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15:46

브라티슬라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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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프르셰미슬 왕조 14대 공작
브라티슬라프 2세
Břetislav II
파일:브라티슬라프 2세.jpg
제호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브라티슬라프 2세
(Břetislav II)
출생 미상
사망 1100년 12월 22일
재위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1092년 ~ 1100년
자녀 브라티슬라프
아내 보겐의 루카르타
형제 바츨라프, 유디트 프르셰미슬디카, 루드밀라, 볼레슬라프, 보르지보이 2세, 블라디슬라프 1세, 유디트 그로이치스카, 소베슬라프 1세
아버지 브르제티슬라프 2세
어머니 아들레타 우헤르스카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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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헤미아 공국 프르셰미슬 왕조 14대 공작.

2. 행적

보헤미아 국왕 브르제티슬라프 2세와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1세의 딸 아들레타 우헤르스카의 장남이다. 108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작센군으로부터 보헤미아 국경을 사수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기습 공격을 받아 대부분의 일행을 잃고 간신히 도주했다. 이후 흐라데카를 영지로 수여받은 그는 1091년 아버지가 자신의 형제이자 브르노 공작 콘라드 1세를 정벌하기 위해 모라비아로 진군한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의 심복인 즈디라드를 살해했다. 이에 분노한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콘라드 1세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보헤미아로 돌아와서 아들을 격파했고, 브라티슬라프 2세는 헝가리로 피신했다.

1092년 1월 14일, 브르제티슬라프 2세가 낙마사고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사후 콘라드 1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지만 그해 9월 6일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브라티슬라프 2세가 헝가리에서 돌아온 후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고, 하인리히 4세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대가로 보헤미아를 영지로 삼는 것을 승인받았다. 그는 브르쇼프 가문의 가주 무티나가 폴란드 대공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한 끝에 그의 직위를 박탈하고 전 재산을 압류한 뒤 국외로 추방했다.

1094년 평민들 사이에서 아직도 행해지고 있던 이교 의식을 금지하고, 이교도들이 신봉하는 '신성한 나무'를 뽑아내고 숲을 파괴했다. 1097년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의 유산인 슬라브 전례에 따른 예배를 여전히 지키고 있던 슬라브 수도자들을 사자브 수도원에서 추방하고 라틴 전례를 준수하는 베네딕토회가 사자브 수도원을 관리하게 했다.

1096년 제1차 십자군 원정 당시 십자군이 보헤미아를 통과하면서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많은 유대인들이 이를 피해 헝가리와 폴란드로 도주했다. 1098년, 브라티슬라프 2세는 해외로 도주한 유대인들이 재산을 옮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게 했으며, 여전히 보헤미아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을 기독교로 강제 개종시켰다.

1097년 브르노 공작이자 브르제티슬라프 2세의 동생 콘라드 1세의 장자로서 브라티슬라프 2세의 사촌인 올드르지흐가 브라티슬라프 2세 사후에 자신이 나이가 가장 많으니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나이가 가장 많은 자가 항상 공국의 권력과 권위를 갖고, 모든 형제와 후손들은 그의 통치 아래 복종하라"고 정한 원칙에 따라 자신에게 보헤미아 공작위가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격분한 브라티슬라프 2세는 올드르지흐를 체포해 클라드스코 성의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1099년 부활절에 레겐스부르크 제국 의회에 참석한 브라티슬라프 2세는 자기 아들 브라티슬라프 대신 이복 남동생 보르지보이 2세를 상속인이자 후계자로 지명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로부터 보르지보이 2세가 보헤미아를 영지로 삼는 것을 승인받았다. 그가 이런 조치를 내린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사촌 올드르지흐의 영지를 몰수하고 보르지보이 2세에게 넘겼다. 이에 브르제티슬라프 2세의 동생이며 올로모우츠 공작이었던 오타 1세의 아들들인 오타 2세, 스바토플루크 2세는 숙청될 것을 우려해 해외로 망명했다.

1100년 12월 22일, 브라티슬라프 2세는 즈베치노 마을 인근에서 사냥하고 돌아오던 중 로렉(Lorek)이라는 괴한이 쏜 화살에 맞아 암살당했다. 로렉은 도주를 시도했지만 체포를 피할 수 없게 되자 단검으로 자신의 몸을 찔러 자살했다. 그에게 큰 피해를 입었던 브르쇼프 가문이 암살을 사주했다는 설과 보르지보이 2세가 사주했다는 설이 세간에 나돌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사후 보르지보이 2세가 보헤미아 공작위에 선임되었다.

브라티슬라프 2세는 바이에른 출신의 알브레히트 백작의 누이로 알려진 보겐의 루카르타와 결혼하여 1095년에 외아들 브라티슬라프를 낳았다. 브라티슬라프는 1126년 보헤미아 공작 소베슬라프 1세에 의해 도닌 성에 투옥되었고, 1129년 데친 성으로 옮겨진 뒤 1130년 실명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