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2-27 10:28:50

상갈라 공방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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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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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326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이 카타에이 족이 농성하는 상갈라 ( 시알코트) 시를 공격하면서 벌어진 공방전.

2. 상세

기원전 326년 5월, 알렉산드로스 3세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파우라바 왕국의 라자 포루스를 물리쳤다. 포루스는 알렉산드로스의 동맹이 되는 조건으로 그의 왕국을 계속 통치하는 게 허용되었고, 알렉산드로스는 계속해서 진군하여 아케시네스 강을 거쳐 히드라오테스 강을 진군하며 여러 부족들을 복종시켰다. 히드라오테스 강변의 부족들은 대체로 항복했지만, 카타에이 부족은 알렉산드로스의 침략에 맞설 준비를 하며 이웃 부족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들은 뛰어나고 용감하다는 평판이 자자했고, 수도 상갈라는 방비가 견고하기로 유명했다. 이에 옥시드라카이와 말리 족도 그들과 연합하여 알렉산드로스에 대항하기로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포루스와 카슈미르의 통치자 아비사레스[1]에게 이들을 진압하게 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직접 카타에이족 정벌에 나섰다. 히드라오테스 강에서 이틀간 행군하여 핌프라마에 이르러 아드라이스타이 족의 복종을 받아낸 후, 하룻동안 휴식을 취한 뒤 상갈라로 진격했다. 상갈라 전방의 산에는 카타에이군과 이들을 지원하는 이웃 부족들이 주둔했다. 그들은 산 주위를 3겹의 수레로 빙 둘러싸서 방어벽을 세우고, 그 안에 진을 쳤다.

알렉산드로스는 궁기병들을 출격시켜 적의 전선을 따라 달리면서 화살을 쏘라고 지시했다. 이는 아군이 전투 대형을 구축하기 전에 적이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적군이 교전을 위해 방어진지를 떠나기 전에 가능한 한 큰 타격을 안기려는 것이었다. 궁기병들이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클레이토스의 기병 부대와 특수 기병 부대는 우익을 맡고 그 바로 옆에 근위대와 아그리아니아군이 배치되었다. 좌익에는 페르디카스의 기병 연대와 중보병 대대가 배치되었고, 궁수들은 둘로 나뉘어 각각 좌익과 우익에 배치되었다. 여기에 후속 부대의 기병과 보병들이 전장에 도착했다. 막 도착한 기병들은 양익의 부대를 보강했고, 보병들은 더 견고한 밀집 대형을 이루었다.

이렇게 배치가 완료되자, 알렉산드로스는 우익의 기병들을 지휘하여 적의 좌익을 향해 돌격했다. 그쪽은 짐수레들이 다소 넓은 간격으로 세워졌고, 지형적으로도 접근히 수월했다. 수비대는 방어벽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수레 위로 올라가 활을 쏘면서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병 돌격은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그는 즉각 말에서 내려 보병을 이끌고 공격에 돌입했다. 수레의 첫번째 전선에 포진한 적들은 쉽게 퇴각했지만, 두 번째 전선에 집결해 좀더 효과적인 방어전을 벌였다. 적병들이 더 작은 원을 이루며 밀집하자, 마케도니아군은 공터에서 공격하는 이점을 활용할 수 없었다. 이에 바깥쪽의 수레들을 치워낸 뒤 두 번째 수레들 사이의 빈틈을 찾아 각자 최대한 밀고 들어가야 했다. 마케도니아군은 끝내 이 공격에 성공했고, 수비대는 세번째 전선으로 후퇴했지만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도시 안으로 퇴각했다.

성벽 바깥의 적군을 모조리 몰아낸 뒤, 알렉산드로스는 보병들을 동원하여 도시를 에워싸게 했다. 성벽이 넓어서 전체를 포위할 수는 없었지만, 성벽이 깨진 한 지점을 찾아냈다. 그로부터 멀지 않은 전방에는 호수가 하나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전날의 패배로 동요한 적군이 어둠을 틈타 성 밖으로 나와 이 호수를 건널 거라 예상하고, 호수 둘레에 기병들을 배치했다. 과연 밤 10시 전후 인도 병사들이 몰래 성을 빠져나오다가 기병 순찰대와 맞닥뜨렸다. 먼저 나온 적군은 사살되었고, 나머지는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갔다. 알렉산드로스는 호수를 제외한 도시 둘레 전체에 이중 방책을 세우고 호수를 더 엄중히 지키게 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에게 근위대 3개 부대, 아그리아니아군 전체, 궁수 부대를 데리고 호수 쪽을 지키게 한 뒤, 적병들이 빠져나올 만한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에서 적군을 발견하는 즉시 달아나지 못하게 막은 뒤 나팔수에게 신호를 울리게 하라. 다른 장교들은 이 신호를 듣는 즉시 부하들을 이끌고 나팔 소리가 나는 지점으로 향하라. 명심하라. 내가 그곳에 있을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적군이 남기고 간 수레들을 모아 적병들의 도주로에 배치했다. 또한 방책으로 쓰려고 잘라놓았지만 아직 사용하지 않은 기둥들을 호수와 성벽 사이에 쌓아 장애물을 만들었다. 이 모든 작업이 어둠 속에서 이뤄졌지만, 장병들은 임무를 완수했다. 이윽고 새벽 1시에서 3시 사이에 적병이 호수로 이어지는 성문을 열어 호수 족으로 전속력으로 질주하자, 나팔수들이 즉시 신호를 올렸고 프톨레마이오스는 즉각 공격했다. 그들은 수레 사이를 가까스로 빠져나온 적병들을 남김없이 베어 쓰러뜨렸고, 적병은 탈출을 포기하고 다시 성안으로 후퇴했다.

얼마 후, 포루스가 코끼리와 인도군 5,000명을 이끌고 도착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공성 무기를 조립해 적정한 자리에 배치한 뒤 총공세를 벌이려 했지만, 마케도니아군이 성벽 밑 여러 지점을 파서 사다리를 세웠기에 공성 무기를 채 쓸 틈도 없었다. 이후에 벌어진 공세로 상갈라는 함락되었다. 인도군 1만 7,000명이 전사했고 7만 명 이상이 포로로 붙잡혔으며, 기병 500명과 전차 300대를 잃었다. 마케도니아군의 사망자는 100명에 채 못 미쳤으나 부상병은 1,200명이나 발생했다. 그 중에는 알렉산드로스의 호위 장교인 리시마코스도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전사자들의 유해를 매장한 뒤 비서 에우메네스에게 기병 300명을 맡겨 상갈라를 지지하여 투항하지 않던 두 도시로 가서 상갈라 함락 소식을 전한 뒤, " 지금 있는 곳에서 도주하지 않고 알렉산드로스를 친구로 받아들인다면 아무런 불이익도 당하지 않을 것이며, 자발적으로 항복한 다른 독립 부족들과 같은 대우를 해주겠다"는 약속을 전하게 했다. 그러나 두 도시의 주민들은 이미 상갈라가 함락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달아났다. 알렉산드로스는 주민들이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맹렬히 추격했으나, 이미 대부분의 주민들이 숨어버렸다. 도시에는 주민들이 버리고 간 500명의 병자가 남아있었는데, 알렉산드로스의 명령으로 모조리 살해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상갈라로 돌아와서 도시를 완전히 파괴한 뒤, 자신의 대의에 자발적으로 따른 부족들에게 상갈라의 땅을 넘겨주고, 포루스와 그의 병사들을 항복한 도시들에 파견하여 수비하도록 했다. 그 후 그는 더 먼 곳까지 정복하려는 야심을 불태우며 히파시스 강으로 진군했고, 히파시스 강에서 좀더 떨어진 갠지스 강 남쪽에 자리잡은 강대국 난다 왕조에 관한 이야기를 접한 뒤 그들과 한판 붙으려 했다. 그러나 오랜 원정에 지칠대로 지친 장병들이 명령을 거부하고 회군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히파시스 반란) 알렉산드로스는 분노해 이틀간 막사에 틀어박혔으나, 군심이 더 이상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어쩔 수 없이 회군하기로 했다.

그는 지금까지 승리를 거듭하여 전진하게 해준 신에게 바치는 감사의 제물이자 기념비를 세우기로 하고, 제단 12개를 짓게 했다. 그는 격식에 따라 제사를 올리고 운동경기와 승마 시합을 열었다. 그런 후 히파시스 강까지의 영토 지배권을 포루스에게 맡기고 회군했다. 다만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대신 인더스 강 하류로 진군한 뒤 그곳에서 함대를 타고 귀국하기로 했다. 그러나 인더스 강 하류 일대에 거주하는 부족민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치면서, 말리 원정을 치렀다.


[1] 그는 히다스페스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 포루스편에 가담했지만 전투 결과를 전해듣자 자신의 동생이 포함된 사절단을 알렉산드로스에게 보내 코끼리 40마리를 보내며 충성을 맹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