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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치 보이스/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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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결성 전2. 1958, Pendletones 결성3. 1961~65, 서프와 미국 정복의 시대
3.1. Surfer Girl, Surfin' U.S.A. 메이저 데뷔3.2. Today! and Summer Days 과도기 그리고 변화
4. 1965~67, 반전의 시작,새로운 패러다임
4.1. 최고의 아름다운 걸작 Pet Sounds4.2. 진보를 위한 한 걸음, Good Vibrations4.3. 미완의 걸작, SMiLE
5. 1967~70 부침이 반복됐던 시기
5.1. Smiley Smile, Wild Honey 변화의 시작5.2. Friends and 20/20 다양성, 신과의 만남
6. 1970~78 마지막 황금기
6.1. Sunflower, Surf's Up, So Tough, and Holland 밴드 오브 아메리카(BAND OF AMERICA)6.2. 15 Big Ones, Love You 마지막 영광, 마지막 불꽃
7. 1978~현재

1. 결성 전

음반 관련 사업가이자 프로듀서였던 머리 윌슨(Murry Wilson)과 아내 오드리 윌슨(Audrey Wilson) 사이에 브라이언 윌슨, 데니스 윌슨, 칼 윌슨 삼형제가 태어난다. 장남인 브라이언 윌슨은 영아기부터 들은 노래를 따라부르는 등 뛰어난 음악적 재능과 동시에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가졌고, 이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에 의해 혹독한 훈련과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게 된다.

2. 1958, Pendletones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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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 촬영시의 모습[1]

1958년 6월 20일, 캘리포니아 호손에서 살던 머리 윌슨은 자신이 피아노를 치면서 부르는 포 프레시맨 풍의 하모니를 장남 브라이언이 골똘히 듣고 있는 것을 눈여겨보고 'Ivory Tower, Good News' 같은 노래를 면밀히 해부해서 가족들에게 어떻게 백그라운드 하모니를 부르는지 가르친다. 그 해 생일날 브라이언은 아버지로부터 레코딩용 기기를 선물받게 되고 브라이언은 이를 통해 어머니와 자신의 노래, 칼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오버 더빙 하며 음악을 시작한다. 또한, 크리스마스가 되던 날에는 칼과 친구 데이비드 마크스와 함께 기타를 배우기 시작한다.

Johnny Otis' KFOX 라디오 쇼의 열렬한 팬이었던 브라이언과 칼은 라디오에서 조지 거슈윈의 Rhythm and Blues의 간단한 구조와 보컬을 듣고는 영감을 얻어 작곡을 시작함과 동시에 자신의 피아노 연주 스타일을 바꾼다. 학교 음악 시간에도 표출된 그들의 열정을 본 가족들은 사촌인 마이크 러브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고 머리 윌슨은 마이크 러브와 그의 여동생 머린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화음을 가르친다. 마이크 러브(Mike Love)는 윌슨 삼형제와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고 함께 모여 하모니를 맞추어 노래를 부르곤 했으며 브라이언과 마이크 러브는 같이 호손 고등학교에서 행사를 하기도 한다. 이들은 나아가 기타를 능숙하게 쓸 줄 알고, 밴드(포크 그룹)에도 가입해 있는 알 자딘을 만나서 함께 첫 시작인 Pendletones를 결성한다. 여행 가방, 양모의 셔츠, 뮤지컬 톤의 스타일이었던 Pendleton에 서핑을 즐기던 데니스가 참여하면서 밴드는 서핑을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로 부여한다.[2]

머리 윌슨은 그다지 대단치는 않아도 음악 산업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나름 베테랑이었기에 밴드를 Hite Morgan이라는 출판인과 연결시켜 준다. 밴드는 알 자딘의 친구이자 가수인 Gary Winfrey와 함께 포크 송인 Sloop John B와[3] 자작곡 하나를 녹음하여 그에게 선보였으나 모건은 심드렁하자 브라이언은 데니스가 부여했던 서핑을 주제로 하여 이전 곡들보다 완성도를 높여서 첫 오리지날 곡 SurfinSurfin Safari를 작곡한다. 이들은 기타 등 악기를 빌려서 3일 동안 브라이언의 집에서 곡들을 연습한다.

1961년 10월, 밴드는 두 곡의 데모 버전을 킨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12번의 테이크 끝에 녹음하고, 머리 윌슨은 녹음된 노래를 candix, era 레코드 사장인 허브 뉴먼에게 선보인다. 그 해 12월 8일 밴드는 레코드 사와 정식으로 계약한다. 그러나 소년들은 흥분 속에서 자신들의 첫 싱글을 꺼내는 순간 경악하는 데 밴드의 이름이 Beach Boys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 윌슨은 모건을 불렀고, 모건은 candix 레코드사가 서핑이라는 아이덴티티에 맞게 이름을 바꿨으며 이 이름이 10대 아이들에게 즉시 와 닿을거라 생각하여 허락했다고 설명한다. 젊은 프로듀서였던 루스 레간은 훗날 밴드는 이미 그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었다고 증언했다.

3. 1961~65, 서프와 미국 정복의 시대

3.1. Surfer Girl, Surfin' U.S.A. 메이저 데뷔

Don't Worry Baby 뮤직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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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의 비치 보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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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이 투어를 그만두기 전의 콘서트

1961년 12월, 첫 싱글인 Surfin이 KFWB와 KRLA라는 로스 앤젤레스의 영향력 있는 10대를 겨냥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발표되었고, 곧이어 캘리포니아 일대를 휩쓸어서 순식간에 차트에 75위로 오르게 되었다. Surfin은 40000장이나 팔렸으며, 머리 윌슨은 매니저가 되어 롱 비치의 리치 발렌스 메모리얼 댄스에서 열린 이카 & 티나 터너 크리스마스 콘서트에 비치 보이스를 출연시키기로 계약하는 등[4] 실질적으로 밴드를 장악하여 밴드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브라이언은 후에 회상을 하면서 "아버지는 우릴 무자비하게 따라다녔지만 동시에 자신도 혹독히 다뤘다."라고 말했다.

1962년 2월 중반, 알 자딘은 밴드를 떠났고, 뒤이어 데이비드 마크스가 투입되었다. 4월 19일 Lonely Sea, 409를 녹음하고 난 후 Surfin' Safari를 재녹음했다. 1962년 동안 모건은 다른 뮤지션을 데려와서 밴드의 인수트루멘탈 곡에 보컬을 추가해서 단명한 그룹인 Kenny & the Cadets 명의로 발표되었다. Kenny는 브라이언 Cadets는 알 자딘, 칼 윌슨, 윌슨 형제의 어머니 오드리 윌슨이었다.

그해 6월 4일, 그들은 두번째 싱글인 Surfin' Safari[5]를 발매했고, 곡은 빌보드 차트 9위에 올랐다. 빌보드 매거진은 러브의 보컬을 칭찬하며, 노래에서 그의 강한 포텐셜이 느껴진다고 평했다. 6월 16일 닷 레코드와 리버티 레코드에게 퇴짜맞았지만 6월에 했던 데모 세션을 눈여겨본 캐피톨 레코드의 경영자 닉 베넷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그들과 7년짜리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1962년 12월, 대망의 첫 앨범인 Surfin Safari가 출시되어 빌보드 차트 32위에 등극한다. 이 앨범은 캘리포니아 소년들의 생활상을 느낄 수 있는 앨범이다.

1963년, 데뷔 앨범이 나온지 세 달 후에 밴드는 그 유명한 Surfin' U.S.A.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이 곡을 녹음한 이후 브라이언은 더블트래킹 보컬을 애호하게 되었다. 이 노래는 5월 25일에 출시된 후 열렬한 환호와 함께 빌보드 차트 2위까지 오르는 빅히트를 기록했고 밴드는 드디어 전국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Surfin' U.S.A'를 브라이언 윌슨이 작곡한 것이 아니고 척 베리가 발표했던 'Sweet Little Sixteen'이란 노래를 그대로 베꼈다는 점이다. 원곡인 'Sweet Little Sixteen'은 척 베리가 자신의 10대를 떠올리며 작사, 작곡해서 발표했던 곡으로서 비치 보이즈가 척 베리측의 허락도 없이 곡을 가져가서 녹음한 뒤 발표해버렸다.비치 보이즈의 흑역사 이는 당시까지만 해도 인종차별이 심해서 흑인 음악인들은 제대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던 미국에서도 대놓고 표절이라며 비난을 받았다. 결국 척 베리의 소송 끝에 1966년에 ' Surfin' U.S.A.'의 저작권이 마침내 척 베리에게로 귀속되었다.[6]

이후 브라이언은 Surf City를 프로듀스했고, Jan and Dean을 위해 노래를 쓰기도 했다. Surf City는 출시되자 바로 빌보드 차트 1위에 등극하였고 브라이언은 이를 매우 기뻐했지만 아버지이자 매니저 머리 윌슨은 매우 화를 냈다. 아들이 점점 비치 보이스를 지금의 자리로 있게 한 분야인 서프 음악에 점점 흥미를 잃어간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사실 브라이언 윌슨은 애초에 서프를 할 줄도 몰랐고 큰 관심도 없었다고 한다. 참고로 브라이언 뿐 아니라 비치 보이스 멤버들 중 서핑을 즐긴 사람은 브라이언의 동생인 데니스 윌슨 뿐이었다. 즉 서프 문화에 진심으로 관심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비치 보이스의 데뷰 당시에 서프 음악이 한창 인기가 많았던 데다가 그런 해변 분위기의 음악을 만드는 데 소질이 있어서 서프 음악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1963년 4월, 그들의 첫 투어가 시작되었다.투어는 미 서중부를 배경으로 시작되었고, 마침 알 자딘이 다시 밴드로 합류[7]하자 브라이언 대신 라이브 공연에 출연하고 브라이언은 남아서 녹음과 작사에 열중했다. 그 결과는 앨범 Surfer Girl[8]Little Deuce Coupe[9]이었다. 이 때 데이비드 마크스가 매니저인 머리 윌슨과의 불협화음 때문에 밴드를 탈퇴했고[10] 데이비드 마크스가 떠나자 브라이언은 어쩔 수 없이 다시 투어에 합류한다.

이 기간 동안, 브라이언은 Wrecking Crew라는 세션 밴드[11]를 데려와 점점 더 부담이 늘어나는 스튜디오 작업에 투입시켰다. 후에 그들은 브라이언의 음악적 능력에 경이로워 했다고 회상했다. 밴드는 곧 나올 크리스마스 앨범에 수록된 Little Saint Nick을 발매했고, 1963년 12월 찬송가적인 노래인 The Lord's Prayer를 커버하여 미국 빌보드 차트 3위를 차지한다.

1964년 1월에서 2월까지 펼쳐진 호주 투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시작이 된 비틀즈의 에드 설리반 쇼 출연을 보게된다. 또 캐피톨 레코드가 비틀즈를 대표하여 지원하자 이전에 머리 윌슨이 밴드를 위한답시고 레코드사와 부딪힌 적이 있었던 그들은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종종 찾아가던 사무실엔 예고도 없이 경고가 떨어져 있었고 브라이언은 비틀즈에 대해 어리벙벙할 뿐이었다.
난 화가 나 있었다. 어떻게 한 그룹이 소리치게 하고, 비명지르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들이 만든 I Want to Hold Your Hand는 그다지 대단한 레코드도 아니었으나, 소녀들은 음악에 비명지르고 열광했다. 스튜디오에선 모두들 일어난 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침묵을 깨곤 이렇게 말했다.

"이봐요, 비틀즈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도 없어요. 우리는 우리 할 일 하면 되니깐요."
ㅡ그 당시 비틀즈에 대한 브라이언의 반응과 회고

소문에 따르면, 브라이언은 다음 앨범을 더 시간을 들여서 완성시키려 했지만, 캐피톨은 일단 완성된 녹음본을 신속히 처리하여 비틀즈의 성공으로 인해 곧 닥칠 고통과 잊혀짐을 피하려 했다. 그 결과 Shut Down Vol.2 앨범이 2월 20일 급하게 완성되었다. 이 앨범에는 우리가 아는 곡이 Fun, Fun, Fun, 필 스펙터가 프로듀스한 로네츠의 곡 Be My Baby에서 영향을 받은 Don't Worry Baby, 브라이언 윌슨이 그때까지 자작한 곡 중 최고로 뽑은 The Warmth Of The Sun가 실려 있었다. Fun, Fun, Fun은 싱글로도 발매 되었는데[12] 대박이 터졌다. 앨범의 성공으로 비치 보이스는 간신히 비틀즈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1964년 4월 브라이언은 마지막 서프 뮤직 히트곡인 I Get Around을 썼다.(이 곡을 듣고 아버지 머리 윌슨은 안도했다고 한다.) 몇개월 후에 발매된 새 앨범 All Summer Long은 이전처럼 단숨에 최상위권에 도달했다. All Summer Long은 이전과는 달리 실로폰과 피콜로같은 악기가 사용되었고, 앨범은 비치 보이스가 세운 서프 록이라는 장르의 '백조의 노래'가 되었다. 이전에 발매된 라이브 콘서트 앨범인 Beach Boys Concert는 10월에 4주동안 1위를 차지했다.

1964년 6월, 브라이언은 그가 동경하고 존경한 포 프레시멘의 편곡자 딕 레이놀즈와 함께 Forty-One-Piece 스튜디와에서 크리스마스 앨범을 녹음한다. 오리지날 신곡 5곡과 고전 크리스마스 송을 커버한 일곱 곡이 들어 있는 앨범은 12월에 발매되었고 싱글 커트된 'The Man With All The Toy는 빌보드 차트 6위를 차지했다. 10월 29일, 비치 보이스는 라는 방송에 출연했는데, 그곳에서 진행한 콘서트를 녹음한 앨범이 발매되었다.

멤버들이 끊임없이 쉬지 않고 달린 결과, 그 해의 끝이 되자, 그들은 모두 지쳐버리고 말았다. 특히 작곡과 프로듀싱을 전담하던 브라이언은 더욱 더 스트레스가 많았다. 12월 23일, 로스 앤젤레스에서 휴스턴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던 중, 브라이언은 "우리는 우리 가족을 사랑한다. 나와 동생(데니스, 칼), 사촌인 마이크(러브), 그리고 친구 알(자딘)이 있었기에 정말 환상적인 방법으로 그룹을 결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점점 다른 그룹들이 우리의 활동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고 생각하다가 비행기 안에서 갑자기 패닉에 빠지고 만다.[13]

3.2. Today! and Summer Days 과도기 그리고 변화[14]

1964년에서 1965년 사이에 콘서트에서 브라이언은 뮤지션 글렌 캠벨과 임시 교체하고, 예전처럼 작사, 스튜디오 녹음에 힘을 쏟기 시작한다.[15] 투어를 그만둔 브라이언은 완전히 스튜디오 아티스트가 되어 거대한 나무의 씨앗이 될 The Beach Boys Today!를 공개한다. 앨범의 구상은 발라드와 경쾌한 노래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전의 서프, 자동차, 여자와 같은 것들을 포기하고, 소년의 어른의 됨에 대한 열망과 여린 사랑, 결혼, 갈등을 그리고 있었던 Today! 앨범은 비치 보이스가 보다 더 성숙해 졌음을 보여주었다. 곡의 구성 면에서도 진보하기 시작했다. 자세한 사항은 The Beach Boys Today! 문서로.

Today! 앨범이 평단과 대중 양쪽으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았으나, 소속사 캐피톨은 여전히 돈이 될 것으로 보였던 서프 테마를 삭제한 것에 대해 브라이언에게 불만감을 가지고 있었고, 투어에서는 리더였지만 Today! 앨범에서는 화음만을 맡은데다가 브라이언이 서프 록이라는 월계수 관을 던지는 것처럼 보였던 마이크 러브 또한 점점 그를 못마땅해하기 시작한다. 결국 브라이언은 다시 여름과 서프라는 흥겨운 테마를 앨범에 부분적으로 도입하여 6월 4일, Califonia Girls 지역드립의 보컬 세션을 녹음한다. 이는 다음 앨범 Summer Days (And Summer Nights!!)에의 압력으로 이어진다. 이 앨범 또한 Today! 못지 않은 상업적/비평적 성과를 얻는데 성공했다. Today!나 All Summer Long 때부터 점점 브라이언의 편곡/프로듀싱 실력이 늘어온데다가 당시 분위기상 성공할 수밖에 없는 테마를 담은 앨범이었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특히 앨범 수록곡 중 California Girls는 후일 브라이언이 '비치 보이스라는 밴드를 대표하는 곡'이라 표했으며, 롤링 스톤 선정 위대한 곡에서 72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상당한 퀄리티를 자랑한다.

이 시기에 밴드는 싱글 The Little Girl Once I Knew를 발매하는데, 이는 현재 Summer Days와 Pet Sounds를 잇는 중간 다리같은 곡으로 평가받으며 특히 비틀즈의 존 레논이 열렬한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이거야말로 최고입니다! 당장 노래 틀어요. 이건 꼭 히트할겁니다. 이건 제가 근래에 들은 레코드 중 최고에요. 환상적이죠. 이게 히트하기를 정말 바랍니다. 전부 브라이언 윌슨이 해낸거죠. 그는 목소리를 악기처럼 활용해요. 그는 투어나 다른걸 하지도 않고, 그저 집에 앉아 머릿속으로부터 환상적인 편곡을 내어 놓습니다. 노래를 듣지도 않고요.

ㅡThe Little Girl Once I Knew에 대한 존 레논의 평

멤버들은 빠듯한 투어 일정으로 바쁘고, 브라이언은 앨범 준비 작업에 바쁜 와중에 밴드는 앨범 Beach Boys' Party!를 내어 놓는다. 비치 보이스가 이전에 발표한 곡들 및 비틀즈 등 다른 밴드의 곡들을 커버하여 어쿠스틱 셋으로 편곡한 앨범인데[16], '언플러그드 컨셉의 시초격인 앨범'이라는 말까지 들으며 Pet Sounds와는 다르게 미니멀한 편곡으로 브라이언의 천재성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받는다.

4. 1965~67, 반전의 시작,새로운 패러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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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 Sounds를 레코딩 할 때의 모습 브라이언의 저택에서 모인 멤버들
Pet Sounds에 수록된 Wouldn't It Be Nice

60년대 초반 미국을 흔들고 열광시킨 서프 음악의 반짝 유행도 서서히 다 되어가고 있었고 비치 보이스의 리더 브라이언 윌슨 역시 10대용 서프 음악에 질린 상태였다.

그러던 중 1965년에 대중음악의 역사를 바꾸게 되는 비틀즈의 새 앨범 Rubber Soul이 발표된다.

브라이언 윌슨은 브리티쉬 인베이젼이 미국에 상륙하여 막 열풍을 불러 일으키던 초창기에는 마치 외부 침입자들의 우두머리같이 느껴졌던 비틀즈를 무척 못마땅하게 여겼다. 미국이야말로 대중음악의 뿌리이자 중심이라는 자부심이 강했던 브라이언에게 영국 밴드들이 몰려와 순식간에 미국 음악시장을 휩쓸어 버리는 현상을 처음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그 후론 미국에서 인기를 얻은 영국 뮤지션들이 워낙 많이 나와서 지금이야 영국의 록/팝 뮤지션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인기를 누리는 건 그냥 늘 있어온 자연스러운 일에 불과하지만, 비틀즈 이전까지만 해도 록/팝은 미국에서 탄생한 미국 고유의 음악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타국의 대중음악 뮤지션이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예가 거의 없어서 미국에서의 영국 뮤지션의 인기 광풍은 처음엔 어리둥절한 일이었다. 비유하자면 이탈리아 가수들이 프랑스 노래인 샹송을 배운뒤 프랑스로 몰려와 프랑스의 '샹송' 시장을 완전히 점령해버린거나 마찬가지인 상황. 하지만 브라이언 윌슨은 차차 비틀즈의 '음악적인 면'에선 매료되기 시작하면서 처음에 가졌던 적대적인 감정도 누그러지고 호의적인 감정으로 변해갔다. 심지어 비치 보이스의 1965년도 앨범인 Beach Boys' Party!에서 비틀즈의 3곡[17]을 커버하여 수록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Rubber Soul을 듣고는 경악과 감탄을 하고 만다. 그 때까지 록큰롤 등 대중음악계는 철저히 '싱글' 위주였기 때문에, 앨범(LP)이라는 건 정성껏 만든 미는 곡 한두 곡[18]에다가 나머진 그냥 대충 만든 땜빵용 곡들(filler)로 채워서 그 가수의 소수 골수팬들에게나 팔기 위한 레코드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그 전까진 대중음악계엔 '명곡'은 계속 있었어도, 딱히 의미가 있거나 거론할만한 '앨범' 즉 '명반'이라 불릴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19] 그런데 러버 소울 앨범은 수록곡들 전곡이 모두 높은 예술성과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데다가, 수록곡들이 그냥 잡탕식 모음집이 아니라 앨범을 쭉 들어보면 마치 수록곡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해 전체를 아우르는 듯한 분위기를 내며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통일적인 아우라를 발하고 있다는 점에 놀라고 만다. 브라이언은 러버 소울 앨범의 열렬한 팬이 됨과 동시에 자신도 이런 최고의 '명반'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과 야심을 가지게 된다. 바야흐로 위대한 대중예술가들 사이에서 서로간에 자극과 영향을 주고받는 창조적인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렇듯 브라이언 윌슨은 비틀즈에 대해 늘 의식하면서 한편으론 라이벌 의식을 가짐과 동시에 음악적으로는 영향과 영감을 받는 팬이라는 이중적인 감정을 언제나 가지고 있었다.

비틀즈의 러버 소울 앨범은 브라이언 윌슨 뿐 아니라 롤링 스톤즈, 버즈 등 동시대의 다른 뮤지션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고, 러버 소울의 영향을 받아서 만든 펫 사운즈 앨범은 역으로 비틀즈에게도 영향을 주게 된다. 그리고 이후 새로운 뮤지션들도 등장하여 가지각색의 명반들을 쏟아내면서 록음악의 춘추전국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미 서프 록 시절부터 In My Room, The Warmth of the Sun과 같은 진지하면서도 아름다운 곡들을 씀으로서 가능성을 보였는 데다가 이미 Today!를 통하여 발전했기 때문에 브라이언은 멤버들이 다시 투어를 가는 동안 스튜디오에 짱박혀서 이미 알고 있던 세션 동료들을 소집하고, 특히 파트너로서 잘 맞았던 할 블레인과 같이 협동을 하기 시작한다.

Pet Sounds가 제작되기 전의 곡들 중에서는 California Girls (72위), Don't Worry Baby (178위), In My Room (212위)가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곡에 랭크되었다.

4.1. 최고의 아름다운 걸작 Pet Sounds

파일:비치 보이스7.jpg
그 유명한 Pet Sounds 커버 사진 촬영 모습. 샌디에이고 동물원에서 진행됐다.
Pet Sounds 커버 촬영 관련 영상

러브 앤 머시를 보았듯이 투어를 끝난 멤버들이 돌아 와있을때는, 이미 보컬만 녹음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상태였다. 영화에서도 보다시피 브라이언은 온갖 잡소리와 특이한 소리까지 모아와서 녹음에 써먹었다. 1966년,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이때까지의 모든 규칙을 쌈싸먹는 악기들과 정성을 들인 층층 쌓인 보컬 하모니들이 모여 그들의 신기원이 된 Pet Sounds가 되었다.

브라이언의 뛰어난 작곡과 프로듀싱 능력, 이 앨범을 위한 작사가로 고용된 전문 작사가 토니 애셔의 아름다운 작사 실력이 어우러져 빛나는 결과물로 탄생되었다. Wouldn't It Be NiceSloop John B와 같은 노래는 앨범의 혁신적인 음악적 파노라마를 보여주었고, 재즈-클래식함-팝-이국풍의 악기(또는 사운드)-중요한 아방가르드가 어울려서 포함되었다. 기악법들은 자전거 벨 소리, 호루라기, 바비 핀 등 일상에서 들리는 흔한 잡소리와 기존의 기타, 드럼의 록 세트를 포함했다. 그 외에도 은식기, 아코디언, 개 짖는 소리, 유리컵 저그가 있었다. 게다가 God Only Knows의 기본 소리를 위하여 하프시코드, 슬랩백 에코를 포함한 피아노, 썰매 방울 소리 등 풍부한 두터운 소리를 썼다. 후에 브라이언의 말에 따르면 앨범이 예술의 조각들의 컬렉션처럼 디자인했고, 우리가 독자적으로 변했음을 보여주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5월에 발매되자, US 차트 7위,영국 차트 2위를 차지했다. 1966년 마지막 분기에서 가장 강력하게 팔린 앨범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평론들은 미온적인 평가를 내렸고[20], 캐피톨 레코드의 냉담하게 처리한 홍보로 브라이언이 바란 대로 메이저 급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한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그로 인해 Pet Sounds가 미국에서 널리 인식되지 못했고, 더불어 캐피톨의 결정은 Best Of The Beach Boys를 발매함으로서 브라이언의 기를 꺾었다. 추청하건데 레코드 회사에서는 앨범의 리스크를 고려하여 상업적인 길로 가게 했고, Pet Sounds는 거의 500,000 장이 팔렸는데 앞서 앨범의 판매량에 비하면 매우 떨어졌다. 심지어 당시 발매된 컴필레이션 앨범 Endless Summer[21]는 비치 보이스가 초기에 해왔던 서프 음악만 실려 있었음에도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오르며 플래티넘 인증을 받는다. 이는 변화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갖고 있었던 브라이언을 사실상 절망에 몰아가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Pet Sounds는 사실상 거의 브라이언 윌슨의 솔로 앨범이나 마찬가지였다.[22] 그저 다른 뮤지션들이 녹음과 구성 요소에 기여, 헌사한 것만 빼면 말이다. 하지만 펫 사운즈가 상업적으로나 (당시에는) 평가면에서나 실망스러운 결과를 보이자 브라이언은 마약에 더욱 탐닉했다. 그리고 점점 내향적으로 변해가게 되고, 자신 속의 뿌리 박힌 내적 문제에 파고 들게 된다.

Pet Sounds는 정작 처음 발매된 당대엔 폴 매카트니 등 그 진가를 바로 알아본 몇몇의 경우를 제외하면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간과된 앨범이었다. 그 후로도 상당 기간 동안 잊혀진 앨범에 가까웠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로 평단과 일부 뮤지션들에게 뒤늦게 주목받으면서 차차 재평가받기 시작했고 90년대 이후론 더욱 평가가 급격히 올라가서 역사상 최고의 명반 중 하나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게 된다.

즉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까지는, 비치 보이스는 한때 서프음악으로 인기를 누리다가 그 뒤로는 뭘 했는지 딱히 기억에 남는 게 없는 한물 간 잊혀진 밴드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Pet Sounds부터의 음악적 성과에 대해선 몇몇 선각자들에게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관심이나 평가를 받지도 못했었다.

Pet Sounds 등 66년경 이후의 비치 보이스 음악이 당대엔 큰 관심을 받지 못했던 이유로는 여러가지 요인을 들 수 있다. 우선 비치 보이스는 그저 여름용 서프 전문 밴드라는 당시 음악팬들의 고정관념과 편견도 비치 보이스의 음악적 변화에 큰 관심과 기대를 보이지 않았던 한 원인으로 볼 수 있다.[23]

그리고 베트남전에 대한 반전운동과 진보정신, 저항의식이 만개하여 이런 격동적인 사회 분위기가 반영되는 록 음악도 갈수록 거칠고 과격해지던게 당시의 상황이었다. 근데 이에 비하면 비치 보이스의 음악은 상대적으로 말랑말랑하고, 당시의 록 음악계에 깔려있던 거칠고 반항적인 정서가 아닌 여전히 맑고 순진무구한 십대 청소년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한 음악이었으니 당시의 미국 청년문화의 트렌드와는 정서적 거리가 멀었다는 것도 큰 이유로 들 수 있다.
그러다가 8, 90년대를 거치면서 그동안 잘 안 알려져 있었던 펫 사운즈가 이루어낸 음악적 성과가 집중적으로 조명받으면서 대중음악사에서의 평가와 위상이 엄청나게 올라가게 된 것이다.

2016년 가디언지의 바바라 앨런은 앨범을 재조명하면서 "찬양하라 이 하모니와 프로듀스의 테크닉의 혁명을 .. 윌슨은 단독으로 아티스트의 영혼을 철저한 광명으로 앨범을 재조명했고 불타는 창조의 문을 걷어참으로서 열렸다.댄스, 미술, 영화... 등등 예술가들이 고안한 것에서 독립하여 앨범이 독자적으로 나아갈 수 있게했다."라고 평했다.
오늘날을 귀 기울이면 왜 그때가 우리가 쉽게 정의할 수 있는 시대였는지 쉬워진다 ... 주선 속에서 고전적 정수의 도입, 구조의 혁신 속에서 기존의 규칙의 포기함, 소리의 총체면에서 일관됨을 추구함을 Pet Sounds는 놀랍도록 통일하여 신선함을 주었고, 30년이 지난 이후에도 청취자에게도 와 닿는다.
ㅡ 작곡가, 필립 글래스

2003년, 롤링 스톤지는 역대 위대한 500개의 앨범에서 Pet Sounds를 Sgt. Pepper's Lonely Heart Club Band에 이은 2위로 선정했다.

2004년, 역사적, 문화적인 업적을 Library Of Congress에 인정받았다.

4.2. 진보를 위한 한 걸음, Good Vibrations

브라이언은 Pet Sounds에서의 발전성을 바탕으로 하여 확장하기 시작했고, 곧 야심 만만한 프로젝트 일명 Good Vibrations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Pet Sounds처럼 이전까지의 팝 뮤직에서 들을 수 없었던 다방면에 걸친 음악 또는 악기들의 집합체를 채택한 이 곡은 Pet Sounds 앨범 세션 중 작곡되었으며, 브라이언의 두 애완견으로부터 가사의 모티브를 얻었다. 브라이언이 Pocket Symphony라고 불렸던 이 노래는 클래식함, 재즈, 이국적인 구조의 결정체와 잘게 잘게 조각된 음악의 세션들은 부조화의 조성과 전환을 대표했다. 곧 발매되자 미국,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다. 오랜만에 얻은 성과였다. 하지만 동시에 브라이언이 Pet Sounds에서 얻었던 '열망'들은 점점 정신을 흐트리게 하고 있었음을 아무도 몰랐다.

이 때 그는 그의 음악적 파트너 반 다이크 파크스(Van Dyke Parks)와 마주하기 전이기도 했다. Good Vibrations은 이전까지의 싱글 역사와 다르게 복잡한 곡의 구성과 비용면에서 선전했음을 보여주었다. 또 녹음을 위해서 4개의 메이저급 스튜디오에서 몇 달을 보낼 정도였다. 곧 Good Vibrations은 1960년대의 반문화 시대의 중요한 노래로 받아들어졌고, 동시에 브라이언에겐 다양한 감각을 키우는 증량제이면서 스튜디오 프로덕션의 명백한 진보의 성과였다.

평론가들도 역시 싱글에 대해서 극찬을 했는데 이 중 록 비평가 진 스컬티는 록 르네상스의 혁신적인 조각이 될거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곡은 폴 태너의 전자 테레민과 수동 발진기, 그와 유사한 소리를 내는 다른 테레민을 활용했다. 또 브라이언은 신시사이저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곡에 즉흥적으로 추가를 했고, 이는 그들에게 '히피'라는 새로운 유형의 관객들을 사로잡게 하는 효과를 주었으며 동시에 새로운 시대와의 조우였다. 비치 보이스는 Good Vibrations에 사이키델릭 아트, 아트 록, 근본으로의 복귀, 자연 생태, 유기농 음식[24], 침착한 사운드라는 반문화의 양상을 보여줌으로서 다가올 1970년대의 투상을 보여주었고, 이는 시대의 표상이기도 했다. 이는 곧 SMiLE이라는 미완의 걸작의 예고편이기도 했다.

싱글 Good Vibrations이 한창 대히트를 치고 있던 1966년 말에 영국의 음악 잡지 NME가 실시한 인기 여론 조사에서 비치 보이스는 비틀즈, 롤링 스톤즈를 제치고 세계 최고의 보컬 그룹으로 뽑힌다. 싱글 Good Vibrations의 이러한 대성공은 Pet Sounds의 판매고가 기대 이하였던 것에서 이 밴드가 받은 실망감을 어느 정도 보상해주는 듯 했다.

4.3. 미완의 걸작, SM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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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앞에서 브라이언의 곡을 듣는 멤버들 브라이언 윌슨과 반 다이크 파크스

반 다이크 파크스와 브라이언의 인연은 Pet Sounds에서부터 시작되었다. Good Vibrations의 녹음 도중에 이 서로 죽이 잘맞은 이 듀오는 다가올 새 앨범 SMiLE에서 Pet Sounds를 뛰어넘기 위해서 강렬한 콜라보레이션을 시작했다. 1966년 8월부터 1967년 5월까지 약 일 년 가까이를 세션과 녹음에 소비했지만 끝내 완성하진 못했다. 브라이언과 반 다이크는 SMiLE을 지속적이고 기교적이며 테마적인 앨범으로 만들고 싶어했고, 더불어 작은 보컬 부분과 악기들의 양낭을 메인 곡의 음악적인 면으로 연계시켜 정교하게 작업을 하려 했다. SMiLE의 베이퍼웨이 후에 남은 레코드를 보면 성가, 카우보이들의 노래를 포함했고, 인디안ㆍ하와이 음악, 재즈, 고전적인 정수가 담긴 음시, Musique Concrete(구체 음악, 실재음 -악기음, 기계음, 자연음 같은 소리-을 테이프에 녹음한 후 전기적 처리나 편집을 하여 작품을 만드는 현대 음악의 수법), 요들들을 내재하고 있었다.

브라이언은 1966년 10월 인터뷰에서 "10대 아이들이 신에게 바치는 찬가"라고 앨범을 선전했고, 그의 정신적인 목표는 순수함의 철학, 인간의 순진함,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뇌를 포함하여 앨범의 가사, 노래로 표현하여 앨범을 구체화시키는 것이었다. 브라이언과 반은 반문화에 대해 의식하고 있었고, 둘은 따로 떨어진 감이 있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 식 사고방식"에서 떨어지기 위해서 떨어질 순 없었다. 결국 반 다이크 파크스는 이에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고, 그는 "같은 시간엔 브라이언은 그가 가진 서투른 감수성에 지고 싶지 않았기에 흔한 사람들이 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예를 들어 브라이언이 잘 훈련된 밴조 연주자에게 "서툰" 방식으로 한 줄만 연주하라고 하기도 했다.

알다시피 브라이언은 자신의 역량을 다해 Pet Sounds를 만들었고, 비록 상업적인 면에서 실패했지만 위대한 실패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브라이언의 입장에선 이 결과는 여전히 낙심과 충격이었다. 사실 이전에도 브라이언은 정신적인 면에서 매우 불안하다는 걸 보여주는 일이 꽤 있었다. 1967년 초 브라이언은 점점 불안정한 행보가 점점 더 늘어나고, 더불어 마약까지 복용하게 된다. 그 예로 점성술사가 브라이언이 하루종일 침대에서 캔디 바를 먹고,대마초를 피워 대자 '적대적 진동'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 적이 있었다. 작가인 줄 시겔 또한 브라이언의 사교계에서의 추방 됐는데 그의 여자 친구가 브라이언의 작업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행동들은 몇몇 친구들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매번 유사한 형태의 기이한 행동들은 비치 보이스의 위기로 천천히 번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SMiLE은 2004년 Brian Wilson Present SMiLE, 2011년 The SMiLE Sessions 박스셋이 정식 발매되기 전까지도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SMiLE의 부틀렉은 팬들, 뮤지션들에게 많은 영향을 선사했다. 심지어 평론가 브라이언 토프는 SMiLE의 선진적인 구조에 대해 "여기에 한 남자가 창조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것이 있다...많은 이들이 팝 뮤직 시대에 만들지 못했고...그는 진정으로 록과 팝 뮤직의 경계를 보여주는데 힘을 다했다."라고 했으며 잡지 UNCUT은 역대 최고의 부틀렉을 SMiLE로 선정했다. 다른 뮤지션들에게도 정식 앨범이 아님에도 놀라워 하게 했다.[25]

5. 1967~70 부침이 반복됐던 시기

5.1. Smiley Smile, Wild Honey 변화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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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d Honey를 발매할 즈음의 비치 보이스

SMiLE 실패 이후 그들은 브라이언의 새로운 홈 스튜디오에서 몇몇 곡들을 살려내서 이전보다 스케일을 줄이기로 결정 한다. 그와 곁들어서 Good Vibration을 수록한다. 그렇게 하여 나온 앨범이 Smiley Smile였다. Smiley Smile은 긍정적인 요소들을 유발시켰고, 상업적으로도 해외 수익까지도 끌어들이게 했다. 앞서 평론가, 팬들이 기다리던 SMiLE에 대한 큰 기대감과 Good Vibrations이 보여준 시너지 이상의 예고편으로 인해 예상 외로 줄어든 스케일이 대중들에겐 불만족으로 다가왔고, 이는 (미국에서의) 진정한 상업적인 실패였다. 하지만 Smiley Smile 역시 SMiLE의 가지에서 나온 작품이긴 사이키델릭 시대의 산물이자 걸작이였다. SMiLE과는 달리 Beach Boys' Party의 성격이 결합되었된, 비치 보이스의 로-파이 트릴로지 앨범의 시작이었으며 비치 보이스의 앨범 중에선 제일 비치 보이스의 사이키델릭 록 그룹으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준 앨범이었다.

1969년 비치 보이스는 캐피톨 레코드를 고소하였다. 그와 동시에 - 비틀즈가 그 전해인 1968년에 자신들만의 애플 레코드를 설립한 것에서 힌트를 얻어 - 브라더 레코드(Brother Records)를 설립했다. 그리고 첫 앨범으로 나온 것이 바로 Smiley Smile이다. 그리고 싱글로 'Gettin' Hungry'가 나왔으나 실패했고[26], 이는 밴드를 브라더 레코드에게 기대게 한다. 또한 비록 SMiLE은 취소되었지만 해당 프로젝트에 포함되어 있었던 몇몇 곡들은 이후의 앨범들에 끼워져 나오게 된다.[27] 이는 브라이언의 무기력적인 상태에 대한 충전제(혹은 상쇄물)이 된다.

1973년엔 밴드는 완전한 SMiLE이 발매되기를 원하지만 알다시피 당사자인 브라이언은 점점 내면에서부터 붕괴되고 있었고, 오직 브라이언만이 무한한 파편 조각들을 짜 맞출 수 있었다. Smiley Smile가 발매된 후 Beach Boys' Party와 비슷한 느낌의 스튜디오 라이브 앨범 Lei'd in Hawaii가 제작되었으나 브루스 존스턴의 부재 등 다양한 악재에 부딪혀 미발매된 채로 남았다.

Smiley Smile 발매 후 약 3개월 후에 소울 풍의 앨범인 Wild Honey가 발매되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마이크와 브라이언이 노래를 썼고, 수록곡 중 'I Was Made to Love Her'는 스티비 원더가 참여하기도 했다. 앨범은 Smiley Smile보다 상황이 나아, 앨범 차트 24위를 차지했으며 싱글 Wild Honey도 비교적 나쁘지 않은 싱글 성적을 얻는데 성공했다.

이 시기에 겪은 여러 문제들로 인해 밴드는 1967년 몬테레이 팝 페스티벌에 불참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공적인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게 되며 동시에 격변의 시기를 맞이한다. 그 이유는 새로히 공연할 곡, 앨범들이 모두 불확실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철회는 비치 보이스의 새로운 음악을 접하려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고, 멤버들에게도 안타까움의 사건이었다.

1967년 라이브 앨범 Lei'd In Hawaii가 실패한 후의 인터뷰에서 브라이언은 "록큰롤은 우연치 않게 생긴 일들이었고, 굉장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린 각져 있었고, 우연치 않게 생기지 않았다.", 이전 밴드 홍보 담당자인 데릭 테일러는 브라이언과 데니스를 불러 대화를 했는데 그들은 이전의 서프 록을 거부하고 있었고, 게다가 밴드는 테일러가 "...그들은 인정하지 않을 거다..."라고 주장했듯 더 이상 서프 록을 따라가지 않았다. 히피 운동에 따라가려던 시도의 실패와 초기에 삼은 판매층의 결과로서 구 세대의 유물로 보였고, 그들이 한 때 그러했듯이 전기 작가 피터 칼렌은 "아메리칸 록큰롤의 절대적인 중심"이라고 했던 때처럼 그들은 사이키델릭 시대를 안내해야 할 시간이었다.

5.2. Friends and 20/20 다양성, 신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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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해리슨과 마이크 러브 마하라시와 비치 보이스

1967년 프랑스 파리의 유니세프 빌딩에 마하라시 요기가 사람들과의 만남을 주최한다. 그러자 마이크 러브는 1968년 2월에서 3월 사이 연예인, 뮤지션(비틀즈, 도노반 등을 포함한 사람들)을 따라서 리시케시로 여행을 떠난다. 앨범 Friends의 곡들은 마하라시의 초월적인 명상[28]에 영향을 받았고, 아쉽게도 영국 차트에선 13위를 차지하면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정작 본토인 미국에서는 126위라는 처참한 성적을 받는 데다가 타이틀 곡은 영국에서 25위, 미국에서 47위를 거둠으로서 1962년 이후로의 처참한 성적을 가지고 만다. 그 후 마이크 러브는 마하라시와 비치 보이스의 미국 투어를 위해 거처를 마련하기도 한다. 5월 3일 시작하여 5개의 쇼를 진행했고, 마하라시가 철회하면서 끝난다. 왜냐하면 관중 수에 대한 실망감과 마하라시의 철수, 24일의 투어 일들이 원가면적에서 밴드에겐 손해였기 때문이었다. 이와중에 싱글 'Do It Again'이 발매되었고, 싱글은 1960년대 좀더 발전된 서프 록 스타일로 나왔다.

1968년 중반에 브라이언의 정신병이 점점 구체화됨과 동시에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고, 이에 따라 칼, 데니스, 마이크 등의 보조 멤버들이 작사, 프로듀싱을 하기 시작한다.[29] 그리고 캐피톨과의 계약이 종신되고 또 다른 앨범 20/20을 만들어 낸다. 20/20은 멤버들의 다양한 성향들이 잘 반영되었고, 곡 중에는 하드 록 스타일의 'All I Want To Do', 왈츠를 베이스로 한 'Time To Get Alone', 걸그룹 로네츠의 노래인 'I Can Hear Music'[30]이 있었다. 이렇듯 장르의 다양성은 밴드의 정체성을 더욱 더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그에 따라 앨범 역시 크게 흥행했다.

그리고 비치 보이스는 한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후에 로만스키 일가를 잔혹하게 살해한 찰스 맨슨이었다. 데니스는 찰스 맨슨을 멤버들에게 소개를 했고, 맨슨의 곡 중 하나를 자신들의 노래로 커버(또는 표절)하기도 했다. 데니스는 시간을 내서 맨슨을 브라이언의 홈 스튜디오로 초대하고, 브라이언이 자신의 방에서 지내는 동안 레코딩에 참여하기도 한다. 데니스는 맨슨을 브라더스 레코드와 계약하게 하는 등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렇듯 멤버들은 맨슨에 대해 우호적이었으나 오직 브라이언은 맨슨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 그를 싫어했고, 그와 거래하지도 않았다. 맨슨의 도움 없이 비치 보이스는 맨슨이 작곡한 노래들을 녹음했고, 이는 맨슨이 감춘 야망을 부채질 했지만 노래가 비치 보이스 명으로 나오자 화를 냈다. 데니스는 고의적으로 맨슨의 이름을 곡이 발매 되었을때 삭제했고, 더불어 그가 작사한 가사 등을 모두 없애 데니스 고유의 노래가 되었다.[31] 이는 맨슨을 매우 분노케 했고, 그에 대한 걱정이 더 쌓이면서 데니스는 서서히 그와 거리를 쌓았고 맨슨 패밀리는 데니스의 집을 점령한다. 결국 맨슨은 아시다시피 로만스키 일가 살인 사건으로 살인죄로 유죄 선고 받게 된다. 이후 데니스는 맨슨에 대한 분노, 실망 등으로 인해 그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1969년 4월 12일, 밴드는 소송으로 인해 캐피톨 레코드를 방문하는데 그들(레코드)이 착수한 돈 약 오늘날로 150억에 대한 미납된 로얄티 등에 대해 회계 감사, 혐의 제기를 위해서였다. 6월 30일, 밴드는 계약이 완전히 종료되었고, 캐피톨 레코드는 비치 보이스에 대한 모든 카탈로그를 삭제한다. 이는 그들의 로얄티 공급에 대한 중단의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이와 더불어 윌슨 3형제의 아버지인 머리 윌슨은 Sea of Tune과 비치 보이스 판권을 Irving Almo Music에게 팔았고, 브라이언의 아내 마릴린 윌슨에 따르면 이는 브라이언을 완전히 파괴시켜 버린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밴드는 다시 브라더스 레코드를 재개 시키고 리프라이즈 레코드와 계약을 한다. 이러면서 밴드는 새 앨범을 만들기 시작했고, 캐피톨과의 계약이 끝나기 전까지 76억이라는 거대한 흥행을 했고, 약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대중들에게 음악적으로도 대중적으로도 각인시켰고, 비틀즈와 겨룰 수 있는 미국의 유일무이한 밴드가 되었다.

6. 1970~78 마지막 황금기

6.1. Sunflower, Surf's Up, So Tough, and Holland 밴드 오브 아메리카(BAND OF A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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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센트럴 파크에서의 공연.
이 때는 브라이언 대신 블론디 채플린과 리키 파타르가 대타 멤버로 활동하였다.
TV 쇼 촬영 때의 모습

1970년 새로운 파트너인 Reprise 레코드와의 계약 등으로 밴드는 다시 활기를 찾은 것처럼 보였다. 새 앨범인 Sunflower가 발매되고 영국에서 환상적인 환호와 찬사를 받았지만 미국에선 무관심일 뿐이었다. 앨범은 밴드의 강력한 존재의 특색을 보여줬고 밴드 멤버 모두의 헌사들이 새겨져 있었다. 또 브라이언은 다시 이 기간 동안 예전의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공동 집필한 7개의 곡을 앨범에 선보인 후 밴드는 국내 콘서트를 펼친다. Sunflower는 영국에선 매우 열렬히 열광했고, 그에 따라 흥행했지만 정작 본토인 미국에서는 허술한 홍보와 라디오자키들의 수록곡 재생 거부라는 악재에 부딪혀 참패했다.

이 시기에 브라이언 윌슨은 Radiant Radish[32]라는 유기농 식품 가게를 오픈하지만, 당시로서는 꽤나 뜬금없었던데다가 브라이언의 좋지 않은 사업 감각으로 인해 Radiant Radish는 곧 망하게 된다. 다만 이 가게에서 브라이언은 차기 매니저가 될 잭 라일리를 만난다.

Sunflower 이후 밴드는 매니저로 잭 라일리를 고용했고, 그의 관리 아래서 사회 정치 참여적인 성향이 강조되었다. 이 기간 동안 칼 윌슨은 밴드의 리더십을 잘 이끌어냄과 동시에 라일리는 노래의 가사들을 기여한다. 그리고 이 상황 속에서 여러가지 좋은 분위기 속에서 Surf's Up이 1971년 8월 30일 발매된다.[33] 앨범은 무난하게 흥행에 성공했고 최근의 성적보다 향상되었다. 동시에 1971년 4월 필모어 이스트에서 그레이트풀 데드와의 협력도 이루어졌다. 그리고 라이브 쇼를 진행하는 동안 많은 곡들을 재작업했다.

브루스 존스턴은 Surf's Up이 발매되고 나서 밴드를 탈퇴하게 되는데, 잭 라일리와의 불화라는 설이 있었다. 그리고 데니스마저 손목 통증으로 인해 드럼스틱을 놓게 되자, 칼의 제안에 따라 드러머 리키 파타르와 기타리스트 블론디 채플린이 1972년 2월에 들어오게 된 후 밴드의 소리에 좀 더 혁신적인 방식을 이용하게 된다. 그리고 Carl and the Passion - 'So Tough'은 파타르와 채플린이 작곡한 - 밴드답지 않은 두 개의 곡[34]이 들어있었다.

다음 새 프로젝트를 위해서 밴드는 가족들, 세션 멤버들, 기술자들과 함께 네덜란드로 이동했다. 그 후 농장을 대여하고 새로운 작업을 위해서 임시로 스튜디오를 세운 후 세션 작업이 끝이 나자 밴드는 이제껏 하지 않은 거대한 노력을 쏟았다. 그리고 앨범에 강한 느낌이 묻어나기 위해서 싱글을 제작했고, 브라이언, 탠딘 알머, 레이 케네디, 반 다이크, 잭 라일리의 협력으로 히트 싱글 Sail On,Sailor가 제작되었다. 그리고 1973년 앨범 Holland가 발매되었다. 후에 브라이언의 뮤지컬 음악 Mount Vernon과 Fair Way(Fairy Story), 잭 라일리의 나레이터가 들어간 랜디 뉴먼의 Sail Away가 보너스 EP로 추가되었다. 스튜디오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밴드의 팬, 관객들은 좀더 정신적으로 성장해갔다. 이후에는 밴드는 스튜디오 앨범 대신에 컴필레이션, 라이브 앨범을 발매하는데 좀더 신경을 썼고, 이제까지의 성적과는 다르게 훨씬 더 좋은 수익을 남겼다. 또 특히 Endless Summer 같은 경우 곡 리스트도 좋았기에 성적이 배가 되었다. 또 처음으로 밴드의 골드 레코드를 받았고, 롤링 스톤지로부터 올해의 밴드로 지명되기도 했다.(1974년)

그러나 짦은 기간 동안 밴드를 잘 보좌해주던 잭 라일리는 1973년 이후 떠나게 된다. 뒤이어 채플린 또한 마이크 러브의 형제이자 비즈니스 매니저인 스티브 러브와의 격쟁으로 떠났고, 리키 파타르는 1974년까지 이글스의 조 월시가 창시한 밴드에 남았다. 그리고 채플린을 대신해 제임스 윌리엄 구에르치오가 들어와서 밴드의 새로운 매니저가 되었다. 그의 활동 아래서 비치 보이스는 시카고와 함께 콘서트 투어를 했고, 시카고와 함께 만든 싱글인 Wishing You Were Here가 나오기도 했다. 또한 비치 보이스의 특기인 보컬은 엘튼 존의 히트곡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에서도 들을 수 있다. 이로 노스탤지어라는 성향이 비치 보이스에 대한 과대 광고에 들어가기도 했다.

6.2. 15 Big Ones, Love You 마지막 영광, 마지막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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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말 쇠퇴해가던 시점. 이때 브라이언 윌슨은 문서에서도 나와있듯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고,
동생인 데니스와 칼이 밴드를 리드했다.
정신병을 어느 정도 극복한 브라이언과 멤버들.
이 당시에 데니스는 이미 세상을 떠난 시점이었다.



1976년 브라이언, 탈퇴한 브루스 존스턴, 레코드 프로듀서인 테리 멜처가 수반된 슈퍼그룹인 California Music이 해체되었고, 새로운 앨범 15 Big One은 브라이언의 복귀와 함께 거대한 영향을 밴드 내에 가지고 왔다. 하지만 15 Big One은 1960년대 풍의 올디한 곡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말그대로 왕년의 록큰롤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적은 충격적이게도 차트 5위라는 역대급 흥행을 했다. 그러나 기존 팬들은 이 앨범 자체를 싫어했다. 앨범 세션을 진행하면서 브라이언의 제작 역할은 그룹 멤버임에도 하찮게 여겨졌는데 브라이언은 예전 Pet Sounds 때처럼 곡들을 오버더빙하고 리믹스하는 예젼의 실력을 보여주려 했으나 싸움 끝에 무산되었다. 그래서인지 칼과 데니스는 앨범을 '미완성된 작품'이라며 폄하하고 까내렸는데, 브라이언은 "(확실히) 멤버들은 새로운 Good Vibration과 같은 걸 기대했지만 새로운 앨범은 아무런 깊이감이 없었다."라고 칼과 데니스의 폄하에 동조했다. 또한 이 시기에 브라이언은 SNL에 출연하기도 했는데 인트로에서 SNL 멤버인 존 벨루시 댄 애크로이드에게 끌려간뒤 강제 서핑한다.(...)

1977에서 1978년 초 사이, 브라이언은 산발적인 공개 출연에 시간을 보냄과 동시에 새로운 앨범이자 마지막 명반인 될 Love You를 만들고 있었다. 14개의 곡들은 신속하게 써내려졌고, 어레인지, 프로듀싱 모두 브라이언이 직접 했다. 브라이언은 Love You를 피터 에임스 칼린에게 제일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에게 말하길 "모든 일들이 나를 위해서 나타난 것 같았다. 내 심장이 어디에 누웠는지도"라고 했다.[35] Love You는 전작과는 낮은 성적이었지만 팬들 사이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밴드의 최고의 앨범 중 하나로 꼽혔고, 평론가들로 후한 점수를 주었다. 현재 신스팝 일렉트로니카 계열의 조상격 앨범으로 여겨진다.

앨범의 '안티'였던 잡지사 팬진에 따르면 "(그들의 앨범은) 진정한 해학과 광기의 고유의 배합을 보여줬다. 그들은 클리셰에서 벗어남으로서 간단한 가사만으로도 당신이 한번도 가지지 못한 것들을 만들어 냈다."라고 평했다. <A.V 클럽>은 "같은 맥락"의 앨범으로 닐 영의 Tonight's the Night, 해리 닐슨의 Pussy Cats, 시드 바렛(핑크 플로이드의 그 바렛이다.)의 Barrets,The Madcap Laughs를 꼽으면서 "거의 절망적인 낙관성을...브라이언 윌슨은 롤러 스케이팅, 로드 트립, 조니 카슨같은 구석에서 끝없이 'Calm Blue Ocean'를 부르는 닳고 헤진 사람들을 위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름답고, 시끌벅적하고, 우습고, 마음을 찢어지게 하는 이 예술의 결과물은 브라이언 윌슨의 세계를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필수적이다."라고 했다.

Love You 발매 후 브라이언은 Adult/Child의 레코딩 세션을 시작했는데, 1976에서 1977사이에서 미수록된 곡들을 수용해서 딕 레이놀즈와 함께 재즈, 빅밴드 풍으로 어레인지을 했다. 하지만 Adult/Child는 그룹간의 반목을 또 생기게 했고,결국엔 보류되었다. 이 기간 동안 밴드의 콘서트 출연은 점점 줄어들었고, 명성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7. 1978~현재

파일:비치 보이스 50주년.jpg
50주년 기념 행사에서, 10대부터 시작했을 때와 비교할 때 참으로 세월의 무상이 느껴진다.

마이크 러브와 브라이언 윌슨 간의 밴드명 소유권에 대한 법정 다툼이 지지부진하게 계속되던 와중, 브라이언이 유진 랜디의 간섭 하에 솔로 활동을 시작하며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얻는데 성공한다. 결국 밴드명은 마이크 러브에게 넘어가고, 마이크 러브를 중심으로 한 비치 보이스는 스튜디오 앨범보다는 라이브를 중심으로 활동한다.

이후 비치 보이스는 83년 데니스 윌슨의 사망과 멤버간 법정 다툼 등 여러 가지 악재를 겪어가며 활동을 이어나가며 평가는 그런대로 괜찮지만 차트 성적은 꾸준히 나쁜(...) 활동을 이어간다.[36] 게다가 1980년대는 영화 러브 앤 머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브라이언 윌슨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약물과 알콜 중독을 벗어나고자 고용한 치료사 유진 랜디는 사실 상술에 쩔은 악덕 돌팔이 업자였고 브라이언은 수년간 그의 굴레에서 감시을 받으며 음악 생활 상당수를 착취당하게 된다.[37] 국내에서 가장 잘 알려진 비치 보이스의 곡 중 하나인 Kokomo가 바로 이 난항기에 등장한 단 하나의 히트곡.[38] 하지만 1992년 Summer in Paradise 앨범이 크게 실패하자 그 이후 2012년 That's Why God Made the Radio 앨범을 낼 때까지 20년 동안 새로운 곡을 내놓지 않고 투어로만 간간히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실은 1990년대 중반 브라이언의 재활 성공을 기념해 앨범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Andy Paley sessions라 부르는 이 앨범은 그들을 존경하는 후배인 아일랜드 뮤지션 션 오 헤이건[39]이 이끄는 밴드 하이 라마스랑 협업이 성사될 뻔했다고 한다. 하이 라마스가 비치 보이스 오마주가 강한 밴드라는 걸 보면 흥미로운 조합. 하지만 션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에도 멤버끼리 파벌 싸움("two separate camps" within the group)이 있는걸 눈치 챘고 실망했다고 한다. 브루스 존스턴[40] 칼 윌슨[41]은 이들을 호의적으로 봤으나 마이크 러브는 션을 싫어했다고 한다. 결국 콜라보레이션은 무산되었다. 출처 그래서 션은 아직도 마이크 러브를 싫어한다.

그래도 60년대 중후반의 음악적 시도들이 꾸준한 재평가를 받아 Pet Sounds가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에서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고, 이에 힘입어 브라이언 윌슨은 Pet Sounds의 곡들을 레파토리로 내세워 단독 투어링을 성공적으로 이뤄내기도 한다. 2004년 브라이언 윌슨 솔로 명의로 나온 SMiLE이 훌륭한 평가를 받았고, 2011년에는 SMiLE 세션 당시 음원을 공개하며 40년 넘게 미완성이었던 앨범을 완성에 가깝게 짜맞춰내[42] 굉장한 찬사를 받는다. 평점 짜기로 유명한 피치포크 미디어에서 10점 만점을 주었을 정도. # 사실 피치포크가 점수가 짜다는 것은 당시 발매 음반 기준이다. 스마일 세션같은 리이슈 기준으로 만점은 그렇게 드물지 않다.

데뷔 50주년 기념 투어에 맞춰 2012년에 나온 That's Why God Made the Radio 앨범은 실로 오랜만에 히트를 기록한 비치 보이스의 앨범으로, 미국 앨범 차트 3위에까지 오르는 등 승승장구함과 동시에 평론가들로부터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본 조비와의 협업도 이루어졌다. 특이한 점이라면 앨범 차트 성적만으로는 1965년 이후 최고 성적을 기록해 탑 10 랭크에 다시 들어간 공백기로 49년을 기록해 역대 2위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것. 참고로 1위는 52년 공백기의 프랭크 시나트라이다.


[1] Surfin' USA와 Surfer Girl 앨범의 커버아트가 이 곳에서 촬영되었다. [2] 아이러니하게도 밴드 활동 중반에 가면서 데니스는 이 서핑이라는 비치 보이스의 아이덴티티를 싫어하게 된다. [3] 이 Sloop John B는 후일 브라이언에 의해 재편곡되어 Pet Sounds에 수록된다. [4] 이때 이들은 아직 트레이드마크인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지 않았기에 진한 울 자켓을 걸치고 나왔다. [5] 비사이드로는 409가 실렸다. [6] 여담으로 척 베리의 원곡인 'Sweet Little Sixteen'은 초창기의 비틀즈가 라이브 공연에서 커버한 적이 있다. [7] 브라이언의 제안에 의해서 돌아온 것이다. [8] 1963년 9월 16일 발매 [9] Surfer Girl 발매로부터 한 달뒤인 10월 7일 발매되었다. [10] 이후 그는 30여년 동안 따로 활동하다가 칼 윌슨이 사망하고 난 후 다시 재합류한다. [11] 타악기 주자 할 블레인, 베이시스트 캐롤 케이 등이 멤버로 있던 밴드로, 상기한 Surf City나 몽키즈(The Monkees)의 곡들 또한 레킹 크루가 반주 파트를 연주하였다. [12] 비사이드로는 Why Do Fools Fall In Love가 실렸다. [13] 영화 러브 앤 머시에서도 상황이 나와 있다. [14] 비틀즈로 치면 A Hard Day's Night Help! 앨범처럼 음악적 변화와 성숙을 도모했던 중요한 앨범이다. [15] 1965년 4월 캠벨이 밴드를 탈퇴하고 캠벨의 대타 멤버를 찾는데 연연히 실패하던 중에 캠벨에게 브루스 존스턴이란 청년이 제발로 찾아왔고 세션 뮤지션으로 활동하며 닦인 연주 실력과 보컬로서의 능력을 높이 산 브라이언 윌슨에 의해 1965년 5월 19일부터 정식 멤버가 된다. [16] 그 유명한 'Barbara Ann'도 실려 있다. [17] 'Tell Me Why', 'You've Got to Hide Your Love Away', 'I Should Have Known Better' [18] 이런 곡이 싱글 커팅되어 당시 레코드 시장의 주력인 싱글 레코드로 발매되고 라디오와 방송에도 그 곡만 반복해서 나가게 된다. [19] 물론 1964년에 발표된 비틀즈의 앨범 "A Hard Day's Night"과 1965년에 나온 비틀즈의 "Help!", 밥 딜런의 "Bringing It All Back Home", 비치 보이스의 "Today!" 앨범들도 넓은 의미에선 명반으로 평가받긴 하지만, 이 앨범들은 엄밀히 말하면 싱글 시대와 본격적인 앨범 명반 시대를 잇는 과도기적인 성격이 짙다. 본격적인 위대한 걸작 수준으로 평가받는 최초의 명반은 바로 러버 소울이고, 이 러버 소울 앨범에 다른 뮤지션들도 영향과 자극을 받아서 본격적인 앨범 위주의 음악활동을 하면서 찬란한 명반 시대가 열리게 된다. [20] 평론가들 뿐만이 아니라 같은 록 뮤지션들 사이에서도 엇갈리는 반응이 나왔다. 가령 더 후의 피트 타운센드는 '너무 오버프로듀싱 된 음반이다'라는 혹평을 내리기도 했지만,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는 그 완성도에 찬사를 보낸다. [21] 앨범명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해당 앨범은 당초 'Best of the Beach Boys Vol.3'으로 발매될 예정이었으나 이름이 너무 유치하다고 느낀 마이크 러브의 강한 입김에 의해 앨범명이 Endless Summer로 변경되어 발매된다. [22] 한참 후에 발매되는 Love You 앨범도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23] 이런 고정관념은 음악팬들 뿐 아니라 비치 보이스 소속 레이블인 캐피톨 측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같은 밴드 멤버인 마이크 러브마저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자기 밴드에 대한 이런 고정관념을 깨고 음악적 변화를 시도하기 원했던 브라이언의 갈망이 얼마나 순탄치 않았겠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24] 이 소재는 이후 SMiLE(정확히는 Smiley Smile)의 수록곡 Vegetable에서 구체화된다. [25] 이와 비슷하게 '미발표된 전설'로 남은 프로젝트들은 찰스 밍거스의 Epitaph, 브라이언 이노의 My Squelchy Life, 마크 워츠의 A Teenage Opera, 더 후의 Lifehouse가 있다. [26] 다만 발매될 때는 밴드 명의가 아닌 브라이언 윌슨/마이크 러브 명의로 나왔다. [27] 예로 20/20에 수록된 Our Prayer와 Cabine Essence, Surf's Up이 있다. [28] 아예 이 명상법의 영문명인 'Transcendental Meditation'이 제목인 곡이 해당앨범에 실려 있기도 하다. [29] 전반적으로 밴드의 지휘는 칼 윌슨과 마이크 러브가 도맡아 하게 되었다. [30] 칼 윌슨이 보컬을 맡았다. [31] 곡의 스타일 자체도 맨슨의 원곡 Cease to Exist는 포크송인 반면 데니스의 버전은 하모니를 위주로 한 바로크 팝에 가깝다. [32] 비치 보이스의 미발표곡 중 하나인 H.E.L.P is on the Way는 이 가게를 홍보하기 위한 곡이다. [33] 앨범의 이름은 앨범 타이틀 곡의 이름이자 브라이언 윌슨, 반 다이크 파크스의 작품이었던 Surf's Up에서 따왔다. [34] Here She ComesHold on Dear Brother로 특히 전자의 경우 베이스 라인이 강조된 상당히 그루브감이 강한 곡이다. [35] 사실 그도 그럴게 Pet Sounds와 마찬가지로 이 앨범도 처음부터 브라이언의 솔로 앨범으로 기획되었다가 이후 다른 멤버들의 코러스 정도만 더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데니스가 메인 보컬과 드럼으로 많은 참여를 했다. [36] 다만 이 와중에도 Holland 같은 앨범은 엘비스 코스텔로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앨범 중 하나로 꼽을 정도로 평이 좋기도 하다. [37] 일례로 1988년 발매된 브라이언 윌슨의 셀프 타이틀 솔로 앨범에는 공동 작곡자와 공동 프로듀서로 유진 랜디가 올라가 있었다. 이후 유진 랜디의 착취 실상이 밝혀지면서 이 크레딧은 지워지게 된다. [38] 이 곡은 마마스 앤 파파스의 존 필립스와 마이크 러브가 공동 작곡한 곡으로, 빌보드 차트 1위를 찍으며 대히트했으나 평론가들로부터는 무수한 혹평을 들었다. [39] 스테레오랩 초기 멤버로도 유명하다. [40] 애시당초 이 협업 계획은 브루스 존스턴이 하이 라마스의 Hawaii 앨범을 좋아해 이뤄진 것이었다. [41] 때문에 션은 칼과 브루스에겐 대해서는 호의적인 평을 남겼다. 브라이언하고는 그냥 데면데면한 관계로 그친듯 하다. 다만 여전히 브라이언 윌슨의 음악을 좋아한다고 한다. [42] 영문 위키피디아의 SMiLE 항목을 보면 아예 완성에 준하는 수준으로 평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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