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00:21:47

부민고소금지법

1. 개요2. 내용3. 역사
3.1. 성립3.2. 쇠퇴3.3. 부활
4. 평가
4.1. 옹호4.2.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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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部民告訴禁止法.

조선 시대에 지방의 향직자(鄕職者)나 일반 백성들이 관찰사 수령 고소하는 것을 금지하던 제도. 일종의 면책 특권이다. 세종 2년인 1420년에 세종의 명(정확히는 당시 상왕이었던 태종의 명령으로)에 의해 처음 시작되어 이후 조선 멸망시기까지 계속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종전때까지 영향을 주었다.

2. 내용

흔히 수령고소금지법(守令告訴禁止法)이라고도 부른다.

고려와 달리 철저한 중앙집권화를 추구하던 조선에서 실시한 일종의 중앙행정화정책의 일환이다. 겉으로는 백성들이 수령을 고소하지[1] 못하게 하는것처럼 보이나 속으로는 지방권력의 실세이던 당시 향리들의 수령 고소를 막아 중앙행정권력인 수령을 보호하려는 중앙행정화정책이었다.[2][3] 물론 백성들 또한 고소가 금지되어 초기부터 폐단이 나오나 세종은 이 문제를 알고도 부민고소금지법을 계속해서 개정해나갔다.[4][5]

3. 역사

3.1. 성립

처음 법이 시행된 시기는 1420년으로,[6] 이 법을 강력히 주장한 인물은 허조이다. 허조가 이 법을 주장한 목적은 사리에 맞고 안 맞는 것을 불문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상하존비(上下尊卑)의 명분을 확립하고자 함에 있었다. 수령은 백성의 부모이고 백성은 수령의 자식인데, 자식으로서 부모를 고소할 수 없다는 논리를 적용하여 매우 아름다운 법이라고 보았다.

법의 내용은 관찰사·수령을 일반 백성이 고소한 경우 이를 수리하지 않으며, 고소자를 장(杖) 100, 도(徒) 3년에 처하였다. 또한 타인을 몰래 사주해 고소하게 한 자도 같으며, 무고한 자는 장 100, 유(流) 3,000리형으로 처벌하는 것이었다.
허조가 간절히 청하기를,

"전날에 상서하였던 바, 부락에 사는 백성이 그 고을 관장(官長)의 범죄한 것을 고하지 못하게 하여, 풍속을 두텁게 하는 법을 마련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다시 참고해 보고자 함은, 이미 이루어진 법을 마음대로 함부로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니, 여러 의논이 분분하여 한결같지 않으나, 다만 이수(李隨) 혼자 말하기를,

"새로 고치는 것이 불가하니, 만일 부락민이 탐관 오리의 잘못을 고하여 하소연하지 못한다면, 방자한 행동이 기탄이 없어서 그 해가 백성에게 미칠 것은 필연한 것입니다."

하였다.
- 세종 1년 6월 21일 갑오 2번째기사

다만 해당 법은 논의될때부터 수령의 부패를 막을 수 있겠냐는 논란이 신하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나왔고 세종 또한 이견이 많으니 법을 바꾸기 위해선 신중해야 한다는 의사를 비쳤으나 허조는 태종의 지지를 받아내어 #[7] 이를 통과시켰다. 1년 넘게 세종의 허가를 받지 못하다 태종의 허가를 받은 후 고작 9일 만에 통과 #된 것을 감안하면 이 법은 상왕 태종이 세운 법이라고 보는게 더 합리적일 것이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상략) 또 고소를 금(禁)하는 것은, 옛날에 일찍이 내연(內宴)으로 인하여 허 정승(許政丞)이 나에게 청하기를... (중략) ...부민(部民)의 고소하는 풍습을 자라게 할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내가 여러 재상에게 물으니, 박은(朴訔) 정승은 ‘가합니다.’ 하고, 유정현(柳廷顯) 정승은 말이 없이 불긍(不肯)하였고, 목진공(睦進恭)은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감사(監司)의 직임을 지냈사와 갖춰 아는데, 이 법은 참으로 행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므로, 감히 경솔히 쉽게 입법(立法)하지 못하였는데, 그 뒤에 허 정승이 태종(太宗)께 청하니, 태종께서 좋게 여기어 곧 이 법을 세우도록 명령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모두 생각하기를, 이 법이 마침내 폐단이 없이 거행될 수 있을까 하였었다.

그 뒤에 수령(守令)이 불법(不法)한 자가 많으므로, 조정 의논이 암행(暗行)을 보내어 찰방(察訪)하고자 하여, 내가 허 정승에게 물으니, 허 정승이 말하기를, ‘만일 군명(君命)으로 하문(下問)하신다면 가합니다.’ 하였다. 이것은 허 정승이 쉽사리 발언(發言)하고 중(重)하게 여기는 것 같지 않았다. 이에 암행 찰방(暗行察訪)을 보내었더니, 찰방(察訪) 이종규(李宗揆) 등이 도리어 폐단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뒤로는 암행 찰방을 보내는 것을 드디어 폐하였다.(하략)
- 세종 28년 6월 18일 갑인 1번째기사

결국 우려했던 대로 수령들은 부패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막기 위해 여러가지 보완책을 세웠으나 이로는 부족하여 수령이 은밀하게 부정을 저지르거나 조사하라고 보낸 관리가 수령과 결탁하는 등의 일이 발생하게 된다.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해당 법을 주장하였으나 적용 후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허조를 보고 세종은 허조가 나랏일을 중하게 판단하지 않았다고 여기며 후회한다. 하지만 엄연히 이미 실행중인 법이기에 이를 바꾸는 일도 신중히 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선왕의 결정을 뒤집는 것도 쉬운일은 아니기에 결국 마지막까지 고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만다.

3.2. 쇠퇴

파일:박시백 단종세조실록1.jpg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부민고소금지법이 잠시 폐지되었던 시기는 조선의 7대 왕이었던 세조 시기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세조는 억울하다며 고소한 백성들에게 장을 때리고 유배를 보내는 부민고소금지법을 극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8] 세조는 즉위 후 부민고소금지법을 바로 폐지하였다. 계유정난 및 왕이 된 후의 각종 실책 때문에 세조를 싫어하는 이들도 이것만큼은 좋게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막상 본인의 최측근 공신들에 대해서는 관리를 안하여(...) 파리들만 잡았지 막상 큰 호랑이들은 전혀 못 잡았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존재하였다. 또한 폐지 시 발생할 영향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폐지하여 수령의 지위는 다시 위태로워졌고 이는 나중에 부민고소금지법이 부활하는 계기가 된다.

3.3. 부활

이후 세조 사후 성종 4년인 1473년에 성종이 유학자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다시 부활시켰고, 당시 개정되던 경국대전에도 수령고소금지법에 대한 내용을 수록했다. 이미 예종 때부터 수령에 대한 고소가 점차 활성화되었는데, 문제는 백성들이 이 고소를 빌미로 수령에게 상납까지 뜯는 일까지 발생해 중앙행정권력인 수령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성종은 부민고소금지법을 부활시켰다.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백성들의 안위를 보살피고자 암행어사 격쟁 제도 등이 적극적으로 검토되었다.[9]

중종 19년인 1524년에는 전가사변(全家徙邊)으로[10] 부민의 고소를 더욱 중벌하게 되었고, 훗날 숙종년대에 전가사변율(全家徙邊律)이 폐지됨에 따라 원래의 장 100, 유 3천리형으로 되돌아왔다. 이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부민고소금지법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아무래도 애민의 왕으로 불리던 세종이 이런 법을 만들었다는 것이 조선 당대에도 좀 그랬던지 후대의 왕들은 세종보다는 성종이 만든 법으로 얘기하곤 했다. 사실 완전히 폐지된 법을 성종조에 다시 부활시킨 것이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성종조에 부민고소법을 만들었는데, 이로부터 청렴하지 못한 수령들이 기탄 없이 방자한 행동을 하므로 그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폐단이 이미 고질화되어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 成宗朝 立部民告訴之法 而自是之後 守令不廉者 恣行無忌 欲矯此弊 而弊已痼也 亦未果焉
- 명종실록 권제11, 10장 앞쪽, 명종 6년 1월 19일(정미)

4. 평가

4.1. 옹호

세종시대의 전문 연구자들의 말에 따르면 오히려 소신행정을 도와 국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태종과 세종의 뜻에서 시행한 제도였다고 한다.
허조는 아뢰기를,

"부민(部民)들의 고소를 금하는 것은 그것이 풍속을 파괴하는 까닭입니다. 만약 그 단서를 〈조금이라도〉 열어 놓으면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고소하게 되어, 점차 풍속이 박하고 악하게 될 것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억울하고 원통한 정을 펴 주지 않는 것이 어찌 정치하는 도리가 되겠는가. 수령이 부민의 전답을 오판(誤判)한 것을, 부민이 그 오판을 정소(呈訴)하고, 개정을 청구하는 것 같은 것이야 어찌 고소라고만 하겠는가...(중략)"

하였다.
- 세종 13년 1월 19일 갑신 3번째기사
허조(許稠)가 아뢰기를,

"부민(部民)의 원억(冤抑)[11]을 호소하는 소장(訴狀)을 수리하여, 관리의 오판(誤判)한 것을 처단하게 하는 것은 존비(尊卑)의 구분을 상실할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전일 소신이 헌책(獻策)한 것에 따르게 하소서."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고금 천하(古今天下)에 어찌 약소(弱小)한 백성은 원억(冤抑)함도 말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 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경의 뜻은 좋지만, 정사로서 실시하기에는 정당하지 않다."

하였다.
- 세종 15년 10월 23일 임신 1번째기사
위 대화에서 알 수 있듯 해당 법의 목적은 단순히 아랫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해도 윗사람에게 항의하지 못하게 만드는 법만이 아니고[12] 당시 지방세력들로부터 수령의 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다. 지방세력이 수령이 하는 일 하나하나마다 꼬투리를 잡아 고소를 남발하면 수령 입장에선 지방세력의 눈치를 안볼수가 없게 되고 자신의 소신대로 행정을 처리하려 해도 지방세력들의 반발에 무산될 가능성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법을 믿고 수령들이 막나가는 등의 폐단이 있어[13] 여러 보완책을 만드는데 우선 민간으로 암행찰방을 파견하여[14] 민심 및 수령의 위법 여부를 조사하고 문제가 적발된 수령은 다른 직으로 전환하였다. # 또한 밝혀진 죄가 크다고 보이면 곤장을 때리고 유배를 보내기도 하였다, #

또한 수령을 고소하는건 불법이지만 수령의 판단에 억울함을 호소하는것도 막는 것은 옳지 않고 또한 별개의 일이라며 수령에 대한 직접적인 고소는 막되 수령의 판단이 억울할 경우 이를 상고하는것은 받아들이고 재판결을 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약 수령이 착오로 오판한 것으로 드러날 경우 면책해주지만 고의로 법을 지키지 않았을 경우에는 수령을 처벌하게 하였다. # 실제로 아버지를 죽인 수령을 아들이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아들은 처벌하지 않고 수령만 유배보내기도 했다. #[15]

비록 이런 보완책에도 불구하고 수령의 부패를 완전히 막지는 못하였지만 중앙집권제도는 조선에 완전히 녹아들게 되었다.

정리하자면 당시 세종이 추구한 최대 목표는 지역 수령을 성공적인 군현의 경영자로 만드는 것이었고 소신껏 일하는 일부 수령을 지켜주는 순기능을 위해서 이 법을 추진했다는 것이 옹호하는 사람들의 의견이다. [역사 속 행정] 세종의 부민고소금지법. 주민권리 침해인 줄 알면서도 소신행정 도와 국가 안정 도모

간단하게 지방권력이였던 향리들로부터[16] 중앙행정권력인 수령들을 보호하는 일종의 중앙집권적 정책인 셈이였다. 즉, 세종의 부민고소금지법은 농민들의 수령고소금지가 아닌 향리들로부터 수령을 보호하는데에 초점을 맞추었고 지방권력을 완전히 잡는데에 목적을 둔 법이다.

4.2. 비판

물론 이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도 있긴 하다. # 2018년 경에도 학계 내에서 이 제도가 세종의 애민정신과 국가발전을 위한 큰 뜻이 담긴 선법인지, 아니면 조선왕조 500년의 발전을 저해시킨 악법인지를 두고 의견이 갈리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법이 시행되는 초기에도 여러 문제들이 발생했지만 허조는 위계질서가 깨진다는 이유로 법 수정조차 반대하여 여러 논란들을 일으켰다.

두 의견을 종합해보면 세종이 이 법을 제정함에 따라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잘못을 함부로 지적하거나 고발하는 데서 오는 명분의 파기를 막고 소송의 남발에 따르는 행정상의 공백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으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백성들의 민원과 언로(言路)가 억제되고 나중에는 백성들이 수령의 일방적인 통제와 지시에 따라야만 하는 노예와 같은 상황을 맞이한 부정적인 기능이 나타났다고 보면 될 듯하다.[17]

[1] 정확히는 살인 같은 중범죄는 얼마든지 고소가 가능하게 했다. 참고로 허조의 경우는 역모 등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하지 못하게 하자고 주장했다. [2] 이는 태종 때부터 향리들이 수령을 고소하며 부정부패를 일삼는다는 기록으로도 나온다. [3] 태종 10년 4월기사 [4] 대표적인것이 백성들이 수령한테 오심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상부기관에 재심을 요구할 수 있게 하는 것 등이었다. [5] 다만 허조는 위계질서를 해친다는 이유로 개정을 계속 반대했다. [6] 세종 2년 [7] 사모를 벗고 머리를 땅에 부딪치는 퍼포먼스까지 해가면서 호소하였다. [8] 세조의 행적이 워낙 나쁘기는 했지만 애민군주의 측면도 있었다. 공신들과 얽히면 공신들 편을 들기는 했지만... [9] 격쟁의 경우 징을 두드리든 아니면 임금을 직접 뵙는 방식으로든 어쨌거나 임금에게 직접 "이러이러한 일이 있어 억울하옵니다" 하는 일이니 어쨌거나 고소는 아니다. 그냥 "제가 억울한 일이 있어요. ㅠㅠ"일 뿐 [10] 가족 전체를 변방으로 쫓아내는 것 [11] 원통한 누명을 써서 억울함 [12] 다만 허조는 주자성리학적 질서로 진지하게 이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허조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당시 기준으로도 상당히 꼬장꼬장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본인도 청렴하고 몸가짐을 철저히 하여 이중잣대라는 비판은 받지 않았다. [13]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이 악용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14] 암행어사 제도는 나중에 생겼다. [15] 살인같은 중범죄는 해당이 안되는데 문제될게 없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 사건은 조금 복잡한게 아들이 억울함을 호소했을때 수령은 이미 살인에 대한 죄값을 치른 상태였다. 그러나 아들은 살인죄와 다른 죄를 추가하여 고소하였는데 살인죄는 이미 끝난 일이므로 부민고소금지법을 적용할지, 아니면 살인을 저지른건 맞으므로 적용하지 않을지 의견이 나뉘었다. [16] 조선초 아직 태종태세 시절에는 지방권력이였던 향리들의 권세가 지방에 남아있었다. [17] 물론 위에서 말했듯 격쟁이 있다. 어쨌든 '고소'하는 것이 아닌 만큼 부민고소금지법을 어기는건 아니다. 문제는 격쟁을 하려면 결국 왕이 사는 한양 궁성까지 직접 찾아가야 했는데 일반 백성들 중 그럴 여력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고 또 격쟁을 시도했다 잘못되면 왕을 능멸했다며 아작이 났다는 것. 아주 드문 확률로 임금이 행차를 할 때 들이닥치는 방법도 있긴 했으나 애초에 조선시대 왕은 한양을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어서 지방민에겐 유명무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