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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프르셰미슬 왕조 17대 공작 블라디슬라프 1세 Vladislav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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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
블라디슬라프 1세 (Vladislav I) |
출생 | 1070년 | |
사망 | 1125년 4월 12일 (향년 54~55세) | |
재위 |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 |
1109년 ~ 1117년 | ||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복위) | ||
1120년 ~ 1125년 | ||
자녀 | 스바티바, 블라디슬라프 2세, 디에폴트 1세, 안드르지흐 | |
아내 | 베르크의 리체자 | |
형제 | 바츨라프, 유디트 프르셰미슬디카, 루드밀라, 볼레슬라프, 브라티슬라프 2세, 보르지보이 2세, 유디트 그로이치스카, 소베슬라프 1세 | |
아버지 | 브르제티슬라프 2세 | |
어머니 | 시비엥토스와바 스와티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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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헤미아 공국 프르셰미슬 왕조 17대 공작.2. 행적
1170년경 보헤미아 국왕 브르제티슬라프 2세와 폴란드 대공 카지미에시 1세의 딸 시비엥토스와바 스와티와의 삼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유년기는 알려진 바 없지만, 프라하에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105년 사촌 스바토플루크 2세가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의 지원을 받고 그의 형인 보헤미아 공작 보르지보이 2세를 폐위시키려 했을 때, 그는 보르지보이 2세를 도와서 이를 격퇴하는 게 기여했다. 그러나 1107년 스바토플루크 2세가 헝가리 국왕 칼만과 볼레스와프 3세의 지원에 힘입어 프라하에 입성했을 때 그가 보헤미아 공작이 되는 걸 받아들였다. 그 대신, 그는 스바토플루크 2세의 후계자로서 보헤미아 공작을 계승하기로 했다.1109년 9월 21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와 손잡고 폴란드를 향한 원정을 단행하려던 스바토플루크 2세가 암살당했다. 당시 해외에 망명해 있었던 보르지보이 2세는 스바토플루크 2세가 암살되었다는 솟기을 접하자 볼레스와프 3세의 지원을 받으며 프라하로 진격했지만, 스바토플루크 2세의 형제인 오타 2세에게 패배하고 사로잡힌 뒤 프라하 요새에 감금되었다. 그로이츠슈 백작 비프레히트 2세의 장남인 비프레히트 3세가 보르지보이 2세를 도우려 했지만 프라하 인근 전투에서 오타 2세에게 격퇴되었다. 이후 양자는 보헤미아 각지에서 내전을 이어가다가 1110년 하인리히 5세가 블라디슬라프 1세로부터 은화 500 흐리브냐를 제공받은 뒤 보르지보이와 비프레히트 3세를 봉국을 혼란에 빠뜨린 죄로 체포하고 보르지보이 2세의 남동생 블라디슬라프 1세를 보헤미아 공작으로 선임하면서 분쟁이 종식되었다.
블라디슬라프 1세는 공작위에 선임된 후 잠재적인 정적들을 대거 숙청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형제 소베슬라프 1세는 폴란드로 망명한 뒤 볼레스와프 3세와 손잡았다. 1110년, 볼레스와프 3세는 소베슬라프 1세를 보헤미아 공작에 앉히기 위해 프라하로 진격했지만, 보헤미아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실패했다. 그는 본국으로 귀환하다가 보헤미아군의 추격을 받았지만 1110년 10월 8일 트루티나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을 격멸했다. 하지만 전쟁 물자가 바닥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물러났다. 1111년, 양자간의 협상 끝에 합의가 도출되었다. 소베슬라프 1세는 블라디슬라프 1세를 보헤미아 공작으로 인정하는 대신 흐라데츠 크랄로베 시의 통치권을 얻었다. 소베슬라프 1세는 1115년에 브르노 및 즈노이모의 통치권을 물려받았다.
1114년 1월, 블라디슬라프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와 잉글랜드 공주 마틸다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이때 그는 수석 시종을 맡았는데, 이는 훗날 체코 군주가 선제후로서 독일왕을 선출할 권리를 확보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1117년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 3세의 압력에 못 이겨 보르지보이 2세를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시키고 자신은 자데츠만 소유했다. 하지만 보르지보이 2세는 이후 3년간 홍수와 폭풍 등 자연재해에 시달리는 바람에 민심을 잃었고, 그는 이를 틈타 1120년 정변을 일으켜 보르지보이 2세를 헝가리로 축출했다. 이후 소베슬라프 1세의 영지를 모조리 몰수해 해외로 망명하게 만들고, 브르노를 오타 2세에게, 즈노이모를 콘라드 2세에게 양도했다.
1125년 임종을 눈앞에 둔 그는 사촌 오타 2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어머니 시비엥토스와바와 프라하 주교 오토 밤베르스키가 강력히 반대하자, 그는 마음을 바꿔 형제 소베슬라프 1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 해 4월 12일에 사망했고, 클라드루비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가 사망한 후 소베슬라프 1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3. 가족
- 베르크의 리체자(? ~ 1125): 베르크 백작 하인리히의 딸.
- 블라디슬라프 2세(1110 ~ 1174): 보헤미아 공작(1140 ~ 1158), 보헤미아 국왕(1158 ~ 1172)
- 디에폴트 1세(1120/25 ~ 1167): 소베슬라프 1세와 블라디슬라프 2세 치세 때 핵심 관료이자 장군으로 활약했다.
- 인드르지흐(? ~ 1169): 제2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으며, 구호기사단의 회원이 되었다.
- 스바타바 체스카(? ~ 1146년 이후): 바이에른 귀족 프리드리히 폰 보겐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