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09:06:42

소피 마르소

소피 마르소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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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세자르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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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여우상
제7회
( 1982년)
제8회
( 1983년)
제9회
( 1984년)
없음
(다음 해에 해당 부문 신설)
소피 마르소
( 라붐 2)
상드린 보네르
(우리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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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fbcfe><colcolor=#ffffff> 소피 마르소
Sophie Marceau
파일:소피 마르소 프로필 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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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소피 마르소<라붐>.jpg
▲ 영화 < 라붐>에서의 소피 마르소.[1]
파일:sophie marceau 1988.jpg
▲ 20대 초반의 소피 마르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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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소피 다니엘 실비 모퓌
Sophie Danièle Sylvie Maupu
출생 1966년 11월 17일 ([age(1966-11-17)]세)
파리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신체 172cm, 56kg, 245mm(US 7.5 /EU 38)
데뷔 1980년 영화 라붐
부모 아버지 브누아 모퓌
어머니 시몬 모리세
파트너 안드레이 줄랍스키(1985년~2001년)
짐 렘리(2001년~2007년)
크리스토퍼 램버트(2007년~2014년)
시릴 리냑(2014년~2016년)
자녀 아들 뱅상 줄랍스키(1995년생)
딸 쥘리에트 렘리(2002년생)
링크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3. 한국에서의 인기4. 출연작
4.1. 영화
5. 감독작 / 각본작6. 저서7. 여담

[clearfix]

1. 개요

프랑스 배우. 20세기 후반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으며, 덕분에 세월이 지난 지금도 프랑스 배우 중엔 가장 인지도가 높은 배우로 남아있다.

2. 생애

1966년 11월 17일 파리, 가게 종업원인 시몬 모리세(Simone Morisset)와 트럭 운전수인 브누아 모퓌(Benoît Maupu) 사이에서 첫째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 마르소 가족은 노동자 계급의 삶을 살았는데, 이것은 그녀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녀는 주중에 가족의 식당 일을 도왔으며, 주말에는 에손(Essonne) 주의 베르르프티(Vert-le-Petit)에 위치한 작은 집인 라카반(La Cabane)에서 지냈다. 그러나 9살 때 부모는 이혼했다.

1980년 2월, 13세였던 소피 마르소와 그녀의 어머니는 10대를 위한 모델 에이전시에 그녀의 사진을 가지고 갔으나 어떠한 연락도 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같은 때 클로드 피노토 감독 영화 라붐(La Boum, the party)의 캐스팅 감독이었던 프랑수아즈 메니드레(Françoise Menidrey)는 소피 마르소가 사진을 제출한 모델 에이전시에게 해당 프로젝트를 위한 배우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했고 에이전시는 마르소를 추천한다. 이후 그녀는 수많은 카메라 테스트와 면접을 거친 후, 고몽 영화사의 알랭 푸아레(Alain Poiré)와 장기 계약을 맺었다.
영화 《라붐》
1980년 12월에 개봉한 소피 마르소의 데뷔작 《 라붐》은 프랑스에서만 450만 관객을,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1,500만 명의 관객을 기록[3]할 정도로 대히트했고, 소피 마르소는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1981년에 들라노에(Delanoë) 작사의 곡인 " Dream in Blue"를 프랑스의 유명 가수 프랑수아 발레리(François Valéry)와 듀엣으로 부르며 가수로도 데뷔하였다.

1981년, 소피 마르소는 고몽 영화사가 자신을 10대 소녀가 의붓아버지를 성적으로 유혹하는 내용의 영화인 《 좋은 아버지(Beau Pere)》에 출연시키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자 해당 영화에 출연하는 것을 강하게 거부하고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개인적으로 100만 프랑[4]을 빌려 고몽과의 독점 계약을 해지했다.

소피 마르소가 16세의 나이가 된 1982년 12월에 개봉한 《라붐 2》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일대에서 매우 큰 성공을 거둔 것은 물론, 일본, 중국, 대한민국 등에서도 공식적으로 개봉됐으며 동아시아에서도 소피 마르소의 미모에 반해서 그녀의 팬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소피 마르소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냐면 일본에서는 1985년 제1회 도쿄 국제 영화제의 MC를 본 인기 개그맨[5] 타모리 아카시야 산마가 영화제에 참석한 소피 마르소에게 섹드립을 날린 것이 문제가되어 「실없이 까부는 사회자」, 「소피 마르소는 분명 아카시야 산마를 진짜 블랙 데빌[6]이라고 생각할 것이다.」라는 등 일본의 언론매체에서 두 사람의 진행 태도를 문제삼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으며[7] 대한민국에서는 서양의 3대 여신 중 한 명이라 칭송받으면서[8] 소피 마르소의 사진이 책받침으로 사용되어 청소년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1989년에는 무려 2억원이라는 막대한 출연료를 받고 소피 마르소가 대한민국에 직접 방한하여 화장품 CF를 찍기도 했었다. 라붐 시리즈의 주제가 "Reality"(라붐 1), "Your eyes(라붐 2)"도 대한민국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9][10]

이처럼 《라붐 2》의 흥행으로 소피 마르소는 유럽과 동아시아의 국민 아이돌로 떠올랐지만 한편으로 프랑스내에서는 전문적인 연기 수업을 받지 않고 얼굴로만 뜬 배우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후 소피 마르소는 " 아이돌"로 각인된 자신의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서 라붐 시리즈의 차기작으로 1984년 제라르 드파르디유, 카트린 드뇌브가 공동 주연한 《사강의 요새 (Fort Saganne)》로 대규모 블록버스터[11]에도 진출했고 같은 해 10월에 개봉한 《행복한 부활절 (Joyeuses Paques)》에서는 시크하고 반항적인 불량소녀로 나왔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자 소피 마르소는 1985년, 《성난 사랑 (L'Amour Braque)》, 《폴리스 (Police)》[12], 1986년의 《지옥에 빠진 육체 (Descente aux Enfers)》 등에서 연이어 노출 연기를 선보임으로써 완전한 이미지 변신을 하기 시작한다. 특히 <지옥에 빠진 육체>에서 마르소는 라붐에서 아버지 역으로 나왔던 클로드 브라쇠르와 부부로 출연하여 전신누드가 포함된 정사신을 펼쳐서 그녀의 청순한 모습을 기억하던 팬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다.
L'Etudiante의 주제곡인 'You call it love'
이후 소피 마르소는 1988년, 라붐 감독 클로드 피노토의 신작인 《유 콜 잇 러브 (L'Etudiante)》와 사극 영화 《혁명가의 연인 (Chouans!)》에 출연하면서 로맨틱한 여주인공으로 돌아온다. 노르웨이 여가수 카롤리네 크뤼게르(Karoline Krüger)가 부른 'You call it love'가 잔잔히 깔리면서 스키 마스크와 모자를 벗고 아름다운 얼굴선과 함께 깨끗한 피부를 드러내는 영화의 오프닝은 소피 마르소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다. 몰리에르의 《인간혐오자 (Le Misanthrope)》, 알프레드 드 뮈세의 《사랑은 장난으로 하지 마오 (On ne badine pas avec l'amour)》와 같은 희곡 작품들을 언급하는 소피 마르소의 지적인 모습 또한 못 남성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사극 《혁명가의 연인 (Chouans!)》에서 맡은 비련의 여주인공 역할로도 국제 로맨틱 영화 페스티벌에서 최고의 로맨틱한 여배우상을 수상하였다.

1989년, 소피 마르소는 "자신보다 무려 26살 연상"인 영화감독, 안드레이 줄랍스키와 동거 중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사실 80년대 중반부터 이미 소피 마르소와 안드레이 줄랍스키 감독이 동거를 하고 있다는 설이 프랑스 언론에 보도된 바 있었지만 1989년 소피 마르소가 줄랍스키와의 관계를 인정하기 전까지 그녀의 에이전시 측은 "이제 막 성인이 된 여배우와 중년 감독이 동거 중이라는 소문이라니 불쾌하다."라며 소문이 황당무계한 루머일 뿐이라고 일축했었다.

또한, 스캔들이 세간에 알려질 당시에는 안드레이 줄랍스키 감독과 소피 마르소와의 인연이 줄랍스키가 1985년에 감독한 영화 《성난 사랑 (L'Amour Braque)》에 마르소가 출연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있었는데 이후 밝혀진 바에 의하면 소피 마르소는 1981년 5월, 만 14살의 나이로 처음 칸 영화제에 참석했을 때 라붐의 감독인 클로드 피노토의 소개로 Barrière Le Majestic Cannes 호텔로 가서 안드레이 줄랍스키 감독과 첫 만남을 가졌었으며 이로부터 3년 후에 줄랍스키 감독과 본격적으로 동거를 시작했다고 한다. #

1989년, 소피 마르소와 안드레이 줄랍스키는 두 사람의 동거 사실을 언론에 밝힐 무렵 합심하여 같이 영화사를 설립했고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Mes nuits sont plus belles que vos jours) (1989)》, 《쇼팽의 푸른 노트 (La Note Bleue) (1991)》를 공동 작업했다.

스캔들의 여파로 프랑스 영화계에서 입지가 좁아진 소피 마르소는 1990년에 개봉한 《고요한 펠리세이드 (Pacific Palisades)》라는 영화로 처음 헐리우드에 진출했으며 1992년에는 유리디체(Eurydice) 극장에서 공연된 조지 버나드 쇼의 유명한 희곡 피그말리온에서 주연인 엘자 돌리틀 역으로 출연하여 연극 무대에도 진출했다. 특히, 피그말리온에서의 연기는 호평을 받아 소피 마르소는 그 해 최고의 신인 여배우를 위한 상인 몰리에르 상을 받았다.

1993년에는 오랜만에 로맨틱 코미디 영화 《팡팡 (Fanfan)》에 뱅상 페레[13]와 함께 출연하였다. 이 영화에서 소피 마르소는 못말리는 천방지축 아가씨를 연기하였다.

1995년 소피 마르소는 멜 깁슨 감독, 주연의 《 브레이브 하트》에서 이사벨 공주 역으로 출연해서 할리우드에서도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같은 해, 유명한 프랑스 영화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빔 벤더스와 함께 영화 《구름 저편에》에서 국제적 배우로서 호흡을 맞췄다.

1995년 6월, 안드레이 줄랍스키와 소피 마르소의 유일한 자녀인 아들 뱅상이 태어났다.

1996년, 30세가 된 소피 마르소는 여배우를 주인공으로 한 반자전적인 소설 《거짓말쟁이 Menteuse》를 발표했다.

1997년, 그녀는 영국에서 윌리엄 니컬슨과 영화 《Firelight》를, 프랑스에서 베라 벨몽드와 영화 《마르키스 (Marquise)》을 촬영하고 버나드 로즈와 러시아에서 《 안나 카레니나》를 찍었다.

1999년 《 한여름 밤의 꿈》에서 히폴리타를 연기했으며, 《 007 언리미티드》에서 악녀 본드걸인 엘렉트라 킹을 연기했다.[14]

2000년에 안드레이 줄랍스키와 마지막으로 팀을 이룬 영화 《피델리티 (La Fidélité)》가 개봉했다. 안드레이 줄랍스키는 원래 이 작품을 소피 마르소의 감독 데뷔작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소피 마르소가 예전처럼 "감독과 여배우"라는 관계로 작업을 하고 싶다하여 줄랍스키가 메가폰을 잡았다고 한다.

2001년 소피 마르소는 안드레이 줄랍스키와의 동거 생활을 청산했다.

2001년, 소피 마르소는 영화 제작자 짐 렘리와 사귀기 시작하였고 2002년 런던에서 그녀의 두 번째 아이인 줄리엣을 낳았다.

2002년 소피 마르소는 영화 《사랑한다고 말해줘 (Parlez-moi D'amour)》를 감독하면서 영화 감독으로 데뷔, 몬트리올 국제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노동자 계급 가정 출신이라서 그런지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1차투표에서 노골적으로 백인우월주의를 내건 극우정당 국민전선 장 마리 르 펜이 예상을 뒤엎고 결선투표에 진출하자, 적극적으로 반대운동에 뛰어들었다.[15]

2002 월드컵을 앞두고 브리지트 바르도의 재단이 한국의 개고기 식용을 반대하는 주프랑스 한국 대사관에 보내는 항의문에 소피 마르소는 나탈리 베이, 장폴 벨몽도, 축구선수 에마뉘엘 프티와 함께 서명했다. #

2007년에 짐 렘리와 헤어진 그녀는 같은 해 개봉한 자신의 2번째 감독 영화 《트리비알》에 주연으로 출연한 미국계 프랑스인인 동료 배우 크리스토퍼 램버트[16]와 사귀기 시작, 2014년까지 교제했다.

2009년에는 크리스챤 디올의 화장품 광고 모델로 발탁되었다.

2014년에는 동거녀와의 결별로 이어진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열애 스캔들과 관련해 "올랑드는 비열한 겁쟁이"라는 거침없는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2016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의 인권 탄압과 관련하여 레지옹 도뇌르 훈장 서훈을 거부했다.

40년이라는 오랜 배우 생활 동안 소피 마르소는 영화제 출품작에도 자주 출연하고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지만, 이상하게도 칸 영화제 경쟁 부문이랑은 인연이 없었던 편이다. 그러다가 2021년 칸 영화제 프랑수아 오종의 《 다 잘된 거야》에 주역으로 출연하면서 처음으로 칸 경쟁 레드카펫을 밟았다.

2023년 10월, 럭비 월드컵을 관람하는 근황이 공개됐다. 사진 기사

2023년 12월 프랑스의 국민 배우인 제라르 드파르디유의 성범죄 혐의에 대해서 그와 <폴리스>에서 같이 연기를 했던 소피 마르소가 "제라르 드파르디외는 스타 배우가 아니라 세트장의 직급이 낮은 여성들을 표적으로 삼아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폭로를 하였다. #

3. 한국에서의 인기

한국에서는 2000년대 이후로 프랑스 영화는 거의 개봉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인지도는 웬만한 미국 배우 못지않다.
파일:external/thegrandnarrative.files.wordpress.com/sophie-marceau-korean-advertisement-1989.jpg
드봉 광고
1989년 화장품 CF를 위해 처음 방한하였다. CF 촬영 당시 출연료로 한화 2억원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논란이 되기도 했었는데, 당시 2억이면 한국 영화 한 편의 평균 제작비였고, 강남 30평짜리 아파트를 네 채나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톱스타 조용필이 맥콜 광고를 찍으며 받았던 출연료가 소피 마르소와 똑같은 2억원이었으니, 당시 국내에서의 인기와 인지도를 고려해봤을 때 소피 마르소가 아무리 인기가 있어도 국내 톱스타들과 비교시 더 많이 받는건 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이런 논란의 원인은 당시 프랑스와 한국간 물가 차이나 특히 1989년 2월 1일, 대한민국의 방송위원회가 외국인은 CF의 주연 및 그에 준하는 역할로 출연할 수 없다는 규정을 삭제했던 것 때문도 컸다. 처음으로 외국 연예인을 CF의 주연으로 출연시킬 수 있었으니, 마치 주식시장에 처음으로 상장된 기업처럼 거품이 낀 광고 출연료가 형성됐던 것이다. 몇몇 기업들은 광고의 차별화를 위해 외국 연예인을 광고 모델로 섭외했고, 당시 외국과 한국의 물가 차이, 소득 차이 등을 고려해 광고 출연료를 국내 인지도에 비해 높게 책정한 것으로 보이는데, 외국 연예인에 대한 광고 단가는 얼마 정도가 적당한가에 대한 시장의 기준이 확립되지 않았던 상태였기에, 외국 연예인의 광고 단가에 거품이 과도하게 끼었다는 논란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1989년은 외국인 광고 모델 규제 해제가 첫 적용되는 원년이었기 때문에 주윤발, 소피 마르소와 같은 외국 연예인들을 한국 광고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었던 시기였고, 1990년부터는 시장에서 외국 연예인의 단가 대비 광고 효과가 크게 체감되지 못했는지 거품이 많이 빠졌기에 출연빈도가 이전보단 줄어들었다. 참고로 국내 외국인 광고 모델 1호였던 주윤발과 왕조현, 장국영도 소피 마르소와 비슷한 배경으로 인해 모델로 기용된 것이었고, 1989년 밀키스 광고에 출연했을 때 소피 마르소가 받은 만큼은 아니었지만 광고료로 수천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에도 유덕화, 여명 등이 광고에 기용된 바 있다.

당시 소피 마르소는 한국 스태프들과 같이 회식 자리를 갖기도 했다. <라붐 시리즈>나 <유 콜 잇 러브>에서의 청순한 이미지를 떠올렸던 스태프들은 소피 마르소가 을 아예 못하거나 해도 한두 잔이나 할 줄 알았는데, 막상 같이 마셔보니 매실주 한 병을 다 마시고도 소피 마르소에게서 전혀 술기운을 찾아볼 수 없어 놀랐다고 한다.

1991년 《쇼팽의 푸른 노트》가 한국에 개봉하자 소피 마르소는 영화 홍보를 위해 다시금 방한하였는데 그녀를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극장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1993년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방한 때도 소피 마르소가 대통령과 같이 왔다. 당시 소피 마르소를 보기 위해 몰려든 군중을 보고 미테랑은 그 사람들이 다 자기를 보러 왔다고 생각해 최정화 통역사에게 "마드무아젤, 내가 한국에서 이렇게 인기가 있는 줄은 몰랐소."라고 대단히 흡족해했다고 한다.
2015년, 영화 《제일버드》 홍보를 위해 내한하여 연예가중계 등 한국 언론과 인터뷰를 가졌다.

4. 출연작

4.1. 영화

<rowcolor=#ffffff> 연도 제목 배역 비고
1980 라붐 빅 베레톤
1982 라붐 2
1984 사강의 요새 Madeleine de Saint-Ilette
나이스 줄리 줄리
1985 성난 사랑 마리
폴리스 Norya
1986 지옥에 빠진 육체 Lola Kolber
1988 유 콜 잇 러브 발렌틴 에즈퀴라
혁명가의 연인 Céline
1989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Blanche
1990 고요한 펠리세이드 Bernadette
1991 샤샤를 위하여 로라
쇼팽의 푸른 노트 Solange Sand
1993 팡팡 Fanfan
1994 달타냥의 딸 Eloïse d'Artagnan
1995 브레이브 하트 프랑스의 이자벨
구름 저편에 포토폴리오 속 여성
1997 안나 카레니나 안나 카레나나
마르키스 Marquise du Parc
파이어라이트 Élisabeth Laurier
1999 로스트 & 파운드 Lila Dubois
한여름 밤의 꿈 히폴리타
007 언리미티드 엘렉트라 킹
2000 피델리티 Clélia
2001 벨파고 리사
2003 알렉스 & 엠마 Polina Delacroix
내 남편 길들이기 Marie-Dominique Delpire
Les clefs de bagnole La clapman [17]
2004 넬리 Nelly
2005 안소니 짐머 키아라 만초니 [18]
2007 트리비알 루시 / 빅토리아 감독, 각본
2008 피메일 에이전트 루이 데스폰테인
비밀일기 [19]
체인징사이드: 부부탐구생활 아리안 마르시악 [20]
2009 돌아보지마 Jeanne No. 1
카르타헤나
2010 디어 미 마거릿 벨 마가렛 플로 [21]
2012 해피니스 네버 컴즈 얼론 샬롯 [22]
2013 어레스트미 죄인
2014 어떤 만남
섹스 러브 앤 테라피 주디스 샤브리에
2015 뷰티풀 레이디스 마틸드
A Spiritual Matter 빅토리아
2018 미세스 힐스 헬레네 감독, 각본
2021 다 잘된 거야 엠마뉘엘
2022 I Love America Lisa

5. 감독작 / 각본작

<rowcolor=#ffffff> 연도 제목 비고
1995 L'Aube à l'envers 단편 영화
2002 사랑한다고 말해줘 감독, 각본
2007 트리비알 감독, 각본, 출연
2018 미세스 힐스 감독, 각본, 출연

6. 저서

<rowcolor=#ffffff> 연도 제목 비고
1996 Menteuse [23]

7. 여담

  • 청순하기만한 얼굴과 달리 직접 영화감독을 맡기도 하고 여배우를 주인공으로 한 반자전적인 소설을 쓰기도 하는 등 지적인 면도 많이 갖추고 있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 중에는 영어로 된 작품도 많은데 영어대사를 완벽히 소화해 내는 것으로 보아 영어능력도 수준급이다.
  • 1985년에 Certitude라는 앨범을 내어 잠시 가수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앨범의 작사는 프랑스 가수 줄리엔 클레르 (julien clerc)와의 협업으로 유명한 작사가 에티엔 로다 질(Etienne Roda-Gil)이 맡았고 작곡은 프랑크 랑골프(Franck Langolff)가 담당하였다.[24]
  • 지금은 세월이 흘러 어느새 중년 여배우가 되어 젊은 시절의 청순미는 찾기 어렵지만, 나이에 맞게 기품이 느껴지는 엄청난 미모를 자랑한다. 타고난 몸매는 어디 가지 않아서 2014년 개봉한 "어떤 만남"에서의 베드신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 국내에서 2002~2006년 라붐1, 라붐2, 유 콜 잇 러브(암전처리) DVD가 발매되었으나 모두 무판권으로 의심이 되고 있으며, 2015년 12월 이오스엔터를 통해서 라붐1, 라붐2, 유 콜 잇 러브 3작품 모두 블루레이로 정식 발매되었다. 유 콜 잇 러브 블루레이는 무수정판으로 발매되었다. OST의 경우 1980년대 중반에 라붐1,2편은 서울레코드사에서, 유 콜 잇 러브는 성음레코드에서 LP와 테잎을 발매했다. 현재 라붐 1~2가 한 장에 들어간 OST 합본, 유 콜 잇 러브 OST 모두 온라인 상에서 구입할 수 있다.


[1] 많은 대중들이 소피 마르소하면 떠올리는 리즈 시절이다. [2] 유 콜 잇 러브 당시의 모습이다. [3] 이 기록은 《 제국의 역습》이 개봉하기 전까지 장장 8개월 간 깨지지 않았다. [4] 현재 가치로 추산하면 40억 이상 예상 [5] 두 사람은 단순히 인기있는 개그맨이 아니라 80년대부터 오와라이 BIG 3 중 2명으로 꼽힐 만큼 일본의 국민 개그맨들로 평가받는 이들이다. [6] 당시 아카시야 산마는 우리들은 익살족이라는 인기 예능 프로그램의 꼭지 중 하나였던 타케짱 맨에서 악당인 블랙 데빌 역을 맡고 있었다. [7] 결국 이 일로 인해 제 2회 도쿄 국제 영화제부터는 MC가 다른 사람들로 바뀌었다. 원래는 매 영화제마다 타모리와 아카시야 산마가 사회를 보기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8] 나머지 2명은 브룩 쉴즈 피비 케이츠. [9] 참고로 "Reality"와 "Your Eyes", "You call it love", 세 노래 모두 블라디미르 코스마라는 프랑스 음악가가 만들었다. [10] 다만, 의외로 《라붐 시리즈》 자체는 대한민국에서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는데 《라붐 1》은 2013년에 프랑스 측에서 정식 판권을 받아 대한민국의 극장에서 디지털 리마스터링으로 개봉한 게 최초였고, 1989년 금성비디오에서 출시한 라붐 비디오는 해적판이었다. 《라붐 2》는 만들어진 지 4년 만인 1986년에 극장에서 공식 개봉했으나 극장 흥행 자체는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1] 당시까지 개봉한 프랑스 영화들 중 최대 제작비를 들인 영화였다. [12] 훗날 소피 마르소는 폴리스 (Police)를 찍었을 때 모리스 피알라 감독이 강압적인 디렉팅으로 자신을 학대했다고 폭로하였다. 모리스 피알라 감독은 형사 역을 맡은 제라르 드파르디유에게 소피 마르소의 뺨을 진짜로 때리라는 지시를 하였고 결국, OK 싸인이 나올 때 까지 그녀는 제라르 드피르디유에게 뺨을 여러 차례 맞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영화에서 제라르 드피르디유에게 강한 추궁을 받은 끝에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도 의도하지 않은 연기였다고. 소피 마르소는 촬영장에서의 정신적인 학대에 지쳐 촬영 대기 시간에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피 마르소는 폴리스 개봉 당시 영화 홍보 활동에 참석하지 않았다. [13] 프랑스에서 주로 활약한 스위스 출신의 세계적인 명배우. 주로 작가주의 영화에 출연하였지만 《크로우 2》에서는 액션배우로 주연을 맡기도 했다. [14] 이 인연으로 2012년 스카이폴 프랑스 프리미어에 깜짝 등장했다. [15] 르펜이 결선투표에 진출하자 프랑스 전역에서 공화국을 사수하자면서 르펜 반대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났고( 노무현 탄핵 반대 시위 못지않을 정도였다.), 소피 마르소뿐만 아니라 수많은 연예인, 스포츠스타들도 대놓고 르펜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지네딘 지단은 부모님이 알제리 출신이라서 그런지(지단 본인은 마르세유 출신이다.) 국민전선을 극구 반대하면서 혹여 르펜이 당선되면 은퇴해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1998 프랑스 월드컵 우승 당시에도 르펜은 대놓고 아프리카계를 욕했다는 것) 반면 보신탕을 야만적이라고 비난하는 브리지트 바르도는 이런 인종차별적인 정당을 골수적으로 지지한다. 투표 결과는 르펜의 참패였다. [16] '하이랜더' 시리즈의 주인공 코너 맥클라우드 역을 맡았던 배우이다. 프랑스 배우인 탓에 크리스토퍼 랑베르라는 프랑스 발음으로 알려져있기도 하다. 그의 부친이 프랑스 외교관으로 미국 뉴욕 주재중에 그를 낳았기 때문에, 미국 국적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은 유엔본부가 있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보냈으며, 영화는 주로 프랑스에서 찍었다. [17] 영어제목 The Car Keys. [18] 2007년에 폐지된 KBS 외화 방영 프로그램 토요명화의 마지막 방영작이었다. [19] 원제 LOL (Laughing Out Loud) [20] 원제 De l'autre côté du lit [21] 원제 L'âge de raison [22] 원제 Un bonheur n'arrive jamais seul [23] 영제 Telling Lies [24] 두 사람은 바네사 파라디의 데뷔 곡 Joe le taxi를 같이 만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