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14:51:43

빅토르 야누코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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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제4대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
Ві́ктор Януко́вич | Viktor Yanukovych
파일:빅토르 야누코비치.jpg
본명 빅토르 페도로비치 야누코비치
Ві́ктор Фе́дорович Януко́вич
Viktor Fedorovich Yanukovych
출생 1950년 7월 9일 ([age(1950-07-09)]세)
소련 우크라이나 SSR 도네츠크주 예나키예보
(現 러시아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예나키예보)
재임기간 제4대 대통령
2010년 2월 25일 ~ 2014년 2월 22일
서명
파일:빅토르 야누코비치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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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정당
[[소련 공산당|]] (1980-1991)
(2003-2010)
신체 191cm }}}}}}}}}


1. 개요2. 생애
2.1. 정치 활동2.2. 대통령직 상실 이후2.3. 전망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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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의 정치인으로 제4대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역임했다.

2. 생애

야누코비치는 1950년 7월 9일 소련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예나키예보에서 태어났다. 그는 2살 때 간호사였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청소년 시절에 절도와 폭력을 저질러 17살이 되던 1967년부터 3년간 소년원에서 수감 생활을 하였다. 1972년 버스 회사에서 전기공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그 후 도네츠크 기술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1980년 기술학교를 졸업한 직후에 예나키예보에서 운송 회사의 최고 관리자로 임명되었고,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

2.1. 정치 활동

1990년대 초반 정치에 입문했다. 정치 활동 중 소련 해체로 우크라이나는 소련에서 독립하였고 이후 동부 공업지대인 도네츠크주 주지사를 지냈다. 친러시아 성향의 지역당에서 활동하며 도네츠크 주지사로 영향력을 행사했고, 2002년 총선에서 지역당이 포함된 연정이 중앙 정권을 잡아 그도 입지를 굳혔다. 2002년 11월, 우크라이나 총리로 임명되어 중앙 정계에 진출했고, 2003년부터 지역당 당수를 지냈다. 2004년 10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빅토르 유셴코 후보와 격돌했으며, 1차 투표에서는 근소한 차로 유셴코가 앞섰으나, 유셴코와 야누코비치 모두 다수표는 얻지 못하여 11월에 결선 투표가 치러졌다. 개표 결과 야누코비치가 49.46%의 득표로 대통령 당선인으로 발표되었으나, 선거 부정이 개입되었다는 이유로 유셴코 후보 지지자들은 강력히 반발하였다. 오렌지 혁명으로 알려진 시위가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등 큰 논란 끝에 12월 26일 재선거가 실시되어 결국 유셴코가 다수표를 얻어 대통령 당선인으로 발표되자, 이번에는 야누코비치 후보 지지자들이 반발하였다. 그러나 선거 결과를 뒤집지 못하고 유셴코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야누코비치는 2005년 1월 총리직에서도 물러났다.

그 후 야누코비치가 이끄는 지역당은 여권 분열에 힘입어 2006년 3월 총선에서 최다 의석을 확보했다. 그러나 어느 한 정당도 과반을 차지하지 못한 상태였고 지역당은 공산당 등 친 러시아 성향의 다른 당들과 연정을 구성해, 2006년 8월에 야누코비치는 다시 총리 자리에 올랐다. 야누코비치의 정적이었던 유셴코 대통령은 정국 안정을 위해 야누코비치를 총리로 임명하며 동거정부가 구성되었다. 하지만 친서방 세력에 가까운 사회당까지 끌어들여 억지로 과반을 차지한 데다가 야누코비치를 둘러싸고 스캔들이 일어났으며 이 때문에 정국 불안은 계속되어 유셴코 대통령은 2007년 4월 국회 해산을 결정했으며, 이에 따라 조기 총선이 치러졌다. 조기 총선에서 지역당은 제1당의 자리는 유지했으나, 율리야 티모셴코가 중심이 된 다른 당들이 연정을 구성하여 그는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고, 티모셴코가 총리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2010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다시 지역당 후보로 선출되어 선거에 출마했다. 야누코비치는 1차 투표에서 1위에 올랐으나, 다수표는 얻지 못하여, 율리야 티모셴코 총리와 결선 투표를 치렀다. 이 선거에서도 극심한 정파, 지역, 민족간 대립으로 매우 심한 혼란이 있었으며, 결선 투표 결과 48.95%의 득표율을 얻어 근소한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야누코비치는 2010년 2월 25일, 제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야누코비치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에 율리야 티모셴코 내각은 해산되었으며, 야누코비치의 측근인 미콜라 아자로우(Микола Янович Азаров)가 지역당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후 티모셴코 전 총리는 직권 남용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아 수감되었고, 친러시아와 친 EU를 사이에 놓고 정국 불안은 계속되었다[1]. 2011년과 2012년에는 경제성장률이 괜찮게 나왔고 친서방 세력도 분열된 상태였기 때문에[2] 2012년 총선에서 접전지에서 다수 승리하여 연립정당과 합쳐 과반의석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선거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고 2013년도부터 경제위기가 다시 재발하기 시작하여 지지율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아자로우 총리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서부와 키이우 일대를 중심으로 계속되었으며, 2013년 하반기부터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확산되었다. 그는 유화책으로 야권 인사들의 사면을 발표하고 EU와의 관계를 강화하겠다고 하였고, 최종적으로 야권 대표와 휴전을 합의했으나, 문제는 이 합의를 멋대로 뒤엎고 만다.

게다가 경찰에 강경진압을 지시하여 경찰의 발포로 대규모 유혈사태가 일어났으며, 국민들과 야권은 더욱 강하게 반발하였다. 결국 분노한 시위대가 키이우와 의회를 점거하자, 야누코비치는 키이우를 떠나 도주하였다. 이 일로 여당도 그에게 등을 돌렸으며, 2014년 2월 22일, 국회는 그를 인권침해와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탄핵안을 가결, 이로써 야누코비치는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다.

2.2. 대통령직 상실 이후

파면된 이후 러시아로 망명했다. 1년 뒤 차남 빅토르를 교통사고로 잃었고, 또 그로부터 1년 뒤에는 애인을 데리고 불륜을 저지른 사실이 들통나 부인과 이혼을 하는 등 악재가 겹쳤다.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2014년 2월 28일에 로스토프나도누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자신이 여전히 우크라이나의 합법적인 대통령이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태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우크라이나 라다는 2015년 2월 4일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의 대통령 직위를 박탈하는 법안을 가결했고 # 이에 따라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제4대 대통령을 지낸 야누코비치는 공식적인 대통령 직위 외에도 전임 대통령으로서 특권과 혜택도 무효화 됐다. 특히 2014년에 야누코비치의 호화별장이 공개되자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이를 보고 하나같이 매우 분노했다. # #[3] 보다 보면 정말 가관인데, 방들을 전부 황금과 대리석, 모자이크로 도배를 해놓은 것은 물론, 화장실 변기까지 황금으로 만들어 놨다. 이후로 우크라이나 정부가 국유화해서 저택은 박물관, 정원은 동물원으로 개장해버렸고 러시아의 침공때는 대피소로 변경되었으나 정원 부분만 폭격당해서 인명 피해는 없었고 백조만 두 마리 죽었다고 한다. #

2015년 2월 10일에 러시아 검찰은 우크라이나 검찰의 야누코비치 송환 요구를 거부했다. 정치적 동기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

2019년에 우크라이나 법원은 궐석 재판을 열어 야누코비치에게 반역죄로 징역 13년형을 선고했다. 법원은 야누코비치가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서한을 보내, 군인을 파견해 시위를 진압해 달라고 요청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

2022년 1월에는 최고 라다가 자신을 탄핵이 아닌 법률로써 대통령 지위에서 배제한 것은 위헌이라며 최고 라다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 그러나 야누코비치가 망명해 있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바람에 야누코비치의 청구가 인용될 확률은 희박해졌다.

2022년 5월에 우크라이나 법원이 국가반역죄 혐의로 체포 명령을 내렸다. # 2022년 8월에는 유럽연합의 제재 명단에 올랐다. #

2.3. 전망

축출 이후 별 다른 소식이 거의 없는데, 어차피 우크라이나로 돌아가면 맞아죽거나 암살당할 가능성이 거의 100%이므로, 여생을 러시아에서 지낼 가능성이 높다.

2004년 대선 2010년 대선 박빙이었던 것처럼 당시 우크라이나는 친러 성향 지지층이 전국민의 대략 절반쯤 된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꽤 두터웠고, 2010년 대선에서 친서방 진영이 분열이 되었던 상황인데다가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여론조사 자료에서 보듯이 비록 동부쪽을 중심으로 나름대로 탄탄한 지지기반도 가지고 있던터라 야누코비치가 유능한 정치력을 선보였으면, 윗나라인 벨라루스처럼 확고한 친러 진영 국가로 만들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아누코비치는 그 지지기반을 가지고도 권모술수에만 능할 뿐, 라이벌인 티모셴코와 유센코보다 나을 것이 없는 형편없는 통치력을 보여준 데다가 그 과정에서 과거의 앙심을 이유로 티모센코를 감옥에 집어넣는 정치탄압을 자행하여 서부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일으켰으며, 결국 경제문제가 혁명으로까지 이어지고 우크라이나가 뒤엎어져서 친서방 진영이 재집권하자, 러시아는 차선책으로 러시아계가 다수인 크림 반도와 돈바스 일부만 침공하여 합병하거나 분쟁지대화했지만, 그 역풍으로 나머지 우크라이나는 친서방 진영 지지율이 대폭 상승하고 말았고, 친러 세력은 부패, 매국세력이라는 딱지가 붙으며 엄청난 상처를 입고 말았다.[4] 당연히 그 대가로 가해진 서방세계의 제재로 인해 러시아 경제는 죽을 맛이며, 전통적으로 반러인 우크라이나 서부는 물론, 원래는 나이롱 친러이던 우크라이나 동부 대부분까지 반러로 돌아섰다.[5]

2019년 우크라이나 총선 결과만 봐도, 친러 정당인 인생을 위한 야권연단 도네츠크주, 루한스크주 오데사주 일부 지역에서만 승리했을 뿐이다. 사실 재임기간 종에는 러시아로써도 친서방 세력보다 낫다고 볼뿐, 마냥 좋은 파트너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당시 우크라이나 경제의 이권을 차지하던 올리가르히 세력들이 가지고 있던 사업권을 빼앗아서 야누코비치가 자신의 수하들에게 나눠주면서 이권을 빼앗긴 올리가르히들이 친러진영에서 이탈하여 친서방 정당쪽에 붙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야누코비치를 계속해서 밀어준 것은 야누코비치 외의 대안이 딱히 마땅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이 대안부재가 유로마이단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러시아 당국에게 조급증을 불러 일으켰고, 그 결과 친러계 정당 지지층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크림반도 병합으로 이어진 것인데, 이 병합으로 푸틴의 지지율이 2018년 연금개혁 이전까지 80%대를 웃돌았던지라 국내 정치적으로는 큰 이득을 봤지만 유로마이단 이후로 집권한 포로셴코의 지지율이 임기초를 제외하면 20%대를 오가는 수준에 그쳤고 차후에 친러계 정당의 재집권이 가능할 수도 있던 것을 생각해보면 러시아가 국제 정치적인 면에서는 장기적 이득을 놓친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 된것이다.

하지만 2022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전하고 우크라이나에 친러 괴뢰정부를 세우는 조처를 취한다 해도 야누코비치가 무언가 기회를 얻을 가능성은 낮다. 워낙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이미지가 최악이라 대통령직 복귀를 통한 괴뢰정부 수장은 어불성설이고[6] 괴뢰정부나 점령지에서 적당한 지위에 앉혀 얼굴마담으로 쓰려고 해도 반발만 불러올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정보부에 따르면 그가 민스크에 체류하고 있으며 러시아가 그를 괴뢰 대통령으로 만들 가능성이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 최근 항전 중인 젤렌스키를 향해 "자존심을 버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던 평화협정을 달성해야 한다"고 비판을 가했는데 # 여기서 말하는 평화협정이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게 요구하는 조건인 1) 군인 수를 6만 명으로 축소하는 비무장화 2) EU든 나토든 어디에도 가입하지 않는 중립국화 3) 사실상 친서방 성향 젤렌스키 정권의 축출인 탈나치화 이다. 때문에 실제로 집권해도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정권조차 2022년 4월 이후 지속적인 실책과 장기전으로 인한 서방 국가들의 등돌림과 징집 정책으로 젊은 세대의 지지를 잃어 이 전쟁에서 승리해도 정권의 몰락으로 끝날 와중에 아예 나라의 재산을 자신의 이익에 쓴 부패 독재자에 매국노나 다름 없던 야누코비치는 가능성이 더더욱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

3. 기타

드라마 국민의 일꾼에서 공무원 자리를 하나 달라고 이력서를 보낸 것으로 언급된다. 당연히 이력서는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또한 야누코비치의 저택도 대통령 관저로서 드라마 초반에 등장하는데, 주인공은 호화 관저를 거절하고 본래 살던 사저(아파트)에서 출퇴근한다.

페트로 포로셴코 정부 시절 TSN에서 각 대통령의 신년사를 모아 징글벨 노래에 맞춘 영상을 제작했는데, 야누코비치는 대사 하나를 제외하면 인간 관악기 역할이다. # 우크라이나 내 야누코비치의 위상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여론조사 자료를 보면 야누코비치가 젤렌스키 이전까지 우크라이나 대통령 가운데서 평균적인 지지율이 가장 높았고,[7] 심지어 말년 지지율이 20% 중반대로 역대 우크라이나 대통령 가운데서는 가장 높았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젤렌스키 이전 역대 우크라이나 대통령들의 지지율 추이를 보면 취임 당시 지지율은 50% 미만으로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낮았지만 집권 3년차에는 30% 이상, 집권 말에는 20%에 근접하며[8] 역대 우크라이나 대통령 중 가장 높았다. 물론 다른 우크라이나 대통령들이 지지율이 빨리 꺼져서 지지율이 야누코비치 아래로 떨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야누코비치는 친러 성향 우크라이나인이라는 나름대로의 콘크리트 지지층을 가져서 지지율이 떨어지고도 그 정도를 유지했다는 것인데 그걸 제대로 못써먹고 타도당한 것을 보면 야누코비치가 정무적으로 상당히 무능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9][10] 특히 경제파탄으로 욕먹는 옐친과 비교하면 더더욱 그렇다

추도식에 참석해서 묵념하다가 바람에 날려 엎어진 근조 화환에 머리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적이 있다. 자기가 바친 꽃다발에 자기가 당하는(?) 장면이 공중파 뉴스에 그대로 나가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큰 웃음을 주었다.[11] 2010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키이우에 있는 붉은 군대 무명용사의 영묘를 찾았다가 벌어진 일인데, 미장센의 임팩트가 워낙 커서 1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관련 영상의 댓글창은 하나같이 우스갯소리로 도배가 되어 있다. 러시아어로 된 영상과 우크라이나어로 된 영상에 달리는 댓글의 핀트가 미묘하게 다른 것이 눈에 띈다.

러시아어를 모어로 한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으로, 소련 해체 이후 정계에 입문을 한 후에도 평소 러시아어를 주로 사용했으며 우크라이나어에는 비교적 서툴렀다. 특히 국가 주요 행사에서 국가가 울려퍼질때도 가만히 서 있기만 해서 고위직이라는 사람이 국가도 못 부르냐고 욕을 먹기도 했는데, 본인도 이를 의식하듯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공식 행사에서 우크라이나어로 연설을 하고 국가도 따라 부르는 등 이전과는 좀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1] 친서방 외교 정책을 펼치면서도 CIS에 잔류하는 등 러시아 및 구소련 국가들과의 관계 또한 중시했던 유셴코와는 정 반대로 야누코비치는 친러 외교 정책을 펼치면서도 그렇다고 유럽연합 및 미국과의 관계 또한 망치고 싶지는 않았기에 계속해서 줄다리기 외교를 했고, 이는 훗날 유로마이단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2] 티모셴코가 총리직에서 해임당하고, 체포될 수 있었던 것도 근본적으로 친서방 세력이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티모셴코가 감옥에 갔을 때 유셴코가 이를 두고 인과응보라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 그래서인지 야누코비치도 유셴코는 그대로 냅두었다. [3] 두 번째 동영상의 채널은 우크라이나 쌍둥이 자매가 함께 운영하는 채널로, 언니는 우크라이나에, 동생은 한국에서 살고 있다. [4] 오데사 같은 남부나, 돈바스 중에서 우크라이나 정부가 점령 중인 돈바스 서부 쪽은 친러 성향이 강하고 친러 정당 지지율이 2020년대 기준으로도 어느 정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야누코비치 이전에 친러와 반러가 박빙이었던 것에 비하면 2020년대 시점에는 전국적으로 친러의 세가 상당히 줄어든 상태다. [5] 물론 정체성 자체가 러시아계거나 친러 성향인 우크라이나인들이 상당수 러시아로 이주한 탓도 크다. [6] 아무리 꼭두각시 괴뢰정부라 할지라도 현지에서 지지를 받을 만한 인물을 선별해 수장에 앉힌다. 일례로 나치의 괴뢰국인 비시 정부의 수장이었던 필리프 페탱은 1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했던 국민 영웅이었고, 만주국 선통제는 전제군주제 국가이자 중화민국 성립 직전의 왕조인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라는 압도적인 상징성이 있었다. 그리고 한간의 대표주자 왕징웨이조차 한때 쑨원의 후계자로 거론될 정도로 국민당 내에서 장개석과 맞먹을 만한 거물이었다. [7] 사실 젤렌스키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선전으로 지지율이 폭등한 것이지, 그 이전에는 평균적인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지지율 패턴을 따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8] 다른 대통령들은 죄다 10% 미만이었다.(...) [9] 오죽했으면 탄핵 당시 우크라이나 공산당도 찬성했을 지경이었다. 이 정당은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직전까지 푸틴을 옹호했던 골수 친러 정당이다. [10] 물론 경찰에 발포를 명령해 민주화 시위대 수백명을 학살한 것을 감안하면 온전히 본인이 자초한 일이다. [11] 우크라이나 국기가 있는 꽃다발은 아무리 달아졌더라도 친러파를 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