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3764><colcolor=#fff> 변상벽 卞相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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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변상벽(卞相壁) |
본관 | 밀양 변씨 |
출생 | 1726년 이전?[1] |
사망 | 1775년 4월[2] |
국적 | 조선 |
자 / 호 | 완보(完甫) / 화재(和齋) |
직업 | 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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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표작인 '묘작도(猫雀圖)' |
조선 후기 영조대에 활동했던 화가로, 고양이를 잘 그렸던 화가로 유명하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진 것이 없으나, 도화서의 화원으로 활동하다가 1763년과 1773년에 영조의 어진을 제작한 공으로 곡성현감을 지내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생애
변상벽은 밀양 변씨의 중인 집안에서 무관 변운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말이 어눌하였거나 말을 잘 하지 못했으며, 사람과 만나는 것도 꺼릴 정도로 상당히 내성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고양이나 닭과 같은 동물 그림 하나는 정말 잘 그렸다고 명성이 자자했는데, 이 때문에 '변고양이'나 '변계(卞鷄)'라는 별명이 붙었다. 정극순의 '변씨화기(卞氏畵記)'에 의하면, 변상벽은 원래부터 고양이를 잘 그린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산수화에 재능이 없는 것을 알고 고양이 그림에 전념하였다고 한다[3]. 그는 고양이에 익숙해지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며 그 모습을 익혔다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 많은 관찰이 선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사제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당시 화원으로 활동했었고, 20살에 이미 화가로 유명했기에 도화서의 화학생도(畵學生徒)로서 그림을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 몇몇 도감에 차출되어 활동한 것이 기록에서 확인된다. 이후 1763년과 1773년 두 번 영조의 어진 제작에 참여[4]하였다. 첫번째 어진을 제작한 공으로는 구산(龜山)의 첨절제사[5]로, 두번째 어진을 제작한 공으로는 곡성현의 현감직을 받았다. 1773년 5월 곡성 현감으로 부임되어 활동하다가 1775년 4월 사망하였다.
3. 작품
현전하는 변상벽의 작품 대부분은 고양이와 닭을 그린 작품으로, 고양이 그림 15점, 닭 그림 14점, 새를 그린 그림 두 점, 닭을 그린 그림 두 점, 토끼를 그린 그림 한 점이 남아 있다. 대표작으로는 묘작도와 모계영자도, 국정추묘, 자웅장추, 추자도, 견도 등이 있다.자웅장추 | 견도 | ||
모계영자도 (부분) | 국정추묘 |
다만 안타까운 점은 진휘속고(震彙續攷)에 의하면 변상벽이 그린 초상화가 백 개를 넘겼고, 초상화도 잘 그려 '국수(國手)'라는 평을 받았다고 하나, 현재 전해지는 초상화 작품은 없으며, 보물 제1496호 윤급 초상만 그가 그렸다고 추정될 뿐[6]이다.
오랜 관찰을 바탕으로 하는 사실적인 묘사와 세심한 필치로 그려낸 생동감 있는 모습이 매우 특징적인데, 이런 사실주의적 특징은 당대와 후대 문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영향은 영묘화초화에서 특히 잘 드러나는데, 김홍도와 강세황의 송하맹호도나 마군후의 묘도, 남계우의 작품 등에서 그 영향을 살펴볼 수 있다.
4. 여담
[1]
정극순이 변상벽을 보고 쓴 '변씨화기(卞氏畵記)'라는 문헌에 의하면 1746년에 약관(20살)의 나이를 넘겼다고 하고, 변상벽의 형인 변상진이 1719년생이므로 변상벽의 생년은 1720~1726년으로 추정된다.
[2]
곡성읍지에 변상벽이 1773년 5월에 부입하여 1775년 4월에 사망하였다고 적혀 있다.
[3]
변상벽 본인이 "재주란 넓으면서도 조잡한 것보다는 한 가지에 정밀하여 이름을 이루는 것이 낫다. 나 또한 산수화를 마땅히 배웠으며, 지금의 화가를 압도하여 그 위로 올라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사물을 골라 연습을 하였다. 저 고양이는 가축인지라 매일 사람과 친근하기에 관찰을 통해 익숙해질 수 있으며, 생리를 깨치고 모습을 익히면 그 형태를 자연히 그릴 수 있다." 라고 말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4]
두 어진 모두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5]
조선의
무관 관직으로, 부대의 지휘관에 해당한다.
[6]
오세창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변상벽이 윤급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화재화정(和齋畵幀)의 기록을 인용되고 있어 이로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