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3 23:49:57

북정일기

1. 개요2. 신유의 북정일기3. 박권의 북정일기4. 김성일의 북정일기5. 이여규의 북정일기6. 안일리의 북정일기7. 이정규의 북정일기8. 저자 미상의 북정일기

1. 개요

北征日記. 조선 시대에 저술된 일기로 총 일곱 종류가 현존하고 있다.

2. 신유의 북정일기

조선 효종 9년, 1658년에 나선정벌군의 지휘관이던 신유(申瀏, 1619년 ~ 1680년)가 전쟁 과정에서의 매일의 일상을 기록한 일기. 북정록(北征錄)이라고도 부른다.

1658년 4월 6일 조총수 200명, 초관 60명으로 구성된 제2차 나선 정벌군의 출발을 시작으로 6월 10일에 러시아군을 격파, 8월 27일 한양으로 돌아오는 141일간의 일상을 하루도 빠짐없이 상세히 기록한 것으로, 당대 최고 지휘관의 입장에서 출정의 배경과 부대 편성 및 군량미 운송, 러시아군 정벌 상황과 전과, 출정로 등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지휘관이었던 신유 개인의 입장에서 나선정벌을 살펴 볼 수 있다는 것도 큰 의미다. 북정록에는 신유의 개인적인 심정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는데 타지에서 죽어나가는 부하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청나라 정벌군 지휘관 사르후다와 청군 장수들의 부정부패, 청군의 무능한 전투능력 등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고 청군의 횡포가 심해질수록 감정적으로 동요해 초반엔 청군들의 이름과 직급을 그대로 적으며 존칭을 쓰다가 뒤로 갈수록 '오랑캐', '탐욕스러운 놈들'이라며 욕하고 나선정벌 전쟁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이역 정벌 일기이자 진중일기 중 하나이다. 제2차 나선 정벌에 관해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1차 사료로 인정받고 있으며, 특히 중국에는 당시 전투에 관한 상세한 역사 자료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아 더욱 소중한 가치가 있다. 기한이 짧고 그렇게 많이 알려진 전쟁이 아니라서 그렇지 수록된 정보의 중요성과 신뢰성, 기록의 상세함만 본다면 난중일기에 살짝 못미치거나 거의 준하는 역사적 사료라고 볼수 있다.

신유가 진중에서 직접 쓴 북정일기 원본은 1977년에 대구광역시의 유명한 한학자인 이인재의 서재에서 발견되어 아직 이인재(개인)이 소장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있는 신유의 문집인 봉하유고(鳳下遺稿)에도 북정일기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봉하유고에는 북정일기 외에도 나선 정벌 도중 주위 경관을 보며 지은 시인 단천도중(端川途中)이나 마천령(摩天嶺) 등의 시문들도 같이 수록되어 있다.

국내 역덕 커뮤니티에서 청군의 기강 해이 관련으로 인용문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물론 당대의 사정을 보면 당시 청나라 조정에서는 남명 잔당을 소탕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북방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질이 낮은 병력들을 투입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말이다.[1]

3. 박권의 북정일기

조선 숙종 38년, 1712년에 청나라와 조선이 백두산에서 양국의 국경선을 확립하고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울 당시, 그 조사 과정에서의 조선 측 접반사(接伴使)였던 박권(朴權)이 쓴 일기.

조선과 청나라 두 나라 사이에 자주 국경 분쟁 사건이 일어나자 1712년에 양국의 관원들이 백두산에 모여 서쪽은 압록, 동쪽은 토문(土門)으로 국경선을 정하고 정계비를 세우게 된다. 이때 박권이 1712년 3월 17일부터 7월 13일까지 매일의 일상을 남긴 개인일기이다.

조선 채삼인(採蔘人)들의 중국인 살인사건과 범법 월경 사건 등을 문제삼아 청나라 왕실의 발상지인 백두산을 이번 기회에 청나라의 영역 안에 넣으려는 청나라 관원들의 저의와 이를 막으려 분투한 조선 관원들에 대해 연구해 볼 수 있는 1차 사료이다. 또한 김지남(金指南)의 북정록(北征錄), 김경문(金慶門)의 백두산기 등과 함께 대표적인 조선 후기 북방의 국경자료이다.

4. 김성일의 북정일기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초유사로 활약한 학봉 김성일이 쓴 일기. 기묘일기와 함께 "기묘일기부북정일기"(己卯日記附北征日記)라고 부른다.

기묘일기는 선조 12년인 1579년 1월 1일부터 4월 12일까지 휴가를 얻어 경상북도 영양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고 다시 귀경할 때까지의 일기이고, 북정일기는 1579년 9월에서 12월 12일까지 함경도 순무어사를 역임하고 있을 때 쓴 관직일기이다.

김성일 종가 전적이란 명칭으로 대한민국 보물 제905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다. 김성일 종가 전적은 총 56종 261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묘일기와 북정일기 외에도 1570년에서 1573년까지 4년여간 쓴 학봉일기(鶴峰日記), 1590년에 일본 사신으로 갔을 때 쓴 학봉선생해사록(鶴峰先生海槎錄) 등의 여러 저서가 있다.

이 중 북정일기는 1500년대 함경도 지방의 사회, 경제, 군사, 문화 등 여러 생활 실태에 대해 연구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취급받고 있다.

5. 이여규의 북정일기

조선 후기의 문신인 무민당 이여규(李汝圭, 1713년 ~ 1772년)가 쓴 일기.

영조 24년, 1748년에 아버지의 임지였던 북청(北靑)을 한 달간에 걸쳐 찾아가며 그 과정에서의 매일의 일상을 기록한 기행일기이다. 여러 자연 경관과 풍물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으며, 이여규의 문집인 4권 2책으로 이루어진 무민당문집(无悶堂文集)에 수록되어 있다.

6. 안일리의 북정일기

조선 후기의 문신인 안일리(安日履)가 쓴 일기.

숙종 20년, 1694년에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 복향을 놓고 이를 반대하는 척향소(斥享疏)를 올렸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 유배형을 받고 유배지로 이동하면서 지은 유배 일기이다.

유배지인 함경북도 부령까지 이동하면서 겪은 일상을 자세히 기록하였고, 도착 후 먼저 유배를 와 있던 배정휘(裵正徽)를 만나 경학과 장자, 주서절요 등을 서로 강론하면서 학문연구에 주력하는 일상 생활 모습을 일기에 담았다.

안일리의 문집으로 6권 3책으로 이루어진 낙애문집(洛厓文集)에 수록되어 있다.

7. 이정규의 북정일기

대한민국 건국 훈장 애국장에 추서된 의병장인 이정규(李正奎, 1865년 ~ 1945년)가 쓴 일기.

을미사변 이후 일제에 대항하여 제천 의병을 이끌었던 의병장 이정규가 조선 고종 37년인 1900년에 자신의 스승이자 의병대장이었던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을 찾아 중국 요동에 갔다가 귀국하는 과정을 기록한 일기이다.

이정규의 문집인 항재집(恒齋集)에 수록되어 있으며, 항재집에는 북정일기 외에도 을사조약 이후 일제의 침략에 대항해 여러 사람의 힘을 결집시키기 위해 만든 제천 의병의 향약 조직 과정과 시행 내용을 적은 제천향약일기(堤川鄕約日記), 의병을 비도라고 선전하던 일제 측 논리에 반박하며 의병 봉기의 정당성을 주장한 의병정사, 제천 의병의 전개 과정을 밝힌 종의록 등의 저서가 수록되어 있다.

한말 의병 참여자인 이정규 본인이 견문한 내용을 중심으로 수록한 일기로 제천의병 인사들의 교류 관계와 이념을 파악할 수 있다.

8. 저자 미상의 북정일기

조선 순조 때 이름을 알 수 없는 저자 미상의 한 문인이 저술하여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는 일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순조의 노여움을 사 1806년에 함경도 길주(吉州)로 유배된 인물로, 이름은 알 수 없고 단지 목은 이색의 먼 후손이라는 것만 기록하고 있다. 1807년 2월에 길주로 유배되어 9월 1일부터 11월까지 3개월간 일기를 썼다.

현재 전해 내려오는 여러 유배일기 중 하나로 1800년대 초 우리 나라의 유배형에 대해 연구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1] 1차 분쟁 때는 준비가 부족했음에도 적절한 판단으로 승기를 잡았지만 결국 장비나 보급 문제로 포기하고 돌아왔다. 2차 분쟁 때도 보급 문제로 꽤 난관을 겪은 점과 현대에 사료도 남아있지 않는 점을 감안하면 청에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