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HEIK |
1. 프로필
NWA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WWE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본명 |
에드워드 조지 파르핫 (Edward George Farhat) |
링네임 |
The Sheik Eddie Farhat The Arabian Sheik The Original Sheik The Sheik of Araby |
별칭 | The Arabian Madman |
출생일 | 1926년 6월 7일 |
사망일 | 2003년 1월 18일 (향년 76세) |
신장 | 180cm (5 ft 11 in) |
체중 | 113kg (250 Ib) |
출생지 | 미국 미시간 주 윌리엄스톤[1] |
피니쉬 무브 |
쉬크스 초크 카멜 클러치 |
유형 | 하드코어 + 브롤러 |
커리어 |
NWA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헤비웨이 챔피언 총 17회[2] NWA 하와이 헤비웨이트 챔피언 1회 NWA 유나이티드 네셔널 챔피언 1회 NWA 아메리카스 헤비웨이트 챔피언 2회 NWA 노스 아메리칸 헤비웨이트 챔피언 1회 NWA 브래스 너클스 챔피언 1회 NWA 텍사스 헤비웨이트 챔피언 1회 NWA 월드 태그팀 챔피언 1회 NWA 미드웨스턴 태그팀 챔피언 1회 WWWF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챔피언 2회 WWA 월드 마샬아츠 헤비웨이트 챔피언 1회 유나이티스 스테이츠 챔피언 1회 GLWA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헤비웨이트 챔피언 1회 ICW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헤비웨이트 챔피언 1회 인터네셔널 태그팀 챔피언 1회 IWA 인터네셔널 헤비웨이트 챔피언 3회 BTW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헤비웨이트 챔피언 1회 미드웨스트 헤비웨이트 챔피언 1회 사우선 헤비웨이트 챔피언 1회 |
2. 개요
미국의 프로레슬러. 훗날 등장한 아이언 쉬크와의 구별을 위해 오리지널 쉬크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하드코어 스타일 프로레슬링의 시초격인 선수이다. 또한 사부의 삼촌이다.
3. 커리어
3.1. 프로레슬링 입문 이전
레바논계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형제들이 대학을 갈 동안 이런 저런 일들을 하며 살았다. 그러던
1939년,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하려 했으나 입대를 위해 제출했던 서류 중 위조된 서류가 발각되어 실패했다. 그러나
미국의 참전 선언 후 3년이 지난
1944년, 군에 징집되어 18개월 동안 복무하다
1946년에 명예 제대를 하게 되고 이후 프로레슬링계에 입문한다.
3.2. 북미 프로레슬링 커리어
데뷔 후 쉬크 기믹을 장착하기 전 까진 본명을 사용한 '에디 파르핫'이라는 링네임으로 활동했다. 몇 년 후 링네임을 '쉬크 오브 아라비'로 변경, 중동의 재벌 2세 같은 기믹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것이 최초의 쉬크 기믹의 시작이였다. 이후 시카고에서 당시
NWA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인
루 테즈와 대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고 대립 이후엔
뉴욕으로 본거지를 옮겨
버디 로저스, 안토니노 로카, 미구엘 페레즈 등과 대립했다.
이후 1960년대에 들어 기믹에 변화가 생겼는데 기존의 재벌 2세 기믹이 아닌 경기마다 알라에게 기도를 올리거나 경전을 읊고 숨겨둔 연필, 더 나아가선 즉석에서 화염구를 만들어 상대에게 공격하는 현대의 하드코어한 스타일의 아랍의 광인 기믹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후로 보보 브라질과 서로의 커리어에 길이 남을 최고의 대립을 수 차례 가졌으며 여러 단체를 떠돌다가 1965년,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WWWF에서 에두아르도 카펜티어,
브루노 삼마르티노 등과 대립했으며 특히 브루노 삼마르티노와는 타이틀을 두고 오랜 시간 말 그대로 혈투를 벌여 큰 화제가 되었다. 이후 1972년, 당시 WWWF 챔피언
페드로 모랄레스와 대립해 패배하고 WWWF를 떠났다.
WWWF를 떠난 이후엔
캐나다
토론토 지역에서 어니 래드, 치프 제이 스트롱보우,
앙드레 더 자이언트, 타이거 지트 싱 등과 대립해 그들을 상대로 모두 승리하며 최강자로 군림하다 다시 도전한 앙드레 더 자이언트에 의해 패배했다. 이 당시 쉬크는 선수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닌 부커로서도 활동했다. 그러나 부커 일이 잘 풀리지 않자 토론토를 떠나 온타리오에서 다시 선수로서 활동했다.
커리어 말년인 1980년, 속해있던 빅 타임 레슬링(BTW)가 폐업하자 인디 단체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후론 1991년부터 FMW,
ECW,
WCW 등에서 활동하다 1998년,
고라쿠엔 홀에서 은퇴식을 가지고 72세의 나이에 프로레슬러 은퇴를 선언했다.
3.3. 일본 프로레슬링 커리어
1972년, 투어 형식으로
역도산이 설립한 단체인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에 입단해 활동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는 역도산이 사망한 후 망하기 일보직전이였고 결국 얼마 안 가 단체가 파산, 이후로는
자이언트 바바가 설립한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활동했. 그리고 1년 뒤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입단할 계획이였으나 당시 쉬크가 소속되어 있던 단체인 BTW 내부에서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해 이를 수습하기 위해 투어를 조기 종료해 버려 신일본 입단 계획을 물거품이 되었다.[3]
그러다 1977년, 다시 전일본으로 돌아와 압둘라 더 부처, 펑크 형제, 오오키 킨타로, 자이언트 바바 등과 대립했다. 특히 압둘라 더 부처와의 대립은 일본에서 끝나지 않고 북미에서도 이어져 말 그대로 길거리에서 혈투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다 1977년, 다시 전일본으로 돌아와 압둘라 더 부처, 펑크 형제, 오오키 킨타로, 자이언트 바바 등과 대립했다. 특히 압둘라 더 부처와의 대립은 일본에서 끝나지 않고 북미에서도 이어져 말 그대로 길거리에서 혈투를 벌이기도 했다.
4. 사망
2003년 초, 질환으로 인해 자택 근처에 위치한 병원에 입원해 있었으나 얼마 후인 1월 18일, 76세의 나이에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쉬크는 자서전을 집필 중이였다고 한다.
이후 2007년, 그간의 활약을 인정받아
WWE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소개는 조카인 사부와 제자
랍 밴 댐이 맡았다.
5. 기타
- 아랍계 기믹을 사용했으나 실제로는 독실한 마론파 신자였다고 한다.
- 1967년, 한 팬에게 저격 당할 뻔 했다. 당시 텍사스에서 경기를 하고 있던 쉬크에게 한 팬이 총을 꺼내 세 차례 방아쇠를 당겼는데 천만다행으로 세 발 모두 불발탄이였던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후 범인은 체포되었고 훗날 경찰이 범인의 총을 테스트했을 땐 정상으로 발사되었다고 한다.
- 아랍의 광인 기믹을 맡았지만 업계 내에서 인망이 높았을 정도로 실제 인성은 굉장히 좋은 편이였다. 일례로 아내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충격으로 오랜 시간 휴식기를 가지고 있던 할리 레이스에게 복귀할 때 까지 매 주마다 우편을 통해 수표를 보냈다는 일화가 있다.
- 쉬크에겐 조카와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의 조카 마이클 파르핫은 마이크 토마스라는 링네임으로 프로레슬러로 활동하다 1978년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남 에드 파르핫 주니어 역시 캡틴 에드 조지라는 링네임으로 활동하던 프로레슬러였으며 2021년, 70세의 나이에 코로나19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 또 다른 아들인 톰은 2020년, 신장암으로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6. 둘러보기
1996년 레슬링 옵저버 명예의 전당 헌액자 |
2007년 WWE 명예의 전당 헌액자 |
2010년 NWA 명예의 전당 헌액자 |
2011년 프로레슬링 명예의 전당 헌액자 |
PWI 선정 올해 가장 미움받은 선수 | ||||
창설 | → |
더 쉬크 (1972) |
→ |
빌리 그레이엄 (1973) |
PWI 500인 선정 올해의 레슬러(2003년) | ||||
더 쉬크 (368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