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코토 칼리파국 관련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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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751> 정치·국가원수 | <colcolor=#000,#fff> 칼리파 |
민족 | 하우사족 | 풀라족 | |
언어 | 하우사어 | 풀라어 | |
지리 | 나이저강 |
소코토 칼리파국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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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코토 칼리파국 دَوْلَارْ خَلِيفرْ سَݣَُوتُواْ دَوْلَةُ الخَلاِفَة فَي بِلَاد السُودَا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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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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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아흐마두 라파이 시기의 최대 강역 | |||||
1804 ~ 1903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하우사 소왕국들 |
대영제국 [[영국령 나이지리아| 북나이지리아 보호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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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서아프리카 | ||||
수도 |
구두(1804) 소코토(1804-1850, 1851-1902) 비르닌 콘니(1850) 버미(19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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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 원수 | 칼리파 | ||||
종교 | 수니파 이슬람 | ||||
민족 | 하우사족, 풀라족 등 | ||||
언어 |
아랍어(공식 언어) 하우사어, 풀라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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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2,000만 명(1837년) | ||||
면적 | 2,200,000km2 | ||||
주요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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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 디르함, 디나르, 탈러, 카우리 | ||||
현재 국가 |
[[나이지리아| ]][[틀:국기| ]][[틀:국기| ]] [[니제르| ]][[틀:국기| ]][[틀:국기| ]] [[차드| ]][[틀:국기| ]][[틀:국기| ]] [[카메룬| ]][[틀:국기| ]][[틀:국기| ]] [[부르키나파소| ]][[틀:국기| ]][[틀:국기| ]] [[베냉| ]][[틀:국기| ]][[틀:국기| ]]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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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코토 칼리파국은 나이지리아 북부 하우살란드 출신의 근본주의 성직자 우스만 단 포디오가 풀라족들을 끌어들여 건설한 신정 국가로 니제르 남부, 나이지리아 북부, 카메룬 북부, 차드 남서부 등등을 포괄한 대제국이었다.이 국가로 인해 하우사어의 사용 범위가 서아프리카 이슬람권 전역이 되었고, 아프리카 중부 내륙의 유목민족 풀라족의 세력이 서아프리카 해안까지 널리 팽창했으며, 나이지리아 역사상 송가이 제국과 더불어 최초로 구전 전승이 아닌 자체적인 역사 기록과 본격적인 중앙집권화가 시작되었다. 이 때 소코토 칼리파국에서 갈라져 나온 풀라족들은 말리의 바마나 제국을 정복하고 서아프리카 기니 일대에 대규모로 정착했으나 20세기 초 프랑스와 영국에 의해 완전히 병합되었다.
한편 오늘날 극단주의 테러 단체 보코 하람이 이 나라를 모티브로 삼았다고 주장하지만, 부족 관습법이 우선하던 서아프리카에 중세 수준이긴 하지만 사법 체계를 도입하고, 창건자 우스만 단 포디오가 권력을 후계자들에게 평화롭게 이양한 소코토 칼리파국을 이런 테러 단체에 비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2. 역사
2.1.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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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사족이 세운 카노 왕국의 1800년대 모습 |
하우사족과 풀라족이 사는 하우살란드의 소왕국들이 바로 이런 경우였다. 이 지역 군주들은 명목상으로는 무슬림이었으나 부족민 문화에서 아직은 부족 토속 신앙의 영향력이 더 강했다. 이슬람이 전파된지 몇 백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토속 신앙이 만연해있었던 것. 아랍인들로부터 이슬람을 배운 신학자들은 토속 신앙 풍속과 이슬람 문화가 공존하는 현상에 대해 불만을 품고 샤리아 법이 문자 그대로 실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토속 신앙을 당장 금지할 것을 요구했다. 이런 이슬람 신학자들은 1700년대 말부터 꾸준히 서아프리카 방방곳곳을 돌아다니며 이슬람 신앙으로의 회귀를 목놓아 외쳤다.
이러한 신학자들 중 '우스만 단 포디오'가 있었다. 풀라족 출신이었던 우스만 단 포디오는 유력한 소왕국들 중 하나였던 고비르 술탄국을 중심으로 이슬람을 포교하고 다녔다. 그러나 그의 제자이기도 했던 '무함마두 윤파'가 고비르 술탄에 오른 뒤 터번 착용 금지, 이슬람 선교 금지, 단 포디오의 활동을 막는 등 뒤통수를 치자 크게 배신감을 느낀 단 포디오는 이웃한 유목민 풀라족의 도시 '구두'를 찾아가 몸을 의탁했다.
옛 스승이 자신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진 무함마두 윤파는 1804년 2월 21일 단 포디오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한편 우스만 단 포디오는 풀라족 추장들에게 아미르 알 무미닌(신앙인들의 장군)으로 선언되었으며, 하우살란드의 고비르 술탄국에 대한 지하드를 선포하였다. 단 포디오는 춘투아 전투 등 일부 전투에서 패전하긴 했으나 강력한 풀라족 기병들의[1] 힘을 빌려 1805년부터는 전쟁에 승기를 잡았다. 단 포디오는 게릴라 전술을 펼쳐 주요 도시와 소왕국들을 하나하나 함락했고,[2] 1809년에는 마침내 자신을 배신했던 고비르 술탄국을 함락함으로써 5년에 걸친 전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같은 해에 단 포디오의 아들 무함마드 벨로가 신도시 소코토를 건설하고 도읍으로 삼았다. 우스만 단 포디오는 신학자 출신으로서 자신을 서아프리카에 정통 이슬람을 확립하는 칼리파로 칭했으며, 그가 건설한 풀라족의 아미르국은 소코토 칼리파국으로 거듭났다.
2.2. 확장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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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코토 칼리파국의 중무장 기병[3] |
소코토 칼리파국은 중앙집권제 국가가 아니라 여러 개의 아미르국, 즉 토후국들의 느슨한 연방에 더 가까웠다. 각지의 아미르들이 수도 소코토에 거하는 칼리파의 권위를 인정하는 식의 굉장히 지방분권적인 체제였던 것. 전성기 시절에는 약 30명의 아미르들이 칼리파에게 충성을 바쳤다. 이 아미르들은 소코토의 칼리파, 즉 소코토 술탄이 명목상 임명하는 방식이었으나 실제로는 세습직이었고 막대한 자율성과 권한을 부여받아 제 영지 안에서는 왕과 다름없이 행세했다. 소코토의 칼리파는 기존 도시들을 합병시키는 것 외에도 '리밧'이라 하는 새로운 요새도시들을 지어 국경을 확장했다. 리밧에 병영, 학교, 시장 따위를 지어 풀라족 유목민들을 정착시키고 농경지의 면적을 늘렸던 것. 덕분에 소코토 칼리파국은 빠른 속도로 확장할 수 있었다.
소코토 칼리파국의 확장은 서아프리카에도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쳤다. 가장 큰 영향은 바로 이슬람의 전파였다. 애초부터 나라를 세운 단 포디오부터가 열성적인 선교사였고 무슬림이었다. 소코토 칼리파국은 정복한 영지 내에 강제로 이슬람을 포교했고, 덕분에 소코토 칼리파국이 지배한 북나이지리아와 남니제르 일대는 확실한 이슬람의 땅으로 변모했다. 기존의 전통 구전법 대신 이슬람식 샤리아가 시행되어 사유재산, 결혼, 사법 등 모든 가정대소사를 책임졌고 곳곳에 모스크가 지어졌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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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코토 칼리파국의 군대 재현도 |
누페 왕국은 나이지리아 중부에 있던 강력한 왕국으로, 당시 엣수 마지야 2세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계 분쟁과 내전이 터져 한창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이 기회를 포착한 우스만 단 포디오의 형 압둘라히 단 포디오가 1806년 군대를 이끌고 누페 왕국을 침공했다. 누페 왕국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소코토 군대를 이기지 못하고 패배, 엣수 마지야 2세도 전사했다. 1808년 누페 왕국을 정복한 소코토 칼리파국은 그 곳에 대신 비다 아미르국을 설치하고 풀라족 출신 말람 덴도를 새 아미르로 임명했다. 이로 인해 누페 땅은 완전한 이슬람 지역으로 변했고, 누페어를 기록하기 위해 아랍어가 도입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소코토 칼리파국은 기존의 제국들을 약화시키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오요 제국과 카넴-보르누 제국. 두 제국 모두 한때 상당한 강대국이었고 특히 카넴-보르누 제국은 1,000년 넘게 이어온 어마어마한 역사를 자랑하는 제국이었다. 그러나 소코토 칼리파국이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 둘과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소코토 칼리파는 오요 제국의 봉신국이던 일로린 아미르국을 부추겨 오요 제국에 반기를 들게 사주했다. 안그래도 내란으로 정신없던 오요 제국은 무력했고 망하지는 않았지만 국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되어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카넴-보르누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천년 동안 버텨왔던 카넴-보르누 제국도 내란, 외부 위협으로 한참 시름시름하고 있었다. 소코토 칼리파국은 이를 이용해 보르누 제국의 수도 보르누를 함락, 약탈한 뒤 불태워버렸다. 카넴-보르누 제국도 망하지는 않았으나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2.3.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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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코토 칼리파국의 병사들을 찍은 사진 |
그러나 프랑스보다 한발 앞서 소코토 칼리파국에 진출한 것은 바로 영국이었다. 베를린 회담에서 아프리카의 식민지 분할이 확정되면서, 나이지리아 일대를 차지한 영국이 빠르게 1901년 소코토 칼리파국으로 밀고 들어왔던 것. 동시에 독일 제국도 카메룬에 대한 영유권을 근거로 동시에 소코토 칼리파국으로 쳐들어왔다. 영국의 프레드릭 루가드 장군은 아미르들 간의 불화를 교묘히 활용해 전투를 치르지 않은채 방어체계를 무력화시키고 수도 소코토로 빠르게 진군했다. 덕분에 영국은 독일보다도 훨씬 빠르게 소코토 칼리파국을 먹어치울 수 있었다.
독일이 아다마와 일대를 막 먹어치웠을 무렵, 영국은 이미 수도 소코토에 근접한 상태였다. 소코토 칼리파 무하마두 아타히루 1세는 최선을 다해 소코토에서 수성전을 벌였지만 압도적인 화력의 차이로 패배하고 결국 도망쳤다. 소코토를 정복한 영국은 무하마두 아타히루 2세를 새 칼리파로 추대했으나, 곧 칼리파제 자체를 폐지하고 1903년 3월 13일 영국의 직접 통치로 전환했다. 대신 술탄직은 폐지하지 않고 새로 설치한 '북나이지리아 보호령'의 상징적인 작위로 내버려두었다. 3개월 후 영국군은 도망쳐 저항하던 무하마두 아타히루 1세를 죽이는데 성공했고, 1906년에는 모든 무장 저항이 종식되면서 소코토 칼리파국은 10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소코토 칼리파국은 멸망했지만 소코토 칼리파 가문은 살아남았다. 다만 칼리파직은 박탈된 채로 술탄으로 강등시키고 "소코토 술탄국 위원회(Sokoto Sultanate Council)"를 세운 채 북부나이지리아 보호령에 귀속시킨다. 소코토 술탄은 지금도 나이지리아에 속하는 일종의 비주권군주제로 존속한다.[5] # 현재의 술탄은 2006년 즉위한 사두 아부바카르다.
3. 사회
정복 전쟁의 영향으로 새로 건설된 소코토 칼리파국은 100~250만여 명 가까이 되는 노예를 거느렸고,[6] 다른 서아프리카 국가들[7]과 마찬가지로 주로 노예 무역으로 재원을 마련하였다.[8] 기반이 충분히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레 탄생한 국가이다보니 소코토 칼리파국은 실제로는 30여개의 부족 토후국의 연합체나 다름없었다. 소토코 칼리프국은 이후 요루발란드를 약탈하여 세력을 더 키우는데 그 결과 칼리프국 인구는 약 1천만여 명 정도에 달했다.부족한 행정력과 지나치게 많은 인구 대비 노예 비율 같은 불안요인에도 불구하고 소코토 칼리파국이 그럭저럭 운영될 수 있었던 이유는 우스만 단 포디오의 능력과 역량 덕분이었다. 과거의 청빈하고 명망 높은 신학자 출신이었던 그는 생애 말년에 괜히 고나리질 안하고 동생들과 자식들에게 칼리프국을 물려주고 자신은 제2선에서 물러나 학문에 전념했고, 풀라족 추장들은 그를 영험한 인물로 생각하여 함부로 반기를 들지 않고 명령에 순순히 복종하는 편이었다.
소코토 칼리파국의 등장 이전 서아프리카에서는 아랍계/베르베르계 이외의 흑인 사회에서는 토속 신앙과 이슬람을 동시에 믿는 이중 신앙이 지배적이었으나, 소코토 칼리파국의 근본주의 정책으로 하우사족, 풀라족 사회 내에서 토속 신앙적 요소 상당수가 일소되었다.
4. 방계 국가
소코토 칼리파국 출신의 풀라족 추장들은 부족민들을 데리고 서진을 계속하였는데, 그 중 한 명인 셰이쿠 아마두는 비무슬림 왕국이었던 바마나 제국을 정복하였으나 거리와 행정 상의 이유로 소코토 칼리파국의 직접 통제를 받지는 않았다. 바마나 제국의 밤바라인들을 정복한 아마두는 마시나 제국이라는 독립된 국가를 창건하였으며 나이저 강을 통해 소코토 칼리파국과 교류하였다. 이후에도 풀라족 유목민들은 여새를 몰아 서아프리카 해안 지역 월로프족의 졸로프 왕국을 멸망시키고, 이를 기점으로 세네갈과 기니 일대에 풀라족 인구가 대규모로 정착하였다. 오늘날 기니에 거주하는 풀라족은 19세기 새로 이주해온 풀라족과 풀라어와 이슬람을 받아들인 여러 군소부족들 및 그 후손들이다.
5. 소코토 술탄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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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코토 술탄이 거주하는 궁전 |
소코토 술탄은 나이지리아 무슬림들의 최고 지도자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만, 문제는 이 타이틀 때문에 지하디스트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 엮이는 일이 많다는 것. 대표적으로 지하디스트 무장 단체 '안사루'는 '흑인 아프리카 무슬림들의 잃어버린 존엄성'을 회복한다는 구실로 소코토 칼리파국 부활을 맹세했고, 그 악명높은 보코 하람도 소코토 칼리파국을 롤모델로 삼는다며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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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술탄 사드 아부바카르 |
역사적으로도 보코 하람은 소코토 칼리파국을 계승하기는커녕 아예 정반대에 위치해있다. 보코 하람이 활동하는 곳은 옛 카넴-보르누 제국의 강역인 보르노 주(州)다. 이 일대는 소코토 칼리파국에 복속되는 것에 극렬히 저항했으며 끝까지 소코토 칼리파국의 통치에 맞서싸웠다. 이들은 소코토 칼리파국의 이념이 불순하고 썩어빠졌다 여겼고 살라피즘으로의 회귀를 외치며 소코토 칼리파국의 말리키 법과 수피즘 요소들을 부정했다. 그렇다고 보코 하람이 제대로된 살라피즘을 따르고 있냐하면 그것조차 아니어서 나이지리아 주류 살라피즘 학자들이 이들이 제대로 된 이슬람 법학 교육을 받지 못했고 문헌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며 비판할 정도. 소코토 칼리파국을 세우기 이전부터 이미 존경받는 학자이자 상당한 인품의 소유자였던 우스만 단 포디오와는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보코 하람은 그저 질낮은 테러리스트에 불과하다.
6. 역대 칼리파 · 술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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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파 |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우스만 단 포디오 | 무하메드 벨로 | 아부바카르 1세 아티쿠 | 알리 바바 빈 벨로 | |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아흐마두 아티쿠 | 아흐마두 루파이 | 알리유 카라미 | 아부바카르 2세 아티쿠 | |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무아주 아흐마두 | 우마루 빈 알리 | 압데라흐만 단 아비 바카르 | 무하마두 아타히루 1세 | |
술탄 |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
무하마두 아타히루 2세 | 무하마두 마이투라레 | 무하마두 탐바리 | 하산 단 무아주 아흐마두 |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시디크 아부바카르 3세 | 이브라힘 다수키 | 무하마두 마키도 | 사두 아부바카르 | }}}}}}}}}}}} |
[1]
과거 도보로 소를 치는 목동들이었던 풀라족들을 점차 투아레그족의 영향으로 기마 유목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던 참이었고, 풀라족들이 부족 간의 갈등을 멈치고 힘을 합쳐 우월한 기병 전력을 바탕으로 하우살란드를 정복하자 하우살란드의 여러 소왕국들은 겉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2]
이렇게 쉽게 소왕국들이 무너졌던 데에는 기존 소왕국들의 가혹한 세금 탓이 컸다. 카노 술탄국, 카치나 술탄국, 케비 술탄국, 고비르 술탄국 등 소왕국들은 서로 전쟁을 벌이며 그 군비를 대기 위해 신민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물렸다. 거의 죽기 직전까지 쥐어짜댔으니 국민들이 바로 소왕국을 버리고 단 포디오의 편에 붙었던 것이다.
[3]
나이지리아 북부의
하우사족들은 오늘날에도 명절이나 기념일에 소코토 칼리파국 기병을 재현하는 행사를 벌인다.
[4]
물론 모두가 순순히 칼리파의 개종 강요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서, 몇 십년간 치열하게 칼리파와 싸워 종교의 자유와 기존 토착신앙을 지켜낸 부족도 있긴 했다.
[5]
지금도 칼리프의 별칭 중 하나인 "
아미르 알 무미닌"(믿는 자들의 사령관)이라는 칭호를 쓰는 2명 중 한 명이다. 나머지 1명은
모로코 국왕.
[6]
남북전쟁 이전 미국 전역에 노예가 4백만여 명이었다. 다만 인구 비율로 치자면 소코토 칼리파국 쪽이 월등히 더 높다.
[7]
다호메이 왕국,
졸로프 왕국
[8]
건국 시점에서 얼마 가지 않아 영국이 노예 무역을 금지하고 서아프리카 해안의 노예 무역선들을 단속하기 시작하면서 대서양 노예 무역이 시들해졌기 때문에 아랍 세계와의 노예 무역에 더해
플랜테이션 농업 등 자국 내에서 노예 노동을 기반으로 한 산업 육성에 치중하게 된다.
[9]
이는
이탈리아 왕국이
바티칸을 합병했으나
교황만큼은 독재자인
무솔리니는 물론 국가원수인 이탈리아 국왕 마저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고
지방군주로 편입시키는 선에서 끝난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