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송면 文松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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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6648b> 이름 | 문송면(文松勉) |
출생 | 1971년 2월 14일[1] |
충청남도 서산군 원북면 양산리[2] | |
사망 | 1988년 7월 2일 (향년 17세)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 |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 |
소속 | 협성계공 주식회사(1987.12.5~1988.2.8)[3] |
학력 | 태안중학교 졸업 |
가족관계 |
아버지[4], 어머니[5] 누나 2명, 형 문근면 동생 2명 |
종교 | 무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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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시민이자 산업재해 피해자. 17세의 어린 나이에 수은 등 중금속 중독으로 요절했다.2. 생애
충청남도 태안군의 극빈한 시골 농가에서 4남 2녀 중 넷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 1987년 재학 중이던 중학교에 온도계·압력계 제조업체인 ‘협성계공’의 직원들이 직원 모집을 위해 내려왔다. 잠은 기숙사에서 재워주고 밤에는 야간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말에[6] 1987년 12월 5일 협성계공에 입사하여[7] 신너와 수은을 취급하는 작업을 했다.[8]3. 사망
1988년 6월 29일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으로 병원을 옮겨 치료를 받다가 3일 뒤인 7월 2일 구토물이 기도를 막아 질식사했다. 향년 17세. 입사 후 약 7개월, 증상 발생 후 반 년만에 사망했다.[10]사망 직전에는 대소변조차 가리지 못할 정도로 몸이 상당히 쇠약해졌다.
4. 사후
이 사건은 대한민국에서 많은 사회적 물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초기에 가족들은 이 일을 산업재해로 신청하려 했으나 노동부는 계속 반려하다 사망 2주 전인 6월 20일에야 산업재해로 인정했다는 점이 큰 공분을 일으켰다. 특히 고인은 투병 당시 "살고싶어, 병 다 나으면 무서운 서울 떠나 농사지으며 엄마랑 살자."라는 말을 남겨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1]
문송면의 형인 문근면의 증언에 의하면 문송면의 생년으로 알려진 1973년은 호적상의 생년이며,
실제로는 두 살이 더 많은 1971년생이라고 한다. 당시는 영아 사망률이 높아 2년 정도
출생신고를 미루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문근면 본인도 해당 인터뷰에서 본인이 호적 상으로는 1968년생이나 실제로는 1966년생이라고 했다.
[2]
현재의 태안군 원북면. 당시는
서산군이었는데, 태안군은 1989년 서산에서 분리되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갈무리해 놓은 기사. 서산군 태안읍 출신이라 되어 있다
[3]
현
협성히스코
[4]
1989년에 뇌종양으로 작고. 차남 문송면의 사망 사실을 죽을 때까지 몰랐었다고 한다.
[5]
1936년~
1937년 생
[6]
1980년대 이후로 점차 줄어들고있기는 했지만 이런 목적의
산업체 부설학교들이나 일반학교에서 야간반을 따로 두는 경우가 꽤 남아있던시절로 1990년대를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사라져서 2000년대와 2010년대에는 자취를 감추었다.
[7]
당시 16세. 빠른 생일이라 입사 당시 중학교 3학년.
[8]
당시만 해도 관리자들이나 직원들이나 수은을 다루는 것이 매우 조악했다. 협성계공이라는 업체가 영세했던 것이 큰 원인이었고, 또한 1970~1980년대에는 공해산업의 비중이 높던 시절이었으며, 환경 규제 또한 약했다. 거기에다가 평일 야근+토요일 근무로 연간 평균 노동시간이 3,000시간에 육박했을 정도로 노동인권에 대한 인식도 열악하기 그지 없었고, 이러한 환경이니 자연히 산업재해 자체가 매우 빈번할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볍게 다치는 정도는 흔한 일처럼 여겨졌고, 또한 심한일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원진레이온 사태때처럼 관계기관과의 유착으로 별로 심하지 않던것처럼 덮어버리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9]
병가를 냈으나 결국 회사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사망했다.
[10]
질병 진단 이후 기준으로는 약 4개월만에 사망했다.
[11]
'지구가 죽어가고 있다'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있다.