악화된다. 1932년에는 젤다를 메릴랜드 볼티모어에 요양보낸다. 스콧은 메릴랜드의 투손에 땅을 빌려 거기서 소설을 쓰는데 유망한 정신의인 딕 디버라는 청년이 니콜 워런이란 여자를 만나 결혼하는 얘긴데 초고와 판본들이 여럿 나온다. 평론가들은 자신의 자전적인 문제를 이 소설에 투영한 것으로 본다. 한편 젤다는 유럽 생활을 바탕으로 비슷한 소설을 쓰는데 스콧은 여기에 빡쳐서 작품을 손질하고 젤다의 담당의한테 글 못 쓰게 하라고 했다고 한다. 부부 생활은 거의 파경상태였던 듯. 1934년에 위의 과정을 거쳐 써낸 《밤은 부드러워》가 출판된다. 젤다가 이 소설에 반영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위대한 개츠비》와 마찬가지로 출판 당대에는 잘 안 팔렸는데 훗날의 평가는 굉장히 좋았다고 한다. 이 작품도 보통 영미권 100대 소설을 뽑을 때 들어가는 편이다.

1930년대 후반엔 돈이 쪼들리자 할리우드로 건너가 MGM을 위해 시나리오를 쓴다. 빌리 와일더는 이를 보고 위대한 조각가가 배관공 일에나 고용된 꼴이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그는 여기서 마지막 소설이자 다섯번째 장편인 《마지막 거물의 사랑》(The Love of the Last Tycoon, The Last Tycoon으로 부르기도 한다)을 쓴다. 할리우드의 유명 영화사 중역인 어빙 설버그를 원형으로 삼은 이 소설을 쓰던 중에 찌라시 신문기자인 실라 그레이엄과 연인이 된다. 그가 서부에 있는 동안 젤다는 동부의 정신병원에 있었다. 그때 스콧은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였고 하루에 맥주를 30캔이나 마셨다고 한다. 그래도 1939년 금주에 성공했고 가장 행복하다 평한 시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얼마 안 가 1940년에 동맥경화로 죽었다. 그 해 12월 20일 애인인 실라와 영화 시사회에 참여한 뒤 돌아오던 중 어지럼을 호소했다. 다음 날 잡지를 보다가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나 벽난로 선반을 잡더니 숨을 쉬지 못 하다가 쓰러졌다고 한다. 실라가 매니저를 불렀지만 매니저가 보곤 이미 죽었다고 했다.

안치된 그의 시신을 봤던 도러시 파커의 말에 따르면 《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가 죽었을 때 올빼미 눈의 사나이가 했던 유명한 대사인 "The poor son-of-a-bitch"란 말을 그의 장례식에서 누군가 중얼대는 걸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정말 《위대한 개츠비》와 그의 인생은 여러모로 겹치는 바가 많다. 그의 시신은 메릴랜드로 운구되어 베세다란 곳에서 그의 자식인 스코티 피츠제럴드(당시 19세)의 참관 아래 2, 30명 정도의 인원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볼티모어의 록빌 유니언 묘지에 묻혔다. 1948년 노스캐롤라이나의 애슈빌에서 일어난 정신병원 화재로 젤다가 죽자 딸인 프랜시스 스코티[3]는 볼티모어의 대주교구에 항의해 비가톨릭으로 죽은 피츠제럴드를 가톨릭으로 죽은 것으로 처리해달라고 요구해 가톨릭 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원래 피츠제럴드는 가톨릭 집안이긴 했다. 본인은 냉담이었던 것 같지만. 1975년엔 두 사람을 합장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F._Scott_and_Zelda_Fitzgerald_grave.png
스콧과 젤다의 묘지.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
그래서 우리는 과거로 끊임없이 흘러들어가면서도 해류에 맞서 배를 띄우고 파도를 가른다.
- 피츠제럴드의 묘비명. 위대한 개츠비의 끝문장으로도 유명하다.

2.1. 여자관계

  • 지네브라 킹(Ginevra King), 1898 – 1980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inevra_King.jpg
    1910년대 중반에 사귀었으나 돈이 없단 이유로 차인다. 지네브라 킹의 아버지는 스콧에게 "가난한 집 남자애들은 부잣집 여자애들과 결혼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Poor boys shouldn't think of marrying rich girls.)"고 말했다고 하고 이 일은 스콧의 작품 성향에 큰 영향을 남겼다. 스콧은 돈을 벌게 되면서 굉장히 사치스럽게 생활했는데 재즈 시대의 탓도 있겠지만 어릴 적의 이런 일들이 꽤 트라우마가 됐다고 평론가들은 본다. 이 일 말고도 잘 사는 외가에서 식객처럼 살았던 어린 시절의 영향도 있긴 하다.

    지네브라 킹이 《 위대한 개츠비》의 톰 뷰캐넌과 비슷한 윌리엄 미첼과 결혼하자 피츠제럴드는 군에 들어갔고 장교로 본토에서 복무하던 중에 남부 출신의 유명 인사인 젤다 세이어를 만난다. 이후 로스앤젤레스에서 시나리오를 쓰는 동안 스콧은 지네브라 킹을 다시 만났다. 당시 그녀는 미첼과는 이혼한 후였다. 스콧의 삶이 워낙 유명했기에 킹은 스콧의 《저주받고도 아름다운》이란 단편소설집에서 자신을 모델로 딴 여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스콧은 이런 답을 했다고 한다.

    "어떤 썅년이 너인 것 같아?(Which bitch do you think you are?)"
  • 젤다 세이어 피츠제럴드 (Zelda Sayre Fitzgerald), 1900 – 1948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Zelda_Fitzgerald_portrait.jpg
    스콧이 육군 소위이자 작가 지망생이었을 당시, 한 파티에서 젤다를 처음 만나게 된다. 밝고 활기찬 금발머리의 남부 여성인 젤다의 모습에 스콧은 한눈에 반했으며, 긴 구애 끝에 약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부잣집 집안의 딸이었던 젤다는 스콧의 불확실한 미래에 약혼을 번복한다. 젤다와도 돈이 없다는 이유로 파혼 당하지만 《낙원의 이편》을 출판한 후 큰 인기를 얻게 되고 이후 젤다와 결혼하게 된다.

    대공황 이전까지 수많은 미국인들이 그랬듯이, 스콧과 젤다 모두 낭비벽과 사치가 심했으며 술을 즐겼다. 부부는 유럽 미국을 여러번 오가면서 생활했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예술적 기질이 뛰어났던 젤다가 소설을 쓰는 걸 스콧이 못마땅하게 여겼고 둘 다 불륜을 저질렀다. 이때 스콧은 젤다가 프랑스의 한 비행기 조종사와 바람을 피고 이혼을 요구하자 이혼 요구를 철회할 때까지 젤다를 집에 가둬 놓는다.

    시간이 흐른 뒤 젤다가 점점 신경 쇠약 증세를 보이자 스콧은 젤다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소설을 써야 했다. 갈수록 부부관계는 금이 갔고 사실상 별거 생활에 들어갔다. 물론 딸도 있고 계속 만나긴 했다. 이후 로스앤젤레스와 유럽을 오가면서 가십을 전문으로 하는 잡지 기자와 사귀었다. 스콧이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7년 후, 젤다는 정신병원에서 화재가 발생해 사망한다.

    젤다에 대한 후대의 부정적인 평가와 달리, 스콧은 젤다의 글이나 말 혹은 그녀의 삶에서부터 문학적인 도움을 많이 얻었다. 젤다는 스콧만큼이나 재능을 가진 화가이자 소설가이자 무용수였다. 도움이 아니라 사실상 표절 수준이란 지적도 있다. 스콧은 젤다의 말은 물론 일기에서도 소재를 얻고 인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 편집자가 젤다의 일기를 출판하는 게 어떻냐고 스콧에게 제안했으나 스콧은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일기를 출판하면 자신이 젤다를 표절한 게 드러날까봐, 더 나쁘게 말하면 영업비밀이 탄로날까봐 그랬을 거란 부정적 시각도 있다. 젤다가 생전에 집필해 출간한 소설 "왈츠는 나와 함께"가 스콧이 집필 중이던 "밤은 부드러워"와 겹치는 내용이 있어 스콧이 크게 화를 내 소설 상당수를 수정하고 나서야 출판할수 있었다고 하며, 젤다가 이후 쓴 자전적 에세이 "F씨 부부를 방으로 모시겠습니다"에서도 스콧은 젤다가 "I"를 쓴 것에 크게 화를 냈고 결국 젤다는 다 "We"으로 고쳐야 했었단 이야기도 있다. 스콧과 젤다 사이에는 딸 한 명이 있는데, 딸이 태어난 것을 알고는 젤다가 딸에게 한 말이 《 위대한 개츠비》에 그대로 인용되었다. 또한 스콧을 인기 작가 반열에 오르게 해준 "낙원의 이편"의 주인공 역시 젤다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젤다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한편으론 헤밍웨이의 공이 컸다. 헤밍웨이와 젤다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 실라 그레이엄 웨스트브룩(Sheilah Graham Westbrook), 1904 – 1988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heilah_Graham_Westbrook.jpg
    사진만 봐선 잘 모르겠지만 젤다와 꽤 닮았다고 한다. 스콧이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 옆에 있었다고 한다. 할리우드에서 가십 칼럼니스트로 일했다.

3. 이야기거리

장편 소설인 《 위대한 개츠비》나 《밤은 부드러워》가 잘 알려져 있지만 보통 돈을 번 건 잡지들에 기고한 단편 소설들이었다. 단편들은 대개 낭비벽인 심한 그나 젤다의 지갑 사정을 위해 급하게 쓰였고 그 탓에 오탈자가 많은 편이었다. 《위대한 개츠비》의 정본을 정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던 이유이기도 하다.

재즈 시대와 그 궤를 같이 하는 작가기도 하다. 1929년 대공황을 기점으로 미국 사회가 바뀌자 그의 인기도 떨어진다. 그러나 후에 재평가되고 《위대한 개츠비》는 아직도 1년에 수십만 부씩 팔리는 인기작이다.

북미권이나 IB 교육제도를 채택한 곳에서는 영어 수업 때 필수 독서 서적이다, 서적을 읽고 독후감을 써야 하는 것이 과정이다.

그의 단편들은 플래퍼들의 심리를 잘 그려냈단 평가를 받았다. 말년에는 인종차별 타파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4. 작품 목록

명성에 비해 번역이 제대로 안 되어 있는 작가다. 위대한 개츠비의 번역 논란이야 어쨌든 잘 해보려다 그리 된 거니까 그렇다 치고 펭귄클래식코리아에서 나온 낙원의 이편은 희대의 쓰레기 번역으로 악명높으며, 현대문학에서 발간한 단편 모음집도 오역이 많다.

5. 매체에서

  • 1931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다시 찾아간 바빌론(Babylon Revisited)'은 1940년 독립영화 제작자 레스터 코원(Lester Cowan)에게 영화화 권리가 팔렸다. 코원은 피츠제럴드에게 직접 영화 Cosmopolitan(가제)의 대본을 써달라고 의뢰했고 셜리 템플을 주연으로 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해당 프로젝트는 무산되었고, 1954년 엘리자베스 테일러 주연의 《 내가 마지막 본 파리(The Last Time I Saw Paris)》로 만들어졌다.
  • 젤다와의 로맨스가 자극적이고 유명해서 여러 매체에서 다뤄졌다.
    • 프랑스 소설가인 질 르루아가 쓴 〈앨러배마 송〉이 있다. 아내 젤다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소설이다.
    • 프랭크 윌드혼의 뮤지컬 《달을 기다리며》(Waiting for the Moon)도 있다. 젤다나 젤다와 피츠제럴드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 일본의 극단인 다카라즈카 가극단 중에 이를 다룬 《마지막 파티: 스콧 피츠제럴드의 마지막 날》이란 공연도 있다.
    • 파리에 여행 온 미국의 젊은 시나리오 작가가 1920년대로 타임슬립해 당시의 작가들을 만난다는 내용의 《 미드나잇 인 파리》에도 등장했다. 피츠제럴드 역은 영국 배우 톰 히들스턴이 맡았다.
  • 아내의 이름 젤다는 닌텐도의 게임 젤다의 전설 시리즈의 이름의 캐릭터 젤다 공주 이름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미야모토 시게루가 좋아하는 작가여서 따왔다고 한다. 젤다 시리즈의 골수팬이었던 로빈 윌리엄스는 딸의 이름을 게임 속 젤다에게서 따왔다. 하지만 피츠제럴드의 부인에게서 따온거냐고 물어봤다고. 미국에서는 젤다라는 이름이 1930년대생까지만 쓰였기에 할머니 이름에 가까워서 젤다 윌리엄스 본인은 처음엔 마음에 안 들어했다고 한다.
  • G-Eazy의 새로운 앨범(2017) Beatiful And Damned 는 피츠제럴드의 소설에 영감을 받아 제작했고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

6. 다른 작가들에게 준 영향

무라카미 하루키는 스콧의 《 위대한 개츠비》를 굉장히 좋아하고 일역을 하기도 했으며, 《 노르웨이의 숲》에서 홀든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이 있기도 하다. 《 호밀밭의 파수꾼》에 등장하는 홀든 콜필드 역시 개츠비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괜찮은 놈이라고 평가했다.

사실 위에 나온 사례 말고도 스콧이 영미문학, 나아가 세계문학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의 작품이 아닌 그의 생애 자체를 다룬 매체가 수두룩한 걸 보면 어쩌면 미국의 황금기라 불린 1920년대 재즈 시대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라 볼 수도 있겠다.


[1] prep school.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미국 동북부의 명문학교들을 가리키는 말. [2] 군대에서 보던 그 비싼 명품만 줄줄 광고하던 그 잡지 맞다. [3] 1921-1986. 뮤지컬 코미디를 몇 편 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