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23:33:31

백설희(1939)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북한 과학자, 정치인.

2. 생애

1939년 10월 18일에 가난한 품팔이꾼의 딸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고급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1964년 3월, 김일성종합대학 생물학부를 졸업하였다. 이후 과학원 생물학연구소에 배치되었으며 이후 식물학연구소 연구사로 일했다. 이후 결혼도 하지 않고 14년간 품종개량에 몰두하여 '기름골'이란 식용유의 원료가 되는 식물품종을 개발하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경제적 침체에 시달리던 북한은 숨은운동 따라배우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이를 보고받은 김일성은 크게 기뻐하며 1979년 10월 6일, 백설희를 불러 크게 치하하고 자신이 입당 보증인이 되어 조선로동당에 즉시 입당을 시켜주었으며,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을 통해 농업박사 학위와 로력영웅 칭호, 마치와 낫 금메달, 국기훈장 제1급을 내렸다. 여기에 김일성시계까지 따로 줬으니 김일성이 기쁘긴 어지간하게 기뻤던 모양이다.

그녀의 소식은 이틀이나 로동신문 1면에 실렸으며 정령은 "주체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당과 혁명에 대한 끝없는 충성심과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을 높이 발휘하여 농업생산을 고도로 집약화하는데서 나서는 과학기술적문제를 성과적으로 풀어나감으로써 이미 마련된 경제토대를 보다 효과적으로 리용하여 인민생활을 더욱 높이기 위한 투쟁에서 영웅적위훈"을 세웠다고 백설희를 치하했다. 1980년에는 백설희에 대한 <봄을 먼저 알리는 꽃이 되리라>라는 가요와, 백설희를 주인공으로 한 <열네번째 겨울>이라는 영화도 제작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216 번호판을 단 벤츠까지 하사받았다는 말이 있다. 정작 문제의 기름골은 북한 토질에 맞지 않아서 그만두게 되었다나... 땅 속으로 너무 깊이 퍼져서 수확이 어려웠던데다 재배하면 할수록 점점 퇴화되어 작아지면서 뽑아낼 수 있는 기름의 양도 너무 적다는 문제도 있었다고 한다.

단박에 북한을 대표하는 과학자로 떠오른 그녀는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고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도 선출되는 한편 1982년 4월에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4년 12월, 소위 '백설희연구소'로 불리는 농업과학원 자원식물학연구소 소장에 임명되었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고 1992년 교수 칭호를 받았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소장으로 일하면서 계속 품종연구를 하였고, 고산지대에서 잘 자라는 콩품종 개발에 성공했으며 경제식물자원수집 및 보존 연구, 북한에 새로운 나무 품종 도입육성 사업을 전개하였으며 <세계유용식물사전>, <경제식물자원사전> 등을 집필했다고 한다.

그런데 심화조 사건에 휘말려 숙청되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농업비서를 지낸 서관히가 처형되면서 백설희는 서관희의 애첩이며 당의 농업정책을 망친 해독분자로 지목되었고 백설희와 그녀의 노모, 동생, 조카들까지 모조리 강원도 천내군 천내탄광에 끌려갔다 카더라. 18호 수용소에서 백설희를 봤다고 주장하는 탈북자들도 있었다. 백설희랑 같은 수용소에 있었던 탈북자 증언 참조. # 다만 이 사람의 증언으론 백설희는 가족이 없어서 독신자 합숙소에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심화조 사건은 결국 채문덕이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그 덕분인지 풀려나긴 했다고 한다.

2003년과 2004년 북한 선전매체에 백설희의 이름이 언급되었으며 2015년에는 열네번째 겨울이 다시 방영되었다. 그리고 2019년에 김정은이 농업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던 백설희에게 생일상을 하사하면서 생존이 확인되었다. 2023년 7월, '전승 70돐' 국가학위학직수여위원회 결정에 따라 후보원사 칭호를 수여받았다.

3. 참고문헌

  • 림일, 김씨왕조 3대 숙청사 (中), 월간북한 2014년 4월호.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
  • 조선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