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8-22 18:12:10

소그디안 바위 요새 공방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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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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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327년 초,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이 소그디아나인의 최후의 거점인 소그디안 바위 요새를 공략한 공방전.

2. 상세

기원전 329년, 알렉산드로스 3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소그디아나인을 공격하여 키로폴리스 공방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7개 도시를 파괴했다. 또한 소그디아나인들을 도우러 온 사카족을 상대로 야크사르 전투에서 대파했다. 그러나 폭염 속에서 사카족을 추격하던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기진맥진했고, 심한 갈증에 시달렸다. 알렉산드로스도 물 웅덩이가 나타날 때면 물을 마셨는데, 물이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에 설사병에 걸렸다. 상태가 심각해 운신조차 어려울 지경에 처해 막사에 옮겨져서 온종일 누워 있어야 했다.

전투 후 사카족 왕이 사절을 보내 "지난 전투는 도적 떼의 우발적인 공격에 의한 것이었을 뿐 우리의 공식적인 결정이 아니었다."라며 앞으로 알렉산드로스의 지시를 따르겠다고 밝혔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말을 믿지 않았지만, 자기가 설사병에 걸려버리고 장병들이 심한 갈증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원정을 계속하긴 어려웠기에 해명을 받아들이고 귀환길에 올랐다. 그러던 중 안드로마쿠스, 메네데무스, 카라누스가 이끄는 보병 2,000명과 기병 300명이 마라칸다 요새를 구한 뒤 스피타메네스를 추격했다가 스키타이 기병 600명의 지원을 받은 스피타메네스의 매복 공격으로 전멸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소식에 격노하여 헤타리오리의 절반, 근위대 전체, 아그리아니아군, 궁수, 그리고 보병대 중 가장 민첩한 병사들을 이끌고 마라칸다 요새를 다시 포위한 스피타메네스에게 달려갔다.

알렉산드로스가 달려오자, 스피타메네스는 즉시 요새 포위를 풀고 후퇴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스피타메네스에게 죽은 장병들의 유해를 매장한 뒤 적을 추격했으나 끝내 따라잡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후 마라칸다 요새에 피신해 있던 많은 주민이 마케도니아군 공격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고 격노해 마라칸다 요새를 포함한 폴리티메투스 강(지금의 자라프샨 강)이 흐르는 지역 전체를 초토화시키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그 후 박트리아로 돌아가서 베소스의 코와 귀를 자른 뒤 엑바타나로 데리고 가서 동포인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들 앞에서 공개 처형하게 했다. 이후 기원전 329/328년 겨울을 박트리아에서 보냈다.[1]

기원전 328년, 스피타메네스에 호응한 박트리아 주민들을 토벌한 뒤 다시 소그다니아로 진군하여 스피타메네스를 끈질기게 추격했다. 스피타메네스는 유격전을 전개해 적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히며 분전했으나, 알렉산드로스가 자기들의 영역까지 쳐들어오는 것에 압박감을 느낀 마사케타이 족에 의해 피살되어 수급이 알렉산드로스에게 보내졌다. 이리하여 스피타메네스 문제를 처리한 뒤, 그에게 가담하여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소그다니아인들이 최후의 거점으로 삼은 소그디안 바위 요새에 관심을 돌렸다. 그 요새에는 지난날 알렉산드로스에게 투항을 거부했던 박트리아 왕 옥시아르테스의 아내와 딸도 있다는 정보도 입수했다. 이 요새를 공략한다면, 소그디아나인은 더 이상 저항할 여력이 없을 것이었다.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27년 봄이 다가올 무렵 바위산으로 진격했다.

그곳은 천혜의 요새였다. 사방은 접근이 어려운 절벽이었으며, 눈도 두텁게 쌓여 있어 산을 오를 수 없었다. 반면 수비대는 방어 태세를 갖추고 식수를 충분히 비축해뒀다. 알렉산드로스는 공략이 힘들다는 걸 파악하고 요새만 넘겨주면 집으로 안전하게 돌려보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수비대는 코웃음을 치면서 "날개 달린 병사들을 구해보라"고 조롱했다.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병사들에게 상금을 내걸었다. 가장 먼저 바위산을 올라가는 자에게는 12달란트, 두 번째 사람에게는 11달란트, 세번째는 10달란트, 이런 식으로 1달란트가 걸린 열두번째 병사까지 상금을 주겠다고 했다. 이에 병사들은 앞다퉈 공격을 자원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앞선 공성전 때 절벽을 기어오른 경험이 있는 병사 약 300명을 모아 공격대를 꾸렸다. 그들은 쇠로 된 작은 막사용 말뚝을 가져와 꽁꽁 얼어붙은 눈 위나 땅 위에 박고, 아마로 만든 튼튼한 밧줄을 묶었다. 그리고 어둠을 틈타 가장 가파른 암벽을 타기 시작했다. 그곳이 적의 경계가 가장 허술하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얼음에 말뚝을 박으면서 각자 길을 내어 기어올랐는데, 그 과정에서 30여 명이 절벽 아래로 추락해 사망했다. 동이 틀 무렵, 병사들은 꼭대기까지 올라가 바위산 정상을 차지했고, 알렉산드로스가 지시한 대로 천을 흔들어 성공을 알렸다. 알렉산드로스는 즉시 포고관을 시켜 수비대에게 "내가 날개 달린 병사들을 구해 이미 정상을 차지했으니 당장 항복하라"고 전하게 했다.

수비대는 이 광경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완전 무장한 대규모 병사가 정상을 차지한 것으로 착각해 곧바로 투항했다. 그 중에는 옥사아르테스의 아내와 딸들도 끼여 있었는데, 이 딸들 중엔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에 동행한 장병들이 "다리우스의 아내 스타테이라를 제외하고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칭송한 록사나도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녀를 본 순간 사랑에 빠졌고, 박트리아 왕의 결혼 동맹을 맺어 복종시키고자 그녀를 아내로 삼았다. 이리하여 소그디아나 원정을 마무리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옥수스 강과 야크사르 강 사이에 거주하는 파레이타카이 부족을 정벌하러 진군해, 코리에네스 바위 요새 공방전을 치렀다.


[1] 이 시기에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의 목숨을 구했던 클레이토스 장군이 연회 석상에서 페르시아의 관습을 따라하는 것에 비난하자 만취한 알렉산드로스가 분기를 이기지 못하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또, 종군 역사가 칼리스테네스가 시종들의 알렉산드로스 암살 음모에 연루되어 처형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